비판으로 족한 것을 비난하지 말자. "따뜻한 말은 생명의 나무가 되고 가시 돋친 말은 마음을 상하게 한다."(잠언, 15장 4절)
by 슈타인호프 2008 이글루스 TOP 100 2009 이글루스 TOP 100 2010 이글루스 TOP 100 2011 이글루스 TOP 100 2013 대표 이글루 2016 대표 이글루
이글루 파인더


메모장

카테고리
전체
기록공지
일상잡상
가족일기
몽유잡담
도서잡담
만화잡담
음식잡담
기행잡담
게임잡담
영화잡담
문답설문
낭만잡담
까칠할때
도서좌판(판책+공지)
좌판매물(팔책)


역사 : 통사(?~?)
한국고대(~668)
한국중세(~1392)
한국근대(~1910)
한국현대(~20XX)
한국전쟁연대기(500501~550731)
세계고대(~476)
세계중세(~1453)
세계근세(~1789)
세계근대(~1900)
세계현대(~20XX)
자연사說


한국뉴스
외국뉴스
뉴스비판


봉황의 비상
큰칼짚고일어서서:이순신戰記
내가 히틀러라니!!!
은영전 팬픽
미래뉴스
新 비잔티움 연대기
기타창작


멋진펌글
유머만담
클러스터맵
☆☆☆☆
★★★★
※※※※
미분류

태그
코알라 마루타 북방물개 지구온난화 러쿤 731부대 오마이뉴스 독도강치 우한폐렴 오늘도기자를까자 독도바다사자 유시민 이청천 용병 물개 온실가스 오늘은취재원을까자 일제시대 스마트그리드 코로나바이러스 마피아 일제강점기 화석연료 너구리 생체실험 주한미군 강제동원 홋카이도 미국너구리 대함미사일
전체보기

라이프로그
한국전쟁
한국전쟁

청소년을 위한 파닥파닥 세계사 교과서
청소년을 위한 파닥파닥 세계사 교과서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기억
기억

독소 전쟁사 1941~1945
독소 전쟁사 1941~1945

전격전의 전설
전격전의 전설


rss

skin by jiinny
태그 : 항일투쟁
2010/07/15   이건 장수의 좌대 밑에 수급이 있는 격이로군요. [42]
2009/08/11   의병전쟁 기록의 신뢰성 문제 [16]
이건 장수의 좌대 밑에 수급이 있는 격이로군요.
"진천엔 '적과 동침'하는 항일의거비 있다"


사진 출처는 위 기사


기사에 대한 석줄요약.

1. 저 자리는 원래 의병과 싸우다 전사한 일본 헌병의 순직비가 있던 곳.
2. 그 헌병을 죽인 바로 그 의병장이 돌아가시자 주민들이 의병장을 기리는 비를 순직비 자리에 세움.
3. 좌대의 원 주인인 헌병 순직비는 좌대 밑 땅 위에 세워짐.


이건 확실히 순직비를 부숴버리는 것보다 한층 더한 치욕입니다. 자기를 쓰러뜨린 장본인에게 원래 자기 자리였던 단상을 빼았겼을 뿐 아니라, 자리에서 끌려내려온 후에는 그 밑에 서 있게 되었으니까요. 진천 주민들 센스 굿인데요 ㅎㅎ

하지만 이보다 더 대단해 보이는 건, 1977년까지 저 비를 그대로 두었다는 것. 한봉수 의병장 본인이 무척 장수하셔서 해방 이후 70년대까지 생존하셨음에도 일본 헌병의 순직비가 때려부숴지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는 건 주민들이 의외로 통이 컸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한봉수 의병장 본인이 살아계셨으니까 더더욱 그랬던 게 아닐까 싶기는 해요.

"어르신, 해방도 됐으니 그놈의 비석을 당장..."
"놔둬, 그래도 사람이 죽어서 세운 묘비나 마찬가지인데 부숴서 좋을 거 있나. 그리고 그게 사실 내 공인 트로피잖아."
"......아, 그렇구먼유."

