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으로 족한 것을 비난하지 말자. "따뜻한 말은 생명의 나무가 되고 가시 돋친 말은 마음을 상하게 한다."(잠언, 15장 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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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 한국전쟁
2019/09/21   이번에 개봉하는 장사리 영화에 대한 불만(내용 일부 추가) [12]
2017/06/01   인민군 보급 이야기 2편 [21]
2017/05/30   한 달도 되지 않아서 끊어진 보급 [23]
2015/03/07   조선일보 방씨 일가는 왜 서울이 처음 함락될 때 피난을 가지 않았는가. [18]
2015/03/05   조선일보 호외 논란과 관련하여 당시 언론 상황 몇 가지 간단히. [14]
2014/06/24   4년 전 포항전투 포스팅 내용 업데이트 하나.
이번에 개봉하는 장사리 영화에 대한 불만(내용 일부 추가)
25일에 장사상륙작전을 소재로 한 영화가 개봉합니다. 김명민도 나오고 메간 폭스도 나온다고 홍보가 아주 난리가 났죠.

그런데 저는 그 홍보가, 그리고 영화를 계기로 쏟아져나오는 여러 매체 기사들이 마음에 안 듭니다. 왜냐고요? 구라쳐서요.



장사상륙작전의 간단한 개요는 이겁니다. 낙동강 방어선을 공격하는 북한군의 후방을 차단하면서 인천상륙작전을 적으로부터 숨기기 위한 양동작전이었고, 이를 위해 인민군 군복과 소련제 소총으로 무장한 학도병 772명이 일반 화물선인 문산호를 타고 북한군 후방에 투입되었는데, 태풍 때문에 상륙이 힘들었던데다 북한군이 저지하고 나서는 바람에 처음에는 3일 동안 치고 빠지려던 게 6일간 고생하다가 겨우 돌아온 이야기에요.

이런 쉽지 않은 작전에 훈련이 부족한 학도병이 동원된 이유가 정식으로 공개된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인천상륙작전과 이에 뒤이은 대반격을 준비하고 있던 유엔군과 국군 지휘부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 보면, 나름대로 이유가 없는 건 아니에요.

첫째, 여유 병력이 없습니다. 당시 대한민국은 경상도 일부 지역밖에 남지 않았을 정도로 좁은 구역에 몰려 있었고, 당연히 병력이 모자랍니다.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도 아직 한국에 다 도착하지 않아 병력이 넉넉하지 않습니다.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내면서 인천상륙작전도 준비해야 하는데, 생환 가능성도 희박한 위험한 작전에 정규군을 투입할 여유가 없었지요.

둘째, 국제법을 위반하는 작전이었습니다. 교전권에 관한 전시 국제법인 헤이그 육전조약에서는 전시에 적군의 군복으로 위장하고 적을 공격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유엔군 또는 국군이 북한군 군복을 입고 적 후방을 공격하는 데 정치적 부담이 있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나중에 켈로부대 같은 것도 다 민간인 신분으로 작전한 겁니다. 국제법 위반에다 나중에 쉽게 버릴 수 있으니까요.

(0922. 07:56). 아침에 문득 생각나서 추가.
다만 이 시기의 한국군이 얼마나 형편없는 상태였는가를 감안하면, 북한군 군복과 북한군 총기 지급은 적으로 위장하려는 의도가 아니고 정식으로 지급할 미제 군복과 총이 "없어서"였을 공산도 높습니다. 더 급박한 낙동강 전선에 투입하는 학도병들도 군복을 못 받은 사례가 있을 정도이니, 특공작전에 투입될 병력에게 돌아갈 군복이 없었을 가능성은 높죠. 이 경우 한국군임을 식별할 수 있게 휘장 같은 것만 확실하게 달면 국제법 위반은 아닙니다. 백선엽 장군의 1사단이 북진하다가 그렇게 신품 소련제 군복을 가득 실은 화차를 노획해서 입고 있던 더러운 옷을 몽땅 갈아입고 계속 진격한 사례가 있고, 2차대전 때 독일군도 영국군 군복에 마크류만 갈아붙이고 입고 다닌 사례가 있습니다.

총기 역시 마찬가지에요. 미군이 제공하는 총은 주전선 수요 대기도 벅차 일제 총기가 아직도 숱하게 돌아다니는 판이었으니, 남는 노획품인 소련제 총을 지급했다고 하면 이해 못할 상황은 아닙니다. 게다가 미제 소총은 순전히 후방에서 보급해주는 탄약에 의존할 수밖에 없지만, 소련제 총은 탄약을 북한군에게 노획해서 쓸 수 있습니다. 3일간 작전한다고 3일치 탄약과 식량만 지급한 것도 이 작전이 비판받는 점 중 하나인데, 애초에 노획총기라 재고탄약이 충분하지 않았던데다가 상층부에서는 탄약을 노획해서 보충하면 된다고 생각했을 공산이 없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게 매스컴에서 어떤 식으로 구라가 쳐지고 있느냐 하니.....


