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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타고 뛰어내렸다고?

“돌아오지 못한 전우 위해”…97세 노장, 노르망디 75주년 낙하산 강하(조선일보)

참으로 훈훈하고 감사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뉴스입니다만.....


1944년 6월 6일 0시 15분 독일 해변 상공에 뜬 800여 대의 비행기에서 1만8000여 개의 낙하산이 흩뿌려졌다.


......................뭣? 독일 "점령지" 해변을 한 단어 빠트린 거겠지?


그런데 그 밑에서 또.....


6일(현지 시각) 미 CNN에 따르면, 낙하산 부대 퇴역군인은 2인1조로 팀을 꾸려 1944년 작전 당시 탔던 전투기 모델 C-47를 타고 낙하산 강하 퍼포먼스를 펼쳤다.



.............전투기?!?!


C47은 이런 비행기입니다....과연 이게 "전투기"인지는 보시고 판단하시기를.


by 슈타인호프 | 2019/06/07 12:56 | 뉴스비판 | 트랙백 | 덧글(9)
일본의 항복 선언
"실제 항복의사는 8월 10일 경에 이미 세계 만방이 들으라고 단파로 내보냈다. 이날 오키나와의 미군도 그 소식을 듣고 환호했을 정도니까. 이 사실은 주한미군사 첫 부분에 나온다. 번역이 되어 있지 않아 보기는 좀 어렵겠지만."

일본 정부의 포츠담 선언 수락을 통한 종전 결정이 8월 10일 새벽 0400에 내려진 건 맞습니다. 스위스 및 스웨덴 외교 라인을 통해서 미국, 영국, 중국, 소련 등에 전달이 됐지요. 그와 별개로 일본 주재 소련대사가 선전포고를 전달하러 도고 시게노리 외상을 찾아왔을 때도 그 이야기를 했고, 10일 밤에는 NHK와 도메이 통신을 통한 전파 발송으로도 그 이야기가 나갔습니다. 10일 밤, 외무차관의 요청에 의한 조치였습니다.

그런데 일본이 그날 포츠담 선언 수락 결정을 하고 단파 방송을 했다는 건 한국어로 된 역사책에도 다 나오는 이야긴데...번역되지 않았다는 말을 뭐하러 굳이 강조하는지 원. 이게 그렇게 비밀스런 자료일까요?

아, 오키나와의 미군이 환호했다는 이야기 정도는 그 "번역되지 않은" 책에만 나오는 묘사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여간 이에 대한 연합국 측의 답신은 11일에 있었습니다. 정식 문서의 접수는 13일에 이루어졌지만, 12일에는 일본 정부가 이미 수락 결정을 내리고 있었죠. 문제는 이날까지도 군부를 중심으로 한 매파는 무조건 항복에 반대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군부가 10일의 선언에 동의했던 건 연합군의 최종적인 조건 제시를 보려는 의도였던 거죠.

연합군의 무조건 항복 요구를 확인한 군 수뇌부는 "국체호지"라는 최소한의 조건부 항복을 이끌어내기 위하여 더 싸워야 한다고 버텼고, 이 문제로 인한 양측의 싸움은 14일 낮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이날 열린 최후의 어전회의에서 포츠담 선언의 수락과 무조건 항복이 최종적으로 결정이 됩니다. 이날까지, 일본"군"은 항복을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자, 10일의 일본 방송에 미군 병사들이 환호했다고 합시다. 하지만 그것이 전쟁이 사실상 끝났다는 증거는 되지 않습니다. 연합군은 13일에 "일본이 협상하는 척 지연 전술을 쓰고 있다"며 비난하는 방송을 내보냈고 실제 전투도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B29 무리는 13일 밤에도 폭탄을 퍼부었고 일본군의 가미가제도 계속 출격하고 있었죠. 일본군 항공대에 출격 금지 명령이 내려진 것은 14일부터의 일입니다. 15일에도 꽤 출격이 있었지만 뭐 그야 자살적인 발악인 셈이니 중요하지 않고.

그렇다면 과연 이 결정으로 관동군을 비롯한 전 일본군의 저항 의지가 사라지게 되었을까요.


"8월 10일 이후 각 부대에 항복 명령이 전달되기 시작했고, 일부 광신도들이 명령 수령을 거부했지만 대부분의 일본 관동군 고위 지휘관들이 전쟁이 벌어졌을 때 열심히 싸우려고 했을 리가 없다. 그래서 대부분의 일본군 부대들은 그냥 후퇴하다가 항복소식을 들었다."