(이 대화는 본인의 창작임)


한봉수 의병장 생전에는 이렇게 유지되다가 돌아가신 뒤에는 자리를 뺐기고 그 밑에 들어감으로써 굴욕↑과 동시에 한봉수 의병장의 위광↑의 역할을 하는 아이템이 되었다...가 아닐까 잠시 생각해 봅니다. 혹시 일본에 시마자키의 후손이 남아있다면(친척은 있겠죠?) 썩 기분이 좋지는 못할 듯 합니다. 하지만 뭐, 일제시대로 인해 생겨난 반일감정을 생각하면 비를 때려부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으로 여겨야지-_-;;

그래도 저 비석이 죽은 이를 기리는 순직비니까 살아남았지, "순직비"가 아니라 "승전비"였으면 무사하지 못했을 공산이 높다에 500원(...)

근데 이 기사를 읽고 잠깐 찾아보니 문제가 좀 있습니다. 꼭 기사만이 아니라 여기저기에 걸친 거지만.

1. 한봉수 의병장의 생몰년
기사는 1884~1972로 적고 있고, 엔사이버에서 확인한 생몰년도 1884.4.18~1972.12.25로 기사와 일치합니다. 그런데 한국학 중앙연구원이 운영하는 <한국 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이하 역대인물정보)>에서는 1872~1970으로 제공합니다-_-;;
그리고 또 황당한 것이, 국사편찬위원회가 제공하는 당시의 재판 기록을 보면 분명히 1910년에 "당년 28세"라고 나오거든요. 이거대로 하면 이번에는 1882년생이 됩니다;;; 하지만 같은 해의 다른 기록에 스스로 27세라고 주장한 게 나오며, 이게 한국식 나이라고 생각하면 만 26세로 1884년생이 맞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엔사이버가 더 신빙성이 높다고 볼 수 있겠네요. 한국학 중앙연구원도 얼마든지 틀릴 수 있고, 그게 문젭니다;;;

2. 시마자키의 계급
기사는 시마자키가 헌병 상등병이라고 하는데, 독립운동사 자료 등을 살펴보면 헌병 중위입니다. 이건 기사 쪽을 지지하는 다른 자료가 없는 것으로 보아 확실히 기사의 오류가 아닐까 합니다. 물론 독립운동사의 부풀리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현재로서는 검증할 데가 없군요. 사진으로는 구분이 안 되는데 저 순직비에는 계급이 새겨져 있을까요?

3. 3.1운동으로 인한 복역기간
한일합방 이후 석방되어 향토에 머무르던 한봉수 의병장은 자기 고장에서 3.1운동을 주도한 대가로 징역형을 선고받았는데, 위 기사에서는 1년형이라고 하고, 엔사이버는 2년형이라고 하고, 독립운동사 기록에서는 2년 6개월입니다. 뭐야 이건-_-;;;



그럼 서울에서 체포되기 전까지의 한봉수 의병장의 의병투쟁에 대해서만 간단하게 적어보면.....

한봉수(韓鳳洙) 의병장은 청주가 고향으로, 본래는 청주진위대의 상등병이었다는 <조선폭도토벌지>의 기록(*)이 있습니다. 기록된 이름을 보면 봉서(鳳瑞)·봉용(鳳用)·봉룡(鳳龍) 봉수(奉洙) 등 다른 이름이 상당히 많은데 이게 의도적으로 사용한 가명인지 아니면 그저 와전이나 오기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 의병에 가담할 당시에는 주막 주인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만약 이쪽이 사실이라면 현역 군인은 아니었다는 이야기가 될 듯.