“영화 참여했던 사람으로서도 믿어지지 않더라. 가슴 아픈 역사가 이렇게 묻힐 수 있나 이해가 안 됐다. 1997년이 돼서야 유골과 잔해가 발견됐다고 하더라”고 안타까워 했다.
"국뽕 아닌 희생이 주제" '장사리' 김명민의 사명감(종합)(뉴스1, 입력 2019.09.19. 12:08)

잊혀진 장사리 전투가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생존 학도병들이 1980년 7월 ‘장사상륙작전 유격 동지회’를 결성하면서다. 특히 1997년 3월 해병대가 장사리 갯벌에서 좌초된 문산호를 발견하면서 장사상륙작전은 비로소 역사 속에서 부활했다.
인천상륙작전에 가려진 '장사리 전투'를 아시나요(한국경제, 입력 2019.08.23. 17:35 수정 2019.08.24. 00:33 )

하지만 학도병 772명의 희생은 1997년 장사리 해변에서 유골과 당시 사용했던 배가 우연히 발견될 때까지 잊혀져 있었습니다. 장사상륙작전에 참전해 올해 89세가 되신 분을 직접 만나보았습니다.
인천상륙작전에 가려진 '학도병 772명 희생'…주인공 직접 만나다(스브스뉴스, 작성 2019.08.19. 18:08)

1997년 LST문산호 선체가 발견되며 ‘작전명 제174호’ 장사상륙작전은 세상에 드러나게 됐다.
영덕군, 장사상륙작전 및 한국전쟁 사진전시회 개최(경북일보, 2019년 05월 04일 12시 24분)

◆ 김준우> 돌아가기 위해서 조치원함이라고 하는 배를 하나 보내요. 보내는데 이게 너무 북한군의 저항이 심해가지고 결국에는 조치원함이 다시 돌아갑니다. 태우지 못하고 돌아가면서 여기 작전에 투입됐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사하고, 행방불명 되어버리는 일이 벌어지죠. 사실상 이게 있었는지도 몰랐어요. 있었는지도 몰랐는데, 1997년에 해병대에서 수색을 하다가 좌초되어 있는 문산호를 발견한 거예요. 문산호는 태풍 때문에 좌초됐었잖아요. 그걸 발견해서 이게 무슨 배냐, 조사를 해보니까 이 기록에 남아 있었던 거예요. 772 유격대의 작전명이 기록되어 있으면서 이게 실제로 있었던 작전이구나, 라는 것이 뒤늦게 재조명되면서 지금 영덕군 장사리에 가면 거기 학도병들을 기리기 위한 공동의 무덤이 조성되어 있고, 그래도 나름 이름을 찾아서 새겨놓고 잊지 말자, 라고 하면서 공원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현충일 역사특강]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끈 학도병들의 장사상륙작전(YTN, 입력 2019.06.07. 09:45 수정 2019.06.07. 12:03)

적의 시선을 끌기 위한 페이크 상륙이 되겠는데요, 그래서 누가 상륙한지 아십니까?
772명의 우리나라의 중고등학생들이 뽑혀 갑니다.
총을 쏘는 훈련도 약 보름밖에 받지 못한 10대 소년들이 차출돼서 문산호를 타고 인천상륙작전 직전에 상륙을 하게 됩니다.
하필이면 이때 태풍을 만나서 배는 좌초되고요,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10대 소년들은 육지로 헤엄쳐 갑니다.
식량과 총알은 단 3일뿐이었고요, 그들은 용감하게 폭풍우를 헤치면서 나아가게 되죠.
당시 포항과 영천 방면을 잇는 국도를 점거하고, 적의 북상을 저지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리게 됩니다. 북한군의 시선은 전부 다 여기 있는 동쪽으로 쏠리게 된 것이죠.
안타깝게도 구조선이 출발했지만, 우리 소년병들은 그곳에서 교전하다가 대부분 전사하게 됩니다.

설민석의 영화 [인천상륙작전] 해설강의(단꿈 공식 유튜브 채널, 게시일: 2016. 6. 23.)


작전 자체의 의의에 대한 평가야 뭐 각자의자유라고 하지요. 그런데 이게 뭔 헛소리래요? 기밀이어서 아무도 몰랐어? 47년이나 지나서 해병대가 수색나가서 우연히 배를 발견할 때까지? 그리고 참가한 학도병들이 거의 다 죽었다고? 이게 무슨 신박한 개소리랍니까?

네, 국제법 위반한 작전이었으니까 기밀로 했을 수도 있다고요? 아,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죠. 그런데 말입니다, 장사상륙작전에 투입된 제1유격부대, 일명 「명(明)부대」의 활약은 애초에 기밀로 취급된 적이 없어요. 물론 작전 나가기 전에야 기밀이죠. 군사작전은 당연히 그런 거니까. 그런데 끝나고 나서도 이걸 은폐하고 수장고에 처넣고 그런 거 없었단 말입니다. 여기서부터 하나씩 까보겠습니다.


