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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에 한 <포화 속으로>가 고증을 맞추는 간단한 방법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기존 설정에서 딱 한 가지만 바꾸면, 모든 설정을 역사적 상황에 맞게 만들어 넣을 수 있어요. 어떻게 하면 되냐고요? 장소만 전라도로 바꾸면 돼요." 그리고, 저런 전투가 실제로 있었습니다-_- 전쟁이 터졌을 때, 여순사건의 주무대였던 여수, 순천 일대에서는 우익 및 기독교 신자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학도병 조직이 서울 및 경상도 일대의 학도병과는 별개로 곧 조직되었습니다. 이들은 여순사건에서 좌익에 의한 학살 및 탄압을 겪었고, 반란군이 진압된 뒤에는 전국학생총연맹(학련)에 가입해서 직접 총을 들고 보복에 나서기도 했기 때문에 다시 좌익세상이 올 경우 자신들이 어떻게 될지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여순 지역에서 결성된 학도병은 당시 학교마다 설치되어 있던 학도호국단을 중심으로 해서 조직되었습니다. 7월 10일에 순천에 주둔하고 있던 육군 15연대 소속의 조남철 소령이 여수 서국민학교에서 반공궐기대회를 열었는데, 여기 참가했던 학생들 다수가 혈서를 써서 지원한 것이 시초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여수중학교생 53명을 포함 총 83명의 지원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사흘 뒤인 13일에 서국민학교에서 출정식을 거행했고, 기차를 타고 순천으로 가 70여명의 순천 일대 지원자들과 합류했습니다. 최종 합류한 인원은 183명이었다고 해요. * 아들놈이 부모에겐 한 마디 말도 없이 전쟁터에 가겠다고 나선 것을 이 출정식 자리에서 비로소 안 학부모들이 자식을 강제로 납치(...)하거나 "할아버님께 인사는 드리고 가야지?"라며 유인(...)해 가서는 그대로 유폐(...)해 버린 사례도 여럿 있었다고 하네요. 15연대 당국은 일단 형식적인 신체검사를 통해 학도병들 중 너무 어려서 총을 못 들겠다 싶은 학생만 몇 명 골라낸 후 학생들을 5개 소대(순천 출신 중심 2개 소대, 여수 출신 중심 2개 소대, 기타 1개 소대)로 나누어 편제했습니다. 각 소대는 10명 단위의 분대가 되었고, 분대장은 주로 6학년생이 맡았죠. 소대장은 각 학교의 배속장교(쉽게 이야기하면 교련 교사 - 군사교육을 받고 장교로 임관된 체육교사입니다)가 맡고 중대장만 현역 중위였습니다. 그 외에 현역병 2명씩이 각 소대에 향도로 배치되었고요. 이 학도병들의 훈련은 솔직히 하나마나였습니다. 7월 22일 새벽의 첫 출동까지 이들이 배운 것은 제식훈련과 총검술, 각개전투 정도였습니다만 출동명령을 받았을 때 이들은 겨우 대열을 맞춰 설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총은 받지도 못했고 말이죠. 이날 새벽 기차를 타고 전주를 지키러 가던 도중에야 비로소 총을 받았으나 그나마 통일되지 않아 99식과 M1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기차가 전주로 가다가 잠시 남원에 섰는데, 그제야 대원들은 총기 조작하는 법과 사격술 및 분해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실탄사격은 당연히 해보지 못했죠. 이후 이들은 전주를 향해 피난민의 행렬을 거스르며 도보로 다시 출발하지만...불행인지 다행인지 22일 밤에 이들이 접근했을 때 이미 전주는 함락된 뒤였습니다. 