1907년 8월에 대한제국군이 해산되자 의병에 뛰어들었고, 30여 명의 부대원을 인솔하면서 충청-경기-강원 인접 지대에서 주로 활동하여 세간에서는 "번개 대장"이라고 명성을 떨쳤습니다. 경북에도 침입한 적이 있다고 하고, 일본군의 <조선폭도토벌지>에서도 이름을 거명할 정도로 활약했으며 군경이 파악한 주무장은 노획한 30식 소총이었던 듯 합니다.
역대인물정보에 의하면 일본측과의 교전에서 33전 1패를 기록했다고 하며, 엔사이버는 33차례의 전투에 걸친 한봉수 의병장의 전과가 110여명 사살, 무기 노획 80여 점, 현금 탈취 77만여 원이라고 하는데 이중 뒤의 둘은 사실일 가능성이 큽니다만 110여 명 사살은 약간 신빙성이 떨어지지 않을까 합니다. 의병전투 기록에서, 특히 사살전과는 과장되는 사례가 생각보다 잦아서 말이죠-_-;;; 더구나 역대인물정보는 진천 문배리에서 있었던 시마자키 중위 일행 사살(1908.6.10, 기사에 소개된 바로 그 싸움 - 근데 기사에서는 또 장소가 문배리가 아니라 문백면 옥성리입니다;;;)이 한봉수 의병장의 "의병투쟁의 시초"라고 적어놓고 있을 정도라 말입니다. 이건 벌써 의병활동 10달 후의 일인데 말이죠. 뭔가 엄청난 혼선이 있었지 않나 싶어요. 설마 두 명의 시마자키를 죽이지는 않았을 테고, 비슷한 우편행낭 습격 여러 건이 있었는데 그중 사건의 세부가 혼동된 사건이 있는 게 아닐까 합니다. 어쩌면 행정구역명이 바뀌었을 수도 있지 싶고요.

그리고 세 가지 전과 중 뒤의 둘은 사살보다 신빙성이 높다고 한 건, 대부분의 전투가 일본군 주력과의 충돌을 피하고 기사에 언급된 것처럼 우편 행낭이나 우체국 등을 기습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조선폭도토벌지> 역시 한봉수 부대의 활동에 대해 "우편물의 약탈, 자산가의 겁략을 주로" 한다고 적어놓고 있고요.
우체국에는 다액의 현금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 의병들은 이를 주로 노렸으며, 이쪽은 아무래도 헌병대 같은 군사시설보다 방어가 허술하기 때문에 큰 피해를 입지 않으면서 전과는 크게 올릴 수 있었습니다. 우체국을 파괴하는 것은 현금과 무기(경비가 아예 없는 건 또 아니니까요)를 얻는 손쉬운 수단임과 동시에 전신기 등을 파괴하여 일본군의 통신을 방해하는 길이기도 했으니 일거삼득이었죠.
또한 노획한 현금은 주민들에게 뿌리기도 하고(한봉수 부대가 시마자키를 사살한 다음 전투에서 뺐은 1만여 원도 몽땅 주민들에게 살포했다고 합니다) 의병의 군자금이 되기도 했습니다. 제 과거 포스팅에서 언급한 적이 있듯이, 무기를 구하려면 돈이 필요했으니까요.

하여간 그런 힘든 투쟁의 한 단면이 저런 방식으로 후대에 남다니, 이것도 어찌 보면 상당히 재미있는 일입니다. 아마 저 순직비를 세운 일본인들은 저렇게 입장이 뒤바뀌는 날이 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겠지요.

by 슈타인호프 | 2010/07/15 13:37 | 뉴스비판 | 트랙백 | 덧글(42)
의병전쟁 기록의 신뢰성 문제
일본의 적나라한 침략기 '의병진압기록'

연합뉴스 보도에 의하면, 토지공사 토지박물관이 1907년 7월부터 1909년 6월까지 만 2년 동안 한국에서 의병 진압에 종사한 일본군 보병 14연대의 부대일지를 공개했다고 합니다. "진중일지"라고 하면 부대일지란 이야긴데 이걸 "의병진압기록"이라고 몰아붙여서 기사 제목을 박는 건 좀 그렇군요. 뭐, 딱 그 기간이 의병 진압기간인 건 맞으니 크게 뭐라고 할 건 없겠지만. 따옴표도 붙였고 말이죠.

토지박물관이 어떻게 저런 기록을 입수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이 기사에서 등장한 일본군 보병 14연대는 상당히 유서깊은 부대입니다. 보병 26대대를 기간으로 하여 1875년에 고쿠라(小倉)에서 처음 편성되었고, 애초에는 구마모토 진대 소속이었으나 1888년에는 6사단, 1898년에는 12사단으로 전속되어 1907년에는 12사단 예하에 있었습니다. 이 연대는 주둔지가 북부 규슈니만큼 근대 일본이 벌인 전역에 대부분 참가했었죠. 아직 구마모토 진대 소속이던 1876년에는 아키즈키의 난(秋月の乱)과 하기의 난(萩の乱), 1877년에는 서남전쟁(西南戦争)의 진압에 참가했습니다.
규슈가 한반도와 가깝다 보니 대륙 출동도 상당히 잦은 편이어서, 1882년에는 조선의 임오군란 대처를 위해 출동하기도 했고 1894년에는 청일전쟁에도 참가했습니다. 1904년의 러일전쟁 참여는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그런데 일본어 위키의 14연대 항목에는 1907년의 한반도 출동 이야기는 없네요. 임오군란 때문에 출동한 것(실 전투가 없었던)도 기재했으면서 의병진압 작전을 빼버린 이유가 뭘까나.