9월 15일(금요일)
전황:
- 미국 해병대, UN, 해병대 이른 아침에 인천 상륙개시, 월미도 탈취, 오후 5시 반에 주력 공격 개시. 월미도 상륙은 미 제1해병사단, 상륙 주력부대는 제10군단, 강륙전 지휘는 도일(Doyle) 소장. 맥아더 원수도 진두지휘, 7개국 군함 261척 참가 – 미국 226, 영국 12, 캐나다 3, 오스트레일리아 2, 뉴질랜드 2, 프랑스 1, 한국 15. (상륙전은 지난달 콜린스 참모총장 방일 시, 도쿄에서 맥아더 원수와 협의하여 결정한 것.)
- 동서 양 해안 협공작전으로, 이른 아침에 한국군이 영덕 남방 장사에 상륙
출전: 한국전란 1년지, 대한민국 국방부 정훈국 전사편찬회, 선광인쇄주식회사, 1951. B44


(사진1, 해당 서적의 해당 페이지. B섹션은 날짜에 따른 전황을 적은 부분이다.)

이 책은 전시 중에, 국방부에서 1951년 10월 15일 자로 정식으로 간행한 공식 기록입니다. 이런 책에서 우리 병력이 “영덕 남방 장사에 상륙”했다고 버젓이 적고 있는데, 과연 이런 작전이 기밀 취급을 받았을까요?

이번에는 전쟁 중에 나온 신문기사입니다.

敵前上陸明部隊(적전상륙명부대) 勇士(용사)와家族調査(가족조사)
서울지구 병사구 사령부에서는 명부대(明部隊)에 종군하였던 우국청년들의 실장을 파악하고자 동 부대에 종군한 본인 또는 본인이 부재시에는 친척이나 우인이 서면으로 오는 25일까지 동 사령부에 신고하여주기 바란다고 한다. 그런데 명부대는 6.25 동란이 발생된 해인 83년도 10월 13일부터 동 20일까지 8일간에 걸쳐 적장 김무정 군단의 보급중계기지인 경북 영덕지구에 적전상륙을 감행하여 적에 일대 손실을 주고 혁혁한 전공을 수립한 부대라고 한다. (경향신문, 1953년 4월 15일)

*1공화국 시기에는 공식적으로 단기를 썼습니다. 단기 4283년은 1950년이며, 위에서 인용한 「한국전란 1년지」도 간행년을 ‘4284년’으로 적고 있습니다.
*작전 시행일을 10월이라고 한 것은 경향신문의 오기입니다.


장사상륙작전이 작전 실시 이후로도 계속 기밀 취급되었다면, 군 당국이 이렇게 공개적으로 참전자를 수소문할 수 있을까요? 심지어 이 한 번으로 매스컴에서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前 陸軍 獨立 第一遊擊大隊(전 육군 독립 제일유격대대) 明部隊(명부대) 戰歿將兵(전몰장병) 및 汶山號 犧牲英靈 慰靈祭(문산호 희생영령 위령제) = 十四日 下午 二時 曹溪寺(14일 하오 2시 조계사)에서 (경향신문, 1961년 9월 13일)

기사에서 보듯이, 어디 숨어서 하는 것도 아니고 서울 한복판에 있는 조계사에서 위령제를 열었습니다. 지금 확인된 횟수는 단 한 번이지만, 기밀로 간주되어 공개가 금지된 작전이라면 참전자를 추모하는 위령제를 조계사 같은 곳에서, 신문에 공고까지 내 가면서 치를 수 있을까요?

여기까지만 나오면 혹시 이렇게 생각하는 분이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전쟁 중, 전쟁 직후에 잠깐 드러냈다가 군사정권 시기에 다시 묻어버린 것은 아니냐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3공화국 시기에 국방부가 간행한 6.25 공간사인 「한국전쟁사」(1970) 3권에서는 문산호의 사진과 작전 요도까지 포함해서 무려 3페이지에 걸쳐 장사상륙작전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진2: 작전 요도가 기재된 해당 서적 650p. 전체 묘사는 648~650p입니다.)


이게 끝이 아닙니다. 중앙일보가 1982년에 출간한 「민족의 증언」이라는 한국전쟁 관계자 증언집 2권에서는 9페이지에 걸쳐서 당시 대장이었던 이명흠(74년에 이종훈으로 개명) 대위를 비롯한 관계자 5명의 회고를 실었습니다.

(사진3: 해당 서적에 실린 부대장 이명흠 대위의 회고 일부)


그보다 더 뒤에 나온 책인 「한국전쟁시 학도의용군」(육군본부, 1994)에서는 26페이지에 걸쳐서 장사상륙작전에 관한 여러 사실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더불어서 이 부대에 참여한 학도병 677명의 명단과 군번까지 실었습니다.

(사진4: 해당 서적에 실린 명부대 편제. 전원 학도병이 아니고, 정규 장교진이 간부로 섞여 있음을 알 수 있지요.)

(사진5: 해당 서적에 실린 명부대 명단 및 군번 일람의 일부)



국방부에서, 언론에서 이렇게 몇 차례씩이나 펴냈는데 이 작전이 과연 “1997년에 문산호의 잔해가 우연히 발견될 때까지 아무도 몰랐던” 비밀스러운 작전이 될 수 있을까요?