이제와서 전주까지 가 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절감하고 다음날 날이 밝은 후 어쩔 수 없이 그냥 철수하던 이들에게 처음으로 살인이란 게 어떤 건지 심각하게 생각할 일이 생겼는데, 두 명의 북한 포로를 처형한 사건이었습니다. 학도병들이 전주를 향해 북진하던 중 지방 좌익분자들과 접선하던 북한군 편의대원 2명을 붙잡았었는데, 이들을 남원으로 도로 돌아오는 길까지는 끌고 왔지만 더 이상 데리고 다니기가 곤란했던 겁니다. 딱히 어디 보낼 데도 없고요. 중대장 정태경 중위는 포로를 총살하려고 사수를 모집했지만 아무도 자원하지 않았으므로 어쩔 수 없이 현역병인 향도 몇 명과 분대장 3명을 시켜 포로들을 처형하라고 명령했습니다. 확실히 누구 총에 맞았는지야 알 수 없지만, 학도병들로서는 사람을 죽인다는 것과 전쟁의 무서움에 대해서 젊음의 치기에서 벗어나 생각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였다고 합니다. 이때 사격 후 자신의 총구가 까매진 것을 안 한 학도병은 "사람 죽인 총은 까매진대"라고 놀리는 친구의 이야기에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다고 하네요. 사실 이건 탄매가 끼어서 그런 것 뿐, 닦으면 없어지는 거였는데... * 개인적인 추측이지만...총살대로 투입된 학도병들의 총알이 제대로 포로를 맞혔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실탄사격 훈련 한번 제대로 안 해본 학생들이 처음 쏜 총이 사람을 맞힐 리가. 더불어 말하자면, 위 사건과 같이 편의대 활동을 한 자의 경우 군복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원래 신분이 정규군이라고 해도 제네바 협약의 보호대상이 아닙니다. 편의대는 민간인 복장을 하고 스파이 행위를 한 자로서, 전쟁법규를 위반했으므로 현장에서 총살해도 무방합니다. 23일에 다시 기차를 타고 남원을 떠난 학도병들은 도로 여수를 향했습니다. 무사히 집에 돌아갈 수 있다, 비록 완전히 집에 갈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웃들에게 총을 들고 싸우러 갔다 온 당당한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다...고 다소 안도하고 부푼 꿈에 찼을 때, 갑자기 기차가 멈췄습니다. 알고 보니 철수는 대대장 독단 명령이었는데, 이걸 안 연대장이 도로 가서 싸우라고 펄펄 뛰고 있었던 거죠. 덕분에 이들은 여수와 순천 사이, 율촌역에서 다시 북상했습니다. 그리고 기차를 타고 다시 올라가면서 이미 광주가 함락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고 해요. 이들은 그나마 구례까지는 기차를 타고 갔지만, 기관사들이 포성을 듣고 북상을 거부하는 바람에 구례역에서 내려야 했습니다. 여기서 이들이 이동한 구례국민학교까지는 약 4km였는데, 보통 걸어서 한 시간 정도기는 하지만 22일의 출동 이후 남원에서 점심으로 준 주먹밥 하나 말고는 이틀 동안 제대로 된 식사를 해본 적이 없었던 학생들에게는 무척 힘들었다고 하네요. 구례국민학교에 도착하니 마을 부인회가 미리 준비한 주먹밥이 있어 정말 오랜만에 배를 채울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식사와 달콤한 수면도 찰나뿐, 잠시 후에는 다시 하동을 향해 출발해야 했습니다. 이게 24일 20시였다고. 피난민으로 가득 찬 구례에서 하동으로 가는 길 - "화개장터" 노래에 나오는 바로 그 길이죠 - 을 행군하던 학도병들은 25일 새벽 1시에 화개장터에 도착했습니다. 지친 학생들은 전투준비를 할 틈도 없이 여기저기 픽픽 쓰러졌는데, 뒤늦게 도착한 연대장이 호통을 치면서 학도병들을 일으켜 세워 진지로 들여보냈습니다. 다행히 여기에는 미리 만들어진 진지가 있었거든요. 