* 14연대는 서남전쟁에서 반란군의 공격에 군기를 빼앗기고 도주하는 불명예를 겪기도 했습니다. 당시 14연대는 구마모토의 본영에 합류하라는 진대장 타니(谷) 소장의 명령을 받고 수개 제대로 나뉘어 고쿠라에서 구마모토성으로 이동하다가 미처 이동이 완료되지 않은 상태로 사이고 다카모리 휘하의 사쓰마 반군과 조우했거든요.
무사히 구마모토 성으로 들어간 것은 1제대인 1대대의 절반 뿐, 2제대였던 노기 마레스케 소좌(여순 공방전의 그 노기) 휘하의 3대대 주력 480명은 7월 22일 저녁에 400명의 사쓰마 군과 조우하여 벌인 야간전투에서 사쓰마군의 돌격에 대패, 군기를 잃고 퇴각합니다. 다음날에는 정부군(2대대가 합류)과 반란군 모두 지원군을 받아 1,200명씩의 병력으로 다시 전투를 벌이지만 또 사쓰마군의 돌격으로 완패하죠. 이때 연대기를 상실했습니다.
이후 1932년에는 제1차 상해사변에 투입, 그리고 1936년에는 만주로 전속되어 치안유지 임무를 맡습니다. 1941년에는 관동군 25사단으로 소속이 변경되어 계속 만주에 주둔합니다만 본토결전을 위해 1945년 4월에 다시 본토로 보내집니다. 그리고 미야자키 현에서 미군의 상륙에 대비한 방어진지를 구축하다가 종전을 맞지요.
그러고 보니 태평양전쟁 때 일본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스기야마 하지메(杉山元) 원수가 1906년 8월부터 대위로 14연대에서 대대부관을 맡고 있었군요. 스기야마는 1901년에 소위로 임관할 때부터 14연대에서 복무를 시작, 1907년 12월 10일에 육군대학에 입학하면서 잠시 연대를 떠납니다만, 참모본부 근무나 해외 주재무관 등 몇 가지 보직을 돌면서도 가끔씩 "고향 부대"로 돌아와 14연대 대대장 및 12사단장으로 복무했습니다.


1907년의 한국 출동 당시 연대장은 기쿠치 토노모(菊地主殿, 독음 맞나요?) 대좌(대령)로, 이해 2월 27일부터 1909년 11월 30일까지, 즉 출동 기간 내내 보직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위 기사에 인용한 일지의 일부 내용을 보면 재미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진압기록에 나타난 전투
"오후 1시 (문경) 대승사 동쪽 1천m에 있는 1030고지에 이르러 의병 한 무리가 적성으로 침입하는 것을 목격하고 적성 서쪽으로 나와 해당 시장 부근에서 식사를 하던 약 100명의 의병을 공격하니 적은 흩어졌고 이에 따라 동쪽 산기슭 등지에 있는 적에 대한 총검 돌격을 해 해당 지역을 점령함. 적은 골짜기를 경유해 681고지로부터 도곡 방향으로, 일부는 석곡 방향으로 어지러이 후퇴해 우리 병사들이 그들을 석곡으로 추격함. 이 전투에서 적의 사망자 중 발견된 이는 15명이고 부상자는 불명확하고 노획품은 화승총 4정, 깃발 1개, 탄환 약간임. 우리 측의 손해는 소비 탄약 382발. 적의 수괴는 이강년인데, 사망자 중에는 그를 찾지 못했고 적성은 전부 의병이 점령하고 있음"

이와 같이 1907년 9월15일 문경 부근의 전투보고에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은 의병장 이강년(李康秊.1858-1908)의 이름이 보인다.