심지어 이 작전은 80년대 어린이들의 반공교육을 위해 간행한 만화책에서도 태연히 묘사될 정도였습니다. 「반공윤리학습극화 한국전쟁」(전 15권, 최수길 프로덕션, 계림출판사, 1981)의 8권 ‘인천상륙작전’ 편과 9권 ‘북진, 북진!’에서 나와요. 다만 만화책에 묘사된 장면들은 극화되어 있어서 실제 역사적 사실과는 무관한 창작 파트도 있습니다.

(사진6: 8권 ‘인천상륙작전’ 편, 109~110페이지. 문산호의 좌초와 그에 따른 혼란 묘사. 이 권은 제가 갖고 있지 못해서 부득이하게 원본이 아니라 복사본입니다.)

(사진7: 9권 ‘북진, 북진!’ 편, 59페이지, 명부대의 최종 후일담 기술. 단 81년 시점이라 그 뒤로 확인된 부분들은 반영이 안 되어 있습니다.)

애들이 보라고 만든 만화책에까지 실린 작전을, 50년 가까이 기밀로 유지되어 아무도 몰랐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 아닐까요?
여기서 언급한 책이 전부가 아닙니다. 제가 안 가지고 있는 수기도 있고, 그 외 기타 출판물 중에 장사상륙작전에 관해 기술한 기록물은 얼마든지 더 있을 수 있습니다.

(사진8: 참고서적들)

아, 까먹을 뻔 했네요. 학도병 거의 전멸했다 그랬죠? 설민석이랑 현충일 특강 한 고등학교 선생? 그 선생의 소스가 설민석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전혀 안 맞습니다. 정규 군인 및 민간인 선원 포함 특공대원 772명 중에서 전사자 및 실종자 129명, 이중에서 구출선이 먼저 떠나는 바람에 낙오해서 포로로 잡힌 인원이 39명(여기서 몇 명은 도망쳐서 돌아옵니다)입니다. 고로 탈출한 인원은 부상자 포함 640여 명(1970년판 한국전쟁사는 677명). 생환자가 훠어어얼씬 많습니다. 뭐? "대부분 전사"? 미친...


여기서 마무리로 기막힌 거 하나 더 터트려 볼까요? 문산호, "1997년에 유해와 함께 발견된" 거 아닙니다.-_-

【 대구=최원규기자 】영덕군과 영덕 장사 상륙작전 유격 동지회는 5일 당시 경북 영덕군 남정면 장사 앞바다에서 상륙작전을 벌이다 군함 문산호가 좌초되면서 실종된 70여명의 국군 유격대원 유해인양작업에 착수했다. 이들이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지 47년만이다.
국가보훈처로부터 유해 인양 발굴비 7백10만원을 지원받아 이날 오전 시작된 발굴작업에서 해병1사단 수색대원 12명은 장사 앞바다 50여m 연안 개펄속에서 당시 침몰된 선체를 확인한데 이어 무릎뼈로 보이는 유골 1점을 발견했다.

[한국전 유해] 영덕앞바다서 좌초 문산함…47년만에 인양(조선일보, 입력:1997.03.06 14:47)

이 기사에서 명백히 적고 있듯, 1997년에 이루어진 유해 인양은 영덕군과 생존한 상륙작전 참전자들이 ‘보훈처에 요청한 비용 지원’이 드디어 통과되면서 성사된 겁니다. 앞에서 인용한 여러 기사에서 ‘해병대가 수색을 하다가 우연히 발견’되었다는 주장은 인양에 참여한 인력이 해병대 수색대였다는 사실이 와전되면서 나온 "가짜뉴스"였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작전에 참여했던 생존자가 수백 명이나 있었죠? 학도병들이라 나이도 어렸죠? 지금도 생존자(89세)가 있을 정도죠? 배가 난파한 장소가 어디 망망대해나 외딴섬도 아니고 사람 사는 동네(장사동) 바로 앞이죠? 실제로 작전 때도 특공대가 매장하지 못하고 떠난 시체를 장사동 동네 주민들이 모아다 묻어줬을 정도였어요. 그럼 답 나오지 않습니까? 배가 가라앉은 위치가 잊혀지는 게 도리어 이상한 거 아니에요?

그러면 답 간단하게 나오는겁니다. 기사에도 나오죠? "국가보훈처에서 돈 나온 다음에" 발굴 들어갔다고요. 비용이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국가적으로 인정을 받은 후에 발굴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애초에 해안에 있는 유해는 대부분 동네 주민들이 수습해서 묻어줬고, 배에서 죽고 다친 인원들은 구조선에 싣고 갔기 때문에 문산호 자체에는 발굴할 유해 자체도 거의 없었습니다. 기사에 나오잖아요. 무릎뼈 하나 건졌다고요.



분명히 이 작전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아는 사람보다 훨씬 많은 건 사실이죠.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지요. 과연 한국전쟁 때 있었던 그 많은 전투 중에,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보다 더 많은 전투가 있기는 할까요?

