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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명대사는 과연 누가 번역하였는가?
마가렛 미첼의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6)>의 마지막 대사는 “tomorrow is another day”입니다. 직역하면 “내일은 또 다른 날” 정도 되겠지요. 그런데 한국어판에서는 여러 형태로 의역이 되었습니다. 그중 인지도 있는 번역이 바로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인데, 이게 서울대학교 교수였던 장왕록 교수의 번역이라는 말이 인터넷에 퍼져 있습니다. 그 출처는 아마 리그베다위키가 엔하위키였던 시절 기재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항목 내의 일부 내용으로 추측됩니다.









보시다시피 2010년 12월 15일에 1.50버전에서 1.51 버전으로 바뀌면서 이 한 줄이 추가되었습니다.

“영문학자 장왕록 씨, 고 장영희 교수의 부친이다.”

그 뒤로 저 문구는 삭제되지 않고 유지되었습니다. 그동안 엔하/리그베다/나무위키가 인터넷 서브컬처에서 미친 영향력을 생각하면, 결정적인 인지도를 만든 셈이지요. 저 역시 한동안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술이 사실이었다면 굳이 제가 지금 이 포스팅을 쓰고 있지 않겠지요? 넵, 그렇습니다. 인터넷에 초월번역이라고 널리 퍼진 저 문구는 장왕록 교수의 번역이 아니었습니다!

그걸 깨달은 건 제가 20여 년 전부터 가지고 있던 동서문화사 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바로 장왕록 교수가 번역한 판이었기 때문입니다. 처음 가지고 나서는 매년 최소 2회는 읽었지만, 2010년대로 접어들면서는 거의 읽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간혹 펼쳐 들어도 거의 외울 만큼 읽었다 보니 대사 하나하나를 일일이 새겨 보지도 않았죠. 그러다 올해 초에 문득 저 대사를 한번 확인해 보고 싶어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습니다.

“내일은 또 새로운 날이니까.”(동서문화사, 1975, 장왕록 역)

..................?!?!?!?!!?

당연히 멘붕이 왔습니다. 제가 알던 “상식”이 깨졌으니까요. 그것도 제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입니다. 은영전보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더 좋아합니다. 그런데 이게…!

당장 머리를 굴렸습니다. 답은 둘이죠. 이 책이 아닌 다른 판본에서부터 그 번역을 썼거나, 장왕록 교수가 그 번역을 한 게 아니거나.
가장 가까운 데 있는 물건부터 확인했습니다. 재작년에 청계천에서 구한 국내 최초 출판본, 전 7권인 양원달 역본을 펼쳤습니다. 그런데 개뿔, 7권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전체 8권인데 마지막 권이 출간이 안 된 거였습니다. 이를 갈다가 설날에 본가에 간 김에 부모님 댁에 있는 정음사 판을 확인해 보았습니다.

“내일은 또 내일의 해가 뜨는 것이다.”(정음사, 1972년 초판-1978 중판, 정봉화 역)

네, 정음사 판에서 해가 나왔습니다! 자 이제 저 태양 운운은 다른 사람이 번역한 판본임이 분명해졌습니다. 하지만 정봉화 역본이 최초는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보다 확실한 확인을 위해서 먼저 서울대 도서관에 접속해 보니 여러 판본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소장되어 있었습니다만, 역시 제 학교가 아니니 이용이 좀 귀찮더군요. 그래서 모교 도서관을 가보기로 했습니다. 이쪽에도 대부분 판본이 있더라고요.

그리고 드디어 오늘, 수수께끼 해결을 위해서 벼른 지 두 달 만에 도서관에 와서 소장 중인 모든 판본에서 해당 대사를 확인했습니다. 그 결과는 아래와 같습니다.

을유문화사(1962, 양원달 역) - “결국, 내일이란 또 하나의 날이 아니냐?”
정음사(1971 초판-1982 중판, 정봉화 역) - “내일은 또 내일의 해가 뜨는 것이다.”
정음사(1974 중판, 정봉화 역) - “내일은 또 내일의 해가 뜨는 것이다.”
동서문화사(1975, 장왕록 역) - “내일은 또 새로운 날이니까.”
삼중당(1981, 장왕록 역) - “내일은 또 새로운 날이니까.”
금성출판사(1990, 이근삼・윤성용 공역) - “어쨌든 내일은 오늘하고는 다른 날이니까.”
범우사(1990, 송관식, 이병규 공역) - “내일은 또 새로운 날이 시작될 테니까.”
일신서적출판사(1992, 이종수 역) - “내일은 또 새로운 날이니까!”
청목(1994, 김종건 역) - “내일은 또 내일의 바람이 불겠지!”
홍신문화사(1994, 지경자) - “내일은 또 새로운 날이니까.”
삼성당(1994, 이가형 역) - “어쨌든 내일은 또 내일의 해가 떠오르는 법이니까.”


*정음사 판은 판본 표기가 좀 중구난방이었습니다. 판형이 약간 다르기는 했지만;;;

가장 궁금했던 최초 번역본인 양원달 역본이 – 7권까지 나오다가 말았던 그 판본입니다 – 다행히도 을유문화사에서 재출간되어 있었습니다. 고풍스럽지만 해는 언급되지 않았죠.