위 기사의 9월 15일은 양력으로, 당시까지 한국(특히 민간)에서 많이 사용된 음력으로 바꾸면 8월 8일입니다. 그리고 저날 문경 적성에서 전투가 있었다는 기록은 우리측에도 있습니다. 바로 기사에서 언급한 운강 이강년의 의병투쟁기를 다룬 <운강선생창의일록(雲崗先生倡義日錄)>이죠. 이 책은 을미의병 시기부터 남긴 이강년 본인의 기록에 편자인 박정수, 강순희의 종군이를 붙여 간행한 것입니다만, 여기에 등장하는 9월 15일자(음력) 적성 전투에서의 쌍방 손실은 의병 부상자 수명, 일본군 전사자 36명입니다. 기사에 소개된 그나 전투에 대한 14연대 전투일지의 의병 사망자 15명 확인에 부상자 미상, 일본군 사상자 전무에 비하면 정말 엄청난 수치 차이인데, 그래도 후군장 "신태원"이 패했다고 적고 있기는 합니다.

이런 문제는 사실 허다합니다. 예전에 포스팅한 남대문 전투 이야기에서도 그랬지만, 많아야 전사/부상을 합쳐 42명 정도의 손실을 낸 일본군 피해에 대해 당시의 일부 한국측 기록은 일본군 300명 사살 운운하고 있었단 말이죠-_-

이런 점들을 감안하자면, 의병장들의 개인 기록을 바탕으로 한 양측의 전과 비교와 의병의 일본군 사살 수치는 전적으로 재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위 기사의 예를 볼 때, 의병 15명 사살이라는 일본군의 전과보고에는 과장이 들어갈 소지가 있어요. 고의건 오인에서건 전장 주변의 민간인이나 마을의 양민을 사살하고 그 시체를 계산했을 가능성이 제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을 주민을 의병 동조자로 간주하여 사살하고 그 숫자를 포함시켰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의병의 전과, 즉 사살한 일본군의 수는 운강선생창의일록의 수치가 과장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14연대 일지의 내용은 "사상한 장병의 성명, 계급은 물론이고 부상한 부위까지 정확하게" 적고 있을 정도로 자세하다는 것이 위 기사의 핵심인데 적성 전투에서 사상자가 있었다면 손해가 소비한 탄약 382발밖에 없을 리가 있습니까? 그리고 일본군이 36명이나 전사했다는 손해를 입었다 하면 의병이 엄청난 공을 세운 일인데 한국인인 기자가, 혹은 해당일자 기록의 발췌문을 보도자료로 제공한 토지공사 박물관 관계자가 그 부분을 빼놓고 기사를 작성할 리가...있을까요.....?

결론 : 기자나 관계자나 한국측에 "그날 그 전투"에서 의병이 36명이나 되는 일본군을 사살했다는 기록이 있음을 모르고 있다.

일본측 기록이 사상자를 축소하고 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만약 저 문서가 대외발표용 홍보문서라면 선전 목적에서 손해를 줄여 기재한 것으로 볼 수 있고, 타 기관이 기록한 내용이라면 잘못된 정보를 입수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어요. 하지만 저 문서는 바로 "해당부대의 자체기록"으로, 구라로 쓰는 게 거의 불가능합니다. 군대에서 부대일지 써보신 분들은 모두 기억하실 테지만, 아무리 부대일지를 구라로 채우더라도 인원 결손 문제는 절대 구라질을 못 합니다. 작전행동이나 교육훈련은 안 해놓고 했다고 기록할 수 있고 보급품은 모자라는 거 충분히 있다고 적을 수 있지만(빌려오거나 돌려막기로 대처), 없는 사람은 있다고 못 해요. 그딴 짓을 했다가는 "얘 불러와"했을 때 대책이 없습니다-_-