아마도 가장 인지도가 높은 전투일 인천상륙작전도 맥아더가 지휘해서 인천을 공격했다는 가장 기본적인 사항 말고는 모르는 사람이 태반입니다. 한강 방어전이나 낙동강 방어전도 대략 이름만 알 뿐, 상세한 전황에 대해 아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장사상륙작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애초에 기밀도 아니었고, 생존자들이 공개적인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명흠 대위 회고에서도 매년 육군 교회에 모여서 추모예배를 드린다고 대놓고 적었어요(다른 생존자들은 위급한 상황에서 이 대위가 지휘는 안 하고 기도만 드렸다고 깠음). 그런 사건을 가지고 마치 수십 년 동안 아무도 모르게 묻혀 있던 일처럼 보도하는 건 보도하는 기자가, 그리고 영화 관계자가 제대로 조사를 안 했고 할생각도 없다고 대놓고 인증하는 것뿐입니다. 아, 영화사 측에서야 그것도 다 마캐팅이겠지만 말이죠. 아무도 모르던 걸 우리가 발굴했다~해야 장사가 되니까. 어느 쪽이건 기가 찰 뿐입니다.
by 슈타인호프 | 2019/09/21 12:31 | 뉴스비판 | 트랙백 | 덧글(12)
인민군 보급 이야기 2편
한 달도 되지 않아서 끊어진 보급에 이어서.

이어서 쓰는 글이라 구질구질한 설명은 생략. 일단 해당 12사단의 7월 15일자 전투지령에서는 이런 문제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 통신기재가 고장나도 수리를 하지 않는다.
- 상급부대에 전투상황을 보고하지 않는다.
- 화력 엄호도 없이 보병만 들이밀다가 큰 피해를 입었다.
- 군관들이 난폭하게 몰고 다니는 바람에 사이드카가 모조리 고장나버렸다.

가솔린이나 탄약 같은 물자가 제때 분배되지 않고 있다가 역 구내에서 폭격을 맞는 문제는 김일성도 지시문을 내려보낼 정도로 심각했습니다. 헌데 이게 8월이 되면 다른 물자로까지 번지게 됩니다. 바로 식량이죠.


8월 24일, 어떤 연대 정치장교가 사단 정치부사단장에게 보낸 보고서 요약입니다. 사단번호는 미상.

- 식량이 다 떨어져 이제 1일 1식밖에 주지 못하고 있음.
- 민간에서 간신히 보리 약간을 징발했으나 정미를 할 수단이 없어 주민을 동원해 절구로 찧고 있음. 정미량은 소요량의 1/10 정도.
- 비상식량이 10리 후방에 있는데 오지 않고 있음. 아마 기름이 없는 것으로 보임.
- 사단에서 식량을 마련해주지 못한다면 당장 내일부터 굶게 됨.

뭐 대략 이 상황이었죠. 네임드 사단이라고 할 수 있는 2사단도 휘발유 5톤만 어떻게 좀 변통해달라고 상급부대에 구걸을 할 정도였고요.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도망병이 급증합니다. 인민군 감찰국이 만든 군기 위반 체포자 명부가 있는데, 5월 25일부터 10월 10일까지 약 6백 명이 체포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태반이 도망병입니다. 잡힌 사람 숫자만 이만큼....그럼 도대체 전체 탈영병 규모는 얼마일까요?

개중에는 두 번 도망쳐서 두 번 다 잡힌 운 없는 병사도 있었습니다. 첫 탈주는 김일성이 탈주자를 즉시 처단하라고 지시한 뒤였는데도 용서받았지만 두 번째는 처형되었더군요.


일단 이 책에 있는 보급 관련 이야기는 이 정도. 내일은 다른 책에 나오는 이야기를 하나 쓰고 인민군 보급 이야기는 쫑내겠습니다.



출처 : 한국전쟁 - 김일성과 스탈린의 음모, 하기와라 료, ㈜한국논단, 1995
by 슈타인호프 | 2017/06/01 07:35 | 한국현대(~20XX) | 트랙백 | 덧글(21)
한 달도 되지 않아서 끊어진 보급

한국전쟁 초기 북한군의 진격에 대해서 낙동강까지는 승승장구하면서 내려갔다고 알고 있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 실상을 보면 이미 7월 중순부터 전선에서는 부대에 따라 물자가 부족해지기 시작해요.

7월 15일, 인민군 12사단장 최춘국 소장은 보급이 안 되니 탄약을 아끼라는 지시를 내립니다. 예하 연대 중 일부가 "탄약이 없어서" 백병전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로 몰렸거든요.

사흘 후에는 사단 참모부에서 무기 수색대를 조직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남한에서 소집한)보충병에게 줄 무기가 없으니 전사자의 총과 탄약, 그간 분실한 무기를 뒤져서 모으라는 거였죠.

하루 더 지난 19일에는 사단장으로부터 주간에는 트럭 운행을 금지한다는 명령이 내립니다. 공습 때문에 줄줄이 박살이 나는데 보충 가능성이 0%였거든요.