이곳 경찰이 여순사건 때 반란군의 공격을 대비해서 만들어 둔 것인데, 지서 건물 바로 앞에 대나무를 심어 지서를 은폐하고 지서 뒷산에는 돌멩이를 가져다가 쌓아 진지를 구축해 두었습니다. 고지 위에 은,엄폐가 가능한 참호가 있는 셈이었지요. 이 진지에는 여순사건이 진압된 후에는 공비토벌대 1개 중대가 주둔하기도 했었습니다. 일단 이 뒷산 진지로 들어간 학도병들은 지서에 식사 마련을 부탁했습니다. 한참 지나 새벽 3시가 되어서야 주먹밥이 도착했어요. 시골마을에서 200명 분의 식사를 갑자기 마련하는 게 그렇게 금방 되는 일이 아니었으니까요. 게다가 한밤중...하지만 그나마도 학생들은 거의 먹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운반수단이 없어도 그렇지, 하필이면 거름 나르던 지게에다 주먹밥을 담아서 가져왔거든요---;;; 제대로 닦지도 않고 주먹밥을 담은 탓에 밥과 거름이 뒤범벅이 되어 일부 비위가 두둑한 학생들 외에는 밥에 손도 대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밤중이고 준비가 없었다고는 해도 거름 담는 지게에 밥을 담아다 준 건 너무했죠--;;; 미군이 일본에서 도착할 때까지 인민군을 막아야 한다고 듣고 있던 학생들은 고픈 배를 안고 선잠이 들었습니다. 일부 보초 임무를 담당한 인원들만 깨서 앞을 살피고 있는데, 밥이 온 지 한 시간 정도밖에 안 된 새벽 4시에 한 학도병이 보니 길이 막히고 있는 겁니다. 어? 이상한데? 하면서 다른 학도병들이 다시 보니, 그건 풀을 꽂은 인민군 전차였습니다-_-;; 이 전차들 옆에는 보병이 따라 내려오고 있었죠. 중대장 조경태 대위는 보고를 받자 자기가 사격하기 전에는 절대 쏘지 말라고 주위의 학도병들에게 당부했습니다. 헌데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일부 학도병은 잠에 취해 졸고 있었고 일부는 주먹밥을 먹고 있었다 하니, 이건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거침없이 전진하던 북한군은 다릿목에서 잠시 멈췄습니다. 매복이나 폭탄 설치를 염려했던 모양인데, 이때가 기회하고 생각한 중대장의 발포를 신호로 학도병들도 일제히 사격을 개시했습니다. 이게 05시경이었죠. 문제는 이 공격이 전혀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가뜩이나 훈련이 부족하고 실탄 한번 쏴 보지 않은 학도병들이라 총알이 앞으로 나가기는 하는지도 모르겠고, 제대로 화선을 형성하도록 배치된 것도 아니고...게다가 상대는, 제가 위 포스팅에서도 언급한 방호산 소장의 북한군 6사단이었습니다. 네, 중공군에서 닳고 닳은 역전의 베테랑 부대요-_- 다른 포스팅에서도 다룬 적 있죠? 그 숫자도 1개 대대에 달하는 이 베테랑들이 학도병들의 사격을 받더니 곧바로 대응하는데, 화개장터에서 300m 떨어진 고지에 박격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하는데는 별로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포탄이 날아들자 포탄에 직격당한 사람, 무너진 돌담에 깔린 사람 등 희생자가 속출했습니다. 고지의 학도병들이 혼란에 빠지자 인민군 보병들이 돌격했고 중대장 정태경 중위는 08시 경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하고 퇴각명령을 내렸습니다. 살아남은 학도병들은 필사적으로 하동 방면으로 달렸고, 대열을 이루지 못하고 산산이 흩어져 후퇴하긴 했으나 100여 명은 하동에 집결할 수 있었습니다. 3시간여의 전투에서 발생한 전사상자 및 실종자가 30여 명 정도였고 나머지는 후퇴 과정에서 흩어져 버린 거죠. 