자 여러분, 군부의 동의를 받아 일본이 최종적으로 항복 결정을 내린 것은 14일입니다. 그 이전까지 항복은 결정되지 않았어요. 아 물론 "어차피 진 전쟁"이니까 항전을 포기하고 도망간 대가리들이 있긴 했죠. 부하고 민간인이고 다 버리고 지 가족들만 챙긴 군민 대가리들이 말입니다. 그런데 있잖습니까.

그 사실을 과연 전 일본군이 알고 있었을까요?


관동군 고위 지휘관들이 일제히 도망친 거야 거짓이 아니죠. 이미 몇 분이 올려 주셨듯 대가리들은 지들 가족만 데리고 도망쳤고 밑엣놈들도 사정을 아는 놈들은 민간인을 버리고 지들 가족만 데리고 튀었습니다. 그러면서 전선에 있는 전방부대는 그대로 두고 도망갔죠. 하지만 이 시점에서도 정식 명령 계통을 통해 대본영의 항복 지시가 내려온 게 아닙니다. 이미 말했지만 정식 항복 명령은 14일에야 내려갔고 현지에서 집행된 것은 통신이나 항복 교섭 등의 문제로 인해 대개 그보다도 며칠씩 흐른 뒤의 일이었습니다.

일본군의 중하급 지휘관들은 항복 지시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소련군이 밀려오고 상부와의 통신이 끊기자 각자 알아서 하는 수밖에 없었고, 그들의 선택지는 전사, 항복, 자살, 도주의 네 가지 뿐이었습니다. 이 중에서 전사를 선택한 자들은 소련군과 싸웠고 그 결과가 9만에 달하는 양측의 사상자입니다. 소련군은 무주공산을 달리기만 한 게 아니거든요. 그리고 그분 주장으로 "일본 측 관측에 따르면 소련에게는 이틀 분 이상의 연료가 없었다"는 것도 있었죠 아마? 정말 그랬다면 뭔 재주로 9월까지 그 거리를 달렸는지 원.

그리고 항복이 정말로 최종적으로 결정된 뒤라고 싸우지 않았던 것도 아닙니다. 제가 며칠 전 간단히 언급했던 점수도 공방전의 사례가 있겠네요. 쿠릴 열도의 최북단인 점수도(슈무슈)를 지키던 일본 수비대는 전쟁 끝났으니 집에 가자고 장비 파기하고, 본토로 도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소련군이 쳐들어오자 소련군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로 끌려가기 싫었던 이들은 항전합니다. 그 결과 이 코딱지만한 섬에서만 3천 명에 달하는 소련군 사상자가 났다고 알려져 있죠-_-; 아마 이것도 그분께서는 "명령 수령을 거부한 일부 광신도"의 범주에 넣으실지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어떤 자가 열흘 사이에 양군 12만이 증발했다고 하는데, 어디서 이런 숫자가 나왔는지 모르겠다. 전쟁이 시작되서 항복선언 나온지 하루 정도인데, 핵이라도 썼다는 얘기인가?"

라는 말에 이르러서는 웃을 수밖에 없네요 ^^




by 슈타인호프 | 2013/03/20 08:24 | 세계현대(~20XX) | 트랙백 | 덧글(8)
가미가제 - 교수님, 만우절 농담 대박이십니다.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104] 가미카제(조선일보)


주 교수님께서는 항모 프랭클린 호가 자폭공격에 파손되는 모습을 보고 오오니시가 가미가제를 창설했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때 프랭클린은 별로 "파손"이 되지도 않았습니다. 펠렐류 전투가 벌어지고 있던 10월 13일 새벽, 한 대의 일본 폭격기가 프랭클린에 격돌한 것은 사실이나 후부 비행갑판을 들이받고는 그대로 미끄러져 바닷속에 처박혔죠. 이런 일을 겪고도 프랭클린은 임무 수행에 별 지장을 받지 않았습니다.

사실 프랭클린이 대파된 것은 이때가 아니라 한참 뒤 오키나와전 때의 일입니다. 1945년 3월 19일에 작전중이던 프랭클린은 느닷없이 나타난 일본군의 깅가(은하) 또는 스이세이(혜성) 폭격기로부터 250kg(또는 500kg) 폭탄 2발을 얻어맞았습니다. 탑재하고 있던 항공기들과 탄약, 연료가 유폭하면서 함은 말 그대로 대파되고 724명의 승조원이 전사했습니다. 해당 폭격기는 이탈 중에 격추되었으나 특공기는 아니었습니다.