물론 의병전쟁에 대한 한국측 기록 자체가 전적으로 믿을 수 없는 허구 투성이는 아닙니다. 의병전쟁 자체는 분명히 존재했으며 가열찬 투쟁도 행해졌어요. 하지만 그 상세한 전투양상 및 양측의 손해에 있어서는 솔직한 검증이 필요합니다. 실제 당시 일본군의 "토벌 기록"을 보면 일본군 측은 전투에서 거의 사상자를 내고 있지 않아요. 의병 전사 20명에 일본군 부상 1명 식의 기록이 한둘이 아니거든요.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은, 한국에서 기록을 남긴 당사자들이 대개 역사 기록자가 아닌 선비로서, 자신이 보고 들은 것 그리고 경험한 것들만을 바탕으로 기록을 남긴 데다가 그 기록을 남긴 목적이 단순한 기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남긴 행록, 또는 행장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글쓴이가 남긴 업적을 후대에 전하는 것에 큰 의미를 두었고, 이는 임진왜란 시기에 작성된 수많은 행장기들을 보아도 입증됩니다. 의병을 일으켜 왜적 수천을 일거에 진멸하거나 이순신이 왜적을 섬멸할 수 있도록 신묘한 계책을 내놓았다는 수많은 선비들의 기록이 남아있다고 하지요. 그런데 그게 사실일까요?^^

혹시나 의병전쟁에 대한 한국측 기록은 쓰레기 같은 기록이니 전혀 믿을 수 없다...하고 부정하는 분이 나올까 해서 노파심에 말하지만(그래도 나올 것 같군요), 수치 면에서 신뢰성이 다소 떨어진다고 해서 의병전쟁 당시 한국인들이 남긴 기록을 모두 무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분명히 투쟁 자체는 존재했고, 이 행록들은 우리 편에서 그 사건들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판단할 수 있는 소중한 기록이니까요. 전투양상이라거나 양측의 피해에 대한 수치의 정확성이라는 점에서는 분명 교차검증이 필요하지만, 당시 한국인들이 의병투쟁에 대해 가진 관념이라거나 우리측의 준비, 일본군의 잔학행위 등에 대해서는 충분히 참고할 가치가 있습니다. 일부 문제가 있는 기록이라고 해서 전적으로 부정하고 버릴 필요는 없는 거죠. 필요한 부분만 적당히 참고하면 될 일입니다.



참고자료 :

독립운동사 교양총서 vol.02 - 한말 의병전쟁, 조동걸, 독립기념관, 1989
독립운동사 교양총서 vol.13 - 한말 의병장 열전, 윤병석, 독립기념관, 1991
민족전란사 vol.1 - 의병항쟁사,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84
일본 근대의 풍경, 유모토 고이치, 그린비, 2004
일본군사사, 후지모토 아키라, 시사일본어사, 1994
조선군사령부1910/1945, 古野直也, 1997, 대왕사
현대한국사 vol.3 - 민족의 저항(1905~1910), 편집부, 신구문화사, 1969

위키피디아(일) - 歩兵第14連隊
엔싸이버 백과 - 운강선생창의일록

http://www.h2.dion.ne.jp/~sws6225/zinbutu/sugiyama.html
by 슈타인호프 | 2009/08/11 13:54 | 한국현대(~20XX) | 트랙백(1) | 덧글(16)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


메뉴릿

최근 등록된 덧글
뒷북이지만 질문드립니다..
by 지나가다 at 07/26
3000킬로미터라.... ..
by 한뫼 at 07/10
답답하네요..이런 글을..
by 무지개다리 at 07/10
아니 기사를 우라까이해..
by 아즈라엘 at 06/15
제목은 태평양전쟁 이..
by 빛의화살 at 06/14
??: "우매한 잉간들" "조..
by LVP at 04/30
조회수를 올리기 위해 ..
by 꾀죄죄한 하프물범 at 04/27
무슨 종류의 책인가요? 제..
by 슈타인호프 at 04/25
호프님 글주제에 맞지 않..
by 빛의화살 at 04/25
요즘 알았는데, 종종 ..
by 슈타인호프 at 04/25

최근 등록된 트랙백
2018년까지는 여전히 진..
by 슈타인호프의 함께 꿈꾸..
진짜 마지막 빨치산이 ..
by 슈타인호프의 함께 꿈꾸..
굿모닝 티처, 리디북..
by 슈타인호프의 함께 꿈꾸..

이전블로그
2020년 07월
2020년 06월
2020년 04월
2020년 03월
2020년 01월
2019년 12월
2019년 11월
2019년 10월
2019년 09월
2019년 08월
2019년 07월
2019년 06월
2019년 05월
2019년 04월
2019년 03월
2019년 02월
2019년 01월
2018년 12월
2018년 11월
2018년 10월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