이렇게까지 탄약이 부족했던 결정적인 원인은 수송 중의 난맥이었습니다. 분명히 후방에서 12사단에 탄약을 보내긴 했어요. 이것만 제때 도착했어도 탄약이 없어 백병전을 치르는 처지까진 가지 않았을 겁니다. 문제는 이 탄약이 빨리 목적지로 가지 못하고 화차에 실린 채 허송세월하다가 7월 7일에 폭격을 맞아 역 구내에서 모조리 날아가 버렸습니다(....)

물자를 제때 정리해서 목적지로 보내는 것도 다 경험인데 이게 안 되다 보니 보급이 끊긴 거죠. 그저 안습일 뿐.


출처 : 한국전쟁 - 김일성과 스탈린의 음모, 하기와라 료, ㈜한국논단, 1995
by 슈타인호프 | 2017/05/30 05:21 | 한국현대(~20XX) | 트랙백(1) | 덧글(23)
조선일보 방씨 일가는 왜 서울이 처음 함락될 때 피난을 가지 않았는가.
조선일보 호외 논란과 관련하여 당시 언론 상황 몇 가지 간단히.에 이어서.


이번 소동으로 모르던 분들도 다 아시게 되셨겠지만 조선일보 사주 방일영 이하 방씨 일가는 서울이 처음 인민군에게 함락될 때 피난을 가지 않고 있다가 방응모가 인민군에게 납북되었습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 피난에 필요한 돈과 영향력도 있고, 정보 입수도 빨랐을 신문사 사장이 왜 피난을 안 갔단 말이냐...라는 이야기가 이글루에서도 나왔지요.

저도 그게 궁금하여 한번 찾아보았습니다. 먼저 실마리는 미디어오늘의 원 기사가 되었지요. 미디어오늘 기사에서는 방응모가 피난을 가지 않은 이유에 대해 서술한 여러 문헌이 언급됩니다.


<신문 그 이상의 미디어, 조선일보>(조선일보 90년시사편찬실, 2010)에는 “6월 26일 조선일보 안에 지하조직으로 있던 좌익세력들이 실체를 드러내면서 회사 분위기도 급변했다. 신문사에 들어서는 사장 방응모에게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때도 모르고 나타나느냐’고 막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적혀있다. 조선일보 내에 북한지지 세력이 존재했다고 풀이할 수 있는 대목이다.

<태평로일가>(조선일보사, 1983)에 따르면 방일영은 방응모와 함께 6월 26일 조선일보사를 찾아갔을 당시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세상이 달라진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때까지도, 조부를 가까이 모셨던 총무부장 김석택이나, 또 신문사에 꽤 오래 근무했고 가깝다고 생각해 왔던 사람들이 이미 지하조직을 구성해 놓고 있었던 사실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만저만 상심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방일영과 조선일보>(방일영문화재단, 1999)에서 전택보씨는 “방응모씨가 피난을 가지 않은 것은 전체 상황을 잘못 판단한 원인도 있지만, 또 다른 이유는 자기가 은혜를 베푼 사람들을 지나치게 믿었기 때문이다. 방응모씨는 조선일보를 경영하면서 서중회라는 장학회를 조직하여 성적이 우수하지만 가정이 빈곤해 고생하는 학생 60여명을 도왔는데, 그들 가운데 대부분이 좌익이 되었고 월북한 사람도 여럿 있었다”고 밝혔다.

<계초 방응모>(방일영 문화재단, 1996)의 저자 이동욱은 방응모가 피난을 떠나지 않은 것을 두고 “그(방응모)는 자신이 키우다시피 한 계초장학회 학생들의 일부가 공산당에 가입하고 있었다는 점에 너무 기대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적었다. 이 같은 서술을 종합하면 조선일보 6월 28일자 호외는 조선일보 일부 기자들이 제작에 참여해 제작됐고, 평소 이들의 성향을 용인해 왔던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는 이들을 믿고 피난 대열에 합류하지 않고 남아있다 납북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중에서 마침 두 번째, 방일영 씨 화갑기념문집인 <태평로 일가>의 내용을 마침 직접 확인할 수 있었기에 더 서술된 내용이 없나 찾아보니.....