1944년 10월, 레이테에서 가미가제가 처음 실전투입되었습니다. 위에서 나온 주 교수님의 말씀대로라면 펠렐류에서...아니죠, 교수님께서는 펠렐류의ㅍ자도 꺼내지 않고 사이판 이야기만 하셨습니다. 하지만 뭐 펠렐류 전투를 오오니시가 직접 볼 필요는 없겠죠. 보고만 받아도 되는 거니 하여튼.

자, 교수님께서는 10월 20일에 창설된 가미가제 특공대가 "이륙 장치만 있고 착륙 장치가 없는 특수 비행기들"을 타고 나갔다고 하셨습니다. 헌데 아쉬워서 어떡하죠, 1차 작전으로 10월 25일에 항공모함 세인트 로를 격침시킨 가미가제 특공대가 몰고 나간 비행기는 보통의 제로센(아마도 52형)이었습니다. 특공대장 세끼 유키오 대위 역시 250kg 폭탄 1발을 탑재한 제로센을 몰고 항공모함에 격돌했던 것입니다.

칼럼에서 언급된 것처럼 "이륙장치만 있고 착륙장치가 없는" 그런 특수 비행기는 실전 투입 자체가 되지 않았습니다. 특공용으로 준비된 여러 항공기 중에서 그런 기종은 딱 둘, 츠루기랑 바이카(또는 우메바나) 뿐이었어요. 그 놈들은 이륙 후에 바퀴를 떼어버리도록 된 날림 항공기였으나 실전 투입은 되지 않았습니다. 츠루기는 105기 가량 생산되긴 했지만 본토결전이 실시되지 않아서, 바이카우메바나는 아예 생산 자체가 되지 않아서였죠. 가미가제 작전에 투입된 특공기는 단 하나, 모기로부터 미사일처럼 발사되는 오카 또는 사꾸라바나(이놈은 사실상 비행기가 아니라 유인 대함미사일이죠)를 제외하면 모두가 이착륙이 정상적으로 가능한 일반 항공기였습니다.

왜 특공기가 착륙이 가능하고 돌아올 필요가 있을가요? 그건 제 지난 포스팅에서 언급한 바가 있지만, 나간다고 100% 적을 발견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표적을 발견하지 못하면 돌아와야 합니다. 그래야 내일 갖다박을 수 있는 겁니다. 아무 것도 없는 바다위에 처박는다면 그건 인명과 비행기의 낭비가 될 뿐입니다. 그러자면 표적을 발견하지 못했을 때 돌아올 수 있어야 하지요. 실제로, 세인트 로를 격침시킨 세끼 대위만 해도 무려 4일간 허탕을 친 뒤에야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저기 나온 "라페이" 호는 저는 "래피"로 알고 있습니다만...USS Laffey는 래피 쪽이 맞는 표기가 아닐까 합니다. 뭐 그건 중요하지 않겠고...1945년 4월 15일에 있었던 저 전투에서, 래피는 4발의 폭탄을 맞고 6대의 특공기가 격돌했는데도 살아남았습니다. 이걸 위력이 약하다고 졸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단 두 발의 폭탄으로 대파된 프랭클린이나 한 대의 특공기에게 격침된 세인트 로 같은 반례들이 있다는 거죠. 결국 래피의 사례를 들어 "가미카제 공격의 파괴력이 생각만큼 그렇게 강하지도 않았다."고 단언하는 것은 총알 10발을 맞고 살아난 사람의 사례를 들면서 "총에 맞는 거 별 거아니다"라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실제로, 래피가 피켓 임무를 수행하던 바로 그 포스트에 배치받았던 전임 구축함 2척은 모두 일본군의 가미가제 공격으로 격침되었습니다.

오카 또는 사쿠라바나가 글라이더라는 기술도 사실과 차이가 있습니다. 오카는 무동력 활공기가 아니라 로켓 엔진을 탑재한 유인 미사일이었으며, 이는 단순한 활공폭탄이 아닙니다. 여러분 보기에도 그렇지 않습니까?

가미가제 공격의 횟수도 제가 알고 있는 바와 다릅니다. 주 교수님은 5000번의 가미가제 공격이있었다고 적으셨으나, 현재 알려진 바에 따르면 가미가제로 전사한 조종사는 일본 해군에서 2,525명, 육군에서 1,387명입니다. 또한 공격의 횟수는 2,800회(*)였습니다. 다만 저 5천회는 어쩌면 항공기를 이용한 가미가제 말고 다른 류의 자폭공격까지 잔뜩 포함한 수치인지도 모르겠네요.

* 특공작전의 횟수보다 참가한 조종사 수가 많은 건 다인승의 폭격기나 공격기가 작전에 투입되었기 때문입니다.