결국, 제가 확인한 판본 중에서 저 문구에 ‘해’를 가장 처음 넣은 역본은 정음사 판, 정봉화 역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20년 뒤에야 한국추리작가협회장을 지낸 이가형 교수가 역시 “내일의 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장왕록 교수가 사용한 표현인 “내일은 또 새로운 날이니까”는 거의 직역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죠. 다른 번역가들도 비슷하고 말입니다. 바람을 언급한 청목출판사 판이 유달리 독특한데, 나무위키에 따르면 일본판이 이렇게 번역한 게 있다고 하네요.

자…몇 달을 벼르던 확인작업이 명군을 휴재한 틈에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일요일 저녁에 칼에 벤 손가락은 아프지만 그래도 덕질은 안 할 수 없지 말입니다(먼산).

9년 전에 엔하위키에서 저 문구를 처음 집어넣은 수정자는 어디서 잘못된 정보를 얻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잘못된 상식이 쉽게 퍼진 이유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대부분 독자가 굳이 여러 판본을 비교해보지는 않았을 것이고, 거론된 번역자가 적당한 유명인사이다 보니까 권위의 오류가 작동한 게 아닐까 싶네요. 멋들어진 번역을 유명한 교수님이 했다고 하니 다들 믿었겠지요. 한때는 저도 그랬으니까요.

어쨌든 이번 포스팅은 끝입니다. 인터넷에 퍼진 잘못된 상식이 조금이라도 고쳐지길 바라며 이만 마치겠습니다. 모두 편안한 하루 보내시기를 빕니다 :)



(2019.3.28. 08:45)
어제는 미처 깨닫지 못했는데, 여기서 확인 못 한 자료가 2가지 있었습니다. 소설판보다 먼저 나온, 1956년에 상연한 연극 대본과 1957년에 개봉한 극장판 영화 자막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양자 모두 일본어판을 수정한 대본을 쓰지 않았을까 싶은데, 정확하게 그 마지막 대사를 어떻게 표현했을지 전혀 알 수가 없네요.

1992년에 KBS에서 방영한 더빙판은 해당 대사를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를 테니까."로 번역했습니다. 제 생각에 <태양>이라는 표현의 인지도를 결정적으로 높인 건 소설보다는 이 더빙판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2019.3.28. 10:50)
혹시나 싶어 국립중앙도서관을 검색했더니 다른 판본이 엄청나게 더 있었습니다!

정확히 누가 해, 또는 태양이라는 표현을 처음 사용했는지는 국립중앙도서관에 가서 확인해야 알 수 있을 듯합니다.

거기 가도 연극 대본이나 영화 자막은 못 구하겠지만요.






by 슈타인호프 | 2019/03/27 13:42 | 도서잡담 | 트랙백 | 덧글(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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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은이 at 2019/03/27 15:14
역시 발로 뛰어 수집한 자료가 최고오오오오오 입니다.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19/03/28 08:26
그러게 말입니다.
Commented by muhyang at 2019/03/27 20:16
나무위키나 위키피디아는 저도 가끔 손대는 때가 있습니다만 아주 뇌피셜이 굴러다니죠. 정말 약간이라도 정확하게 쓰자면 그런 잔편집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19/03/28 08:26
저도 한두 번 본게 아닙니다.
Commented by Dex at 2019/03/27 22:05
그런데, 70년대 번역본이 나왔다면 영화가 먼저 개봉되었을 수도 있지 않나요? 영화 속 대사 번역이 먼저라면?
Commented by Dex at 2019/03/27 22:07
아, 소설 최초 번역은 62년이군요.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19/03/28 08:29
아, 영화 쪽 생각을 못했네요. 영화는 1957년에 처음 개봉이 된 것으로 역시 나무위키에 나와 있습니다. 문제는 그때 사용했을 자막이 들어간 필름을 확인할 방법이 아예 없다는...-_-;;;

KBS 더빙판은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를 테니까."라고 했습니다만, 과연 극장판은.....;;;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19/03/28 08:36
연극은 56년에.....젠장, 본문이 섣불렀습니다. 수정해야겠습니다.
Commented by muhyang at 2019/03/28 10:28
일본어 위키피디아나 웹문서를 믿는다면 실제 1952년 일본 영화 자막의 번역이 '~바람이 분다'인 듯합니다.

여담이지만 1958년 닛카쓰 영화 제목이기도 한데 도대체 야쿠자 영화가 여기서 영향을 받은 게 맞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http://www.nikkatsu.com/sphone/movie/20243.html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19/03/28 10:36
제목을 비슷하게 하는 정도야 유행을 탈 수 있겠지요.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보니, 국내에서 영화가 개봉한 57년 당시 한국 신문에서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때문인지 영화 제목마다 바람 타령이다"라고 쓴 기사가 있더라고요,
Commented by 천마 at 2019/03/29 11:18
와^0^ 그 대사의 출처를 추적하시다니 대단하십니다. 사실 그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는 대사가 대중적으로 알려진건 글에서도 쓰신대로 TV더빙을 통해서일겁니다. 저도 영화대사로 들어서 기억하고 있거든요.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19/03/29 11:35
저도 그게 하도 머리에 강렬하게 박혀서 소설판에서 "내일은 또 다른 날이니까"라고 써 놓은 걸 몇 번이나 보면서도 태양으로 기억하고 있었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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