방일영 씨의 회고에 따르면, 조부인 방응모 씨가 피난을 가지 않았던 까닭은 엉뚱하게도 유재흥 장군과의 인연이 일부 이유가 되었다고 합니다. 유재흥 장군 집이 방응모 씨의 앞집에 있었는데, 유재흥 장군이 "정말 상황이 나빠지면 미리 연락을 드리겠다"고 하는 바람에 방응모 씨등 방씨 일가는 유재흥 장군의 연락이 없어서 아직은 괜찮은 줄 알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상황이 예상한 것보다 엄청나게 나빠지는 바람에 유재흥 장군은 방씨 집안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 가족한테도 연락 하나 못 넣고 군대랑 같이 한강 건너간 거였고 말이죠.
그리고 서울이 함락된 후에 남쪽은 몰라도 시외의 방일영 씨 자택(의정부였다고 합니다)으로도 빠져나가지 않은 것은 방응모 씨가 심한 신경통으로 몸이 좋지 않은 데다 공산당에게 잡혀갈 만한 "죄"가 있다는 인식 자체가 없었던 탓이라고 합니다. 자기가 도와준 좌익 학생들이나 자사의 좌익 직원들과의 인연 같은 것에 기대를 걸었다는 언급은 적어도 제가 읽어본 부분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일단 이 책은 방일영 씨 자신이 회고한 바를 바탕으로 했으니 신뢰성이 확실하다는 보장은 없습니다만, 이 부분은 말 그대로 개인사인지라 일단 다르게 볼 필요는 없지 싶습니다. 계기가 되었던 호외의 문제는 여기서도 답이 없는 것이 26일에 방응모, 방일영 두 사람이 회사에 나갔다가 몇몇 직원들에게 비난을 받았다는 위 미디어오늘 기사에 언급된 이상의 내용이 없습니다. <태평로 일가>에 따르면 크게 상심한 두 사람은 곧바로 회사를 나왔고 방일영 씨는 조부를 신당동 자택으로 모셔다 드린 뒤 자기는 곧바로 의정부 집으로 가서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고 하고 있거든요. 그리고 두 사람은 회사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호외에 대해서도 물론이고 그 이후의 조선일보 보도에 대해서도 전혀 언급이 없어요.

자, 그럼 "좌파가 장악한 신문사"에서 어떻게 북진을 외치는 신문이 27일까지 인쇄가 되었냐....고 의문을 표하시는 분들께 답을 드려야 할 텐데, 그 답은 사실 별로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건 27일 저녁까지 서울에서 총을 쥐고 있었던 건 인민군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군과 경찰이었다는 사실로 간단히 설명이 되는 문제거든요. 사무실 내에서 인민군의 남진을 환영하는 것은 좋습니다만, 정부가 요구하는 "국군이 북진한다"는 기사를 실은 신문이 나가지 않으면 당장에 누가 총을 들고 사무실로 뛰어들어와 신문을 그따위로 발행한 놈을 찾을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좌파 기자라고 해도 우파, 또는 중립적인 기자들이 국방부 지시에 따라 북진 뉴스를 열심히 내고 있는 걸 굳이 방해할 필요는 없는 거지요. 앞 포스팅에서 이야기한 서울신문의 좌익 공원들도, 자사 간부를 감금하여 도피를 막을 궁리를 하면서도 국방부가 찍으라고 하는 삐라는 10만부나 찍어서 내놓지 않았냐 말입니다.



뭔가 글 하나 쓸 때마다 집에 책이 좀 더 있었으면 싶어지는데...정말 이 욕심을 풀려면 집에 도서관을 차려야 하나 싶어지네요.--;;


by 슈타인호프 | 2015/03/07 10:49 | 한국현대(~20XX) | 트랙백 | 핑백(1) | 덧글(18)
조선일보 호외 논란과 관련하여 당시 언론 상황 몇 가지 간단히.


1. 해당 호외의 인쇄 시점은 공개된 이미지만으로는 파악하기 힘든데, 기사의 내용 상으로 볼 때는 마포와 서대문 두 형무소를 포함하여 시내의 주요 시설이 모두 북한군에게 확보된 시점 이후입니다. 제가 알기로 서대문 형무소가 넘어간 시점이 오전 10시경, 시내 중심부가 모조리 장악된 시점이 1130 경이거든요. 이 "호외"는 그 이후에 나왔다고 볼 수 있고, 이 시점에는 서울 시내에 있던 방송국 및 신문사도 모두 북한군의 통제하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2. 당시 식자층에 좌익 계열이 많았음은 굳이 부연설명을 하지 않아도 될 듯 합니다. 노동자들 중 좌익 지지 혹은 동조자 역시 많았죠. 언론계 역시 식자층인 기자 및 노동계층인 인쇄 및 식자공 중 좌익 지지자가 있었고 조선일보 내에도 당연히 있었을 것입니다.

다른 회사 소속자의 사례지만, 남부군의 작가 이태(본명 이우태)의 경우에도 합동통신(연합통신의 전신) 기자로 있다가 인민군이 서울에 들어온 후 설립된 조선중앙통신사의 기자가 되었습니다. 경향신문에서는 27일까지 일 잘하고 싹싹한 기자로 유명했던 사람이 28일이 되자마자 경향신문 자치위원장이 되어 완장을 차고 사장실을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서울신문에서도 인쇄공장에서 일하던 일부 좌익 노동자들이 간부들을 감금하려 시도했습니다.


3. 당시에는 오후에 다음날 날짜 신문을 찍었는데, 경향신문의 경우 25일 1330 경에 호외를 처음 냈고 오후 2시 경에 26일자 신문을 내놓았는데 가판으로만 3만 부를 팔았습니다. 신문팔이 소년들이 신문을 받으려고 몰려드는 바람에 보급부 직원들이 작대기로 머리를 때리면서 질서를 잡아야 할 정도였다고 하네요.