주 교수님이 하필 이 날짜에 저 글을 쓰신 건 아마 4월 1일이 오키나와 전투에서 미군이 오키나와에 상륙한 날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의도야 어쨌건...만우절을 맞아 웃게 해 주신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만우절이라 일부러 슬쩍 고치신 거 맞죠? 그렇죠?

by 슈타인호프 | 2011/04/02 01:34 | 뉴스비판 | 트랙백 | 덧글(28)
저비스 베이 사건

내습해 오는 아드미랄 셰어에 맞서 싸우는 저비스 베이
(사진출처 : http://www.maritimequest.com/daily_event_archive/2005/nov/05_hms_jervis_bay.jpg)



제2차 세계대전중인 1940년 11월 5일, 북대서양에서 있었던 사건.

독일의 포켓전함 아드미럴 셰어는 영국으로 가는 호송선단을 습격하기 위해 아이슬란드를 지나 북대서양으로 진출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고속 호송선단 HX-48를 만났는데, 37척의 수송선으로 이루어진 이 선단은 단 1척의 호위함에게 호위를 받고 있었고 그나마 그 호위함 "저비스 베이(HMS Jervis Bay)"호는 원래 전투함도 아니었어요. 이 배는 여객선을 개조한 보조순양함(auxiliary cruiser)이었고, 크기는 포켓전함보다 커서 14,000톤이 넘었지만 무장은 임시로 설치한 6인치 포 7문과 3인치 대공포 2문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저비스 베이의 함장 에드워드 페건(Edward Stephen Fogarty Fegen)은 아드미랄 셰어를 발견한 순간 살아남기를 포기하고 전속력으로 돌격하면서 선단에는 분산해서 도주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달려드는 저비스 베이를 무시할 수 없었던 셰어는 - 몸으로 들이받기라도 하면 이쪽도 큰일이니까 - 16,500미터에서부터 11인치 함포를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저비스 베이는 셰어가 있는 곳까지 닿지도 않는 6인치 포를 마주 쏘면서 돌격했지만, 셰어로부터 1해리 떨어진 지점까지 돌격한 끝에 마침내 침몰하고 말았죠.

셰어는 단 22분만에 저비스 베이를 격침시키는데 성공하기는 했으나 수송선단은 이미 흩어진 뒤였습니다. 게다가 마침 해가 지고 있었으므로 제대로 추적할 수도 없었어요. 셰어는 전속력으로 수송선단을 쫓았지만 37척 중 단지 6척을 공격하여 5척을 격침시킬 수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공격을 받고도 살아난 1척은 산 데메트리오라는 유조선이었는데, 이 배는 포격을 받고 화재가 발생하긴 했으나 다행히 가라앉지는 않았습니다. 놀라운 것은 배가 불타자 구명보트를 타고 탈출했던 승무원들 중 일부가 배가 가라앉지 않는 것을 보고 바다에서 정처없이 떠도느니 다시 배로 돌아갔다는 것이고, 고장난 엔진을 고쳐서 영국으로 몰고 갔다는 겁니다. 3일 동안 불타는 배 위에서 엔진을 고친 다음 1주일 걸려서 영국까지 갔다고 하네요.

저비스 베이의 생존자 65명은 마침 근처를 지나던 스웨덴 기선에게 구조를 받았고, 전사한 페건 함장은 그 용기에 대한 보상으로 빅토리아 십자장을 수여받았습니다. 한편 영국 해군은 이 사건으로 대규모 호송선단에는 꼭 호위함대로 전함을 붙이는 등 보다 엄중한 경계를 취하게 되었다고 하네요. 이 전투에서 페건 함장의 결단은 대서양 전투 전체를 통틀어 가장 영웅적인 것 중 하나로 여겨지며, 이 사건은 은하영웅전설에 등장하는 그랜드 카날 사건의 직접적인 모티브가 되었습니다. 사건의 개요나 함장의 이름이나 딱 이 사건이 모델이죠. 소설 속에서건 실제 사건에서건, 확실히 선택하기 쉽지 않은 길입니다.


참고자료 :

라이프 2차대전사 vol.10 - 대서양 戰鬪, 배리 피트, 한국일보 타임라이프, 1984

위키피디아(영) -
Edward Stephen Fogarty Fegen
HMS Jervis Bay (F40)


* 엔하위키에 작성한 저비스 베이 사건 항목의 내용을 블로그체로 손질하였습니다^^;;
by 슈타인호프 | 2010/08/21 23:55 | 세계현대(~20XX) | 트랙백 | 덧글(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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