헌데 26일 오후부터 각 언론에서는 뭔가 수상한 낌새를 채기 시작합니다. 이게 뭔가 상황이 국방부 발표와 다르단 말이죠? 전선에 나간 종군기자들은 전선이 계속 밀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육본이나 정훈국에 가 봐도 난리가 말이 아니란 말입니다. 문제는 그걸 보면서도 기사는 국방부 정훈국이 쓰라는 대로 써서 찍어내야 했던 게 비극이지만 말입니다.

27일이 되니 상황이 글러먹은 것이 확실해집니다. 어떤 신문사는 공식적으로 해산 모임을 가졌고 어떤 신문은 직원들이 그냥 뿔뿔이 흩어져 조용히 사라지기도 했지만, 대체로 1만~2만원의 비상금을 회사로부터 받았다고 합니다.

서울신문에서는 공보처장 및 정훈국장 지시로 전 사원에게 정상 근무를 요구했지만 오후 5시에는 전 사원들에게 비상금으로 2만원씩을 지급하고 만약을 대비하도록 합니다. 비상대기는 야간으로도 이어져서 야간에도 전 간부와 일부 사원이 회사를 지켰고, 가장 좋은 인쇄시설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인지 27일 밤 9시에 정훈국장 이선근 대령이 찾아와 맥아더 사령부 전방지휘소 설치를 알리기 위한 삐라 10만 장을 의뢰하기도 합니다. 새벽 1시까지 공장을 돌려 다 찍었다고 하지만, 결국 뿌리지 못했다는군요.

동아일보의 경우, 위의 <맥아더 사령부 전방 설치>라는 특종을 오후 4시경에 이미 입수하고 호외를 내려는데 인쇄공장에 사람이 하나도 없어서 발만 동동 구르다가 일본에 유학갔을 때 문선공 알바를 한 적이 있던 기자가 서툴게나마 활자를 뽑고 공무국장이 직접 판을 짜서 겨우 3백부를 등사판으로 찍어 뿌렸을 정도였습니다. 대부분의 신문사는 이와 같이 가동이 거의 중단되었습니다.

이런 사정 상 당시 정상적인 신문 발행은 27일 오후에 이미 대부분 마비된 상태였습니다. 이번 논란을 촉발한 미디어오늘 기사를 보면 조선일보는 27일 오후까지 공장을 돌려 28일자 신문까지는 찍었다고 하는데, 제가 가진 <민족의 증언> 1권에서는 28일자 신문을 제작한 신문사가 하나도 없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 책은 중앙일보가 만들었으니 중앙일보와 조선일보 둘 중 하나는 사실이 아닌 말을 하고 있는 셈이군요 :p


4. 결론적으로, 해당 호외를 만들어낸 것은 미디어오늘에서 기사 말미에 제시하고 있듯이 조선일보 내에 이미 존재하고 있던 좌익 계열 기자와 공원들이며 이들이 북한군이 진주한 뒤에 작성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봅니다. 해당 미디어오늘 기사에서도 신문사에 이미 좌익 계열 직원들이 지하조직을 구축해 놓고 있었음을 26일까지도 경영진이 몰랐다는 사실을 조선일보 측의 출판물을 인용하여 명시하고 있습니다.

미디어오늘은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적어도 이 기사에서는 과도한 추론을 집어넣지 않고 사실 자체에만 집중하여 합리적인 추론을 하고 있다고 봅니다. 이 기사가 촉발한 인터넷상의 소동과 댓글의 향연에 대해서는 동조하지도 않고 좋게 보지도 않지만, 이 기사 자체의 논조나 서술에 대해서는 딱히 비난할 생각이 없습니다. 도리어 재미있는 걸 보여줬다는 생각이 드네요.

당시 사건의 더 상세한 정황에 대해서는 제가 가진 책만으로는 더 이상 파고들어 보는 게 곤란하니, 다음에 헌책방 갈 때 언론사(史) 쪽 책을 좀 찾아봐야 할 듯 합니다.

by 슈타인호프 | 2015/03/05 12:09 | 한국현대(~20XX) | 트랙백(1) | 덧글(14)
4년 전 포항전투 포스팅 내용 업데이트 하나.
포항여중 전투 - 71명의 학도병들은 어디서 왔을까.(일부 수정)

위 포스팅에서 포항 전투 참전 여부가 확실하지 않다고 언급했던 손주형 학도병(당시 17세)께서 확실한 참전자라는 기사가 오늘 나왔더군요. 지금 학도의용군전우회 회장까지 맡고 계신다고 합니다.


"죽이지 않으면 죽겠구나 … 64년 지나도 악몽 꿔"(중앙일보)


이에 트랙백으로 기사를 추가해 둡니다.

위 포스팅 작성 시에, 제가 기록을 찾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포항전투 참전 생존자가 아닐 수도 있다고 일부나마 의혹을 제기한 것에 사과드립니다.


또한 대한민국을 위해 싸워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오래오래 건강하게 장수해 주세요.


by 슈타인호프 | 2014/06/24 08:57 | 한국현대(~20XX)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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