나중에라도 다들 어떻게 찾아올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이후 이들은 하동, 진주 등 경남 일대에서 전투를 계속하였으나 차츰 인원이 줄면서 독립적인 전투부대로서의 활동을 할 수 없게 됩니다. 90여명밖에 남지 않은 학도병들은 부대를 해체하고 일반 군부대에 정식으로 입대하거나 하사관학교에 입교 부사관으로 임관했으며, 몇 명은 끝까지 학도병 신분을 유지하다가 51년 봄에 내려진 복교령에 따라 학교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가장 많은 수가 간 것은 두 번째 길로, 대략 50~60명이 하사관학교에 들어갔다고 하네요. 첫 번째와 두 번째를 택한 사람들은 대부분 갑종사관으로 임관하여 장교가 되었다고 하고요. 극소수 포로가 되었다가 휴전협정 체결 후 돌아온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자, 그리고 한국전쟁 초기전투 기록이 다 늘 그렇듯 이런저런 상반된 기록들이 나옵니다-_-;;; 위의 화개장터 전투 내역은 육군본부가 낸 <학도의용군(1994)>을 기반으로 합니다. 하지만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낸 구 공간사는 이 전투 양상에 대해서 두 가지 점에서 약간 다르게 서술하고 있어요. (신 공간사는 아예 다루지 않음) 1. 병력 규모. <학도의용군>은 학도병 1개 중대만 있었던 것처럼 묘사하나, 구 공간사는 화개장터에 배치된 아군 병력을 15연대 예하의 국군 2개 대대와 경찰 1개 중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병력도 1대대가 200여 명, 2대대가 150여 명이라고 하는데 이중 화개장터에 먼저 도착한 건 2대대입니다. 헌데 그 인원수에서 <학도의용군>과 차이가 있어요. 또한 연대 병력 전원이 사실상 훈련이 안 된 학도병이라고 언급함으로써, 여수-순천 이외에 타 지역의 학도병도 다수 있었음을 명기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들은 <학도의용군>에 실리지 않았을 뿐입니다. 2. 전투 양상 <학도의용군>은 새벽나절 적의 전진을 발견한 학도병들이 05시 경에 기습사격을 가한 것이 전투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구 공간사는 이를 부정하고 있으며, 10시경에 시작된 사격전이 그 시작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뒤늦게 이동해 와 다리 동쪽에 포진을 마친 1대대가 경찰에게 다리를 파괴하라고 지시했는데, 경찰관 1명이 다리를 파괴하려는 순간 북한군의 사격이 시작되었다는 것이죠. 이후 사격이 오가는 가운데 북한군 트럭 3대가 강행돌파를 시도했는데 대대 2.36인치 바주카반이 이를 저지했고, 이때 고지 위의 2대대도 강 저편의 인민군에게 사격을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교전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고지 위에 있었"다는 것을 보아도 이 2대대가 여수-순천 학도의용군임이 명확해 보입니다. 기간장병을 제외하면 사실상 전원이 학도병인 국군 2개 대대와 경찰중대는 적과의 교전을 계속했으나 이중 경찰이 먼저 후퇴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하동 방면에서 200명에 달하는 경찰 지원부대가 달려오자 경찰대는 곧 원래 진지로 돌아갔지요. 정오가 되자 인민군의 공격이 한층 거세졌고, 15연대는 탄약까지 떨어진 상태였는데다 연대의 우익에 위치하고 있던 경찰대의 우측을 우회한 포위공격도 가해졌습니다. 결국 화개장터를 방어하던 군경 연합부대는 정오를 기해 후퇴할 수밖에 없었죠. 이들은 악양을 거쳐 하동 방면으로 후퇴하는데, 이들 중 30여 명은 하동에 남아서 병력을 모집하고 있던 영남편성관구사령부 인사참모 정래혁 중령을 만나 여기에 편입됩니다. 그 이후는 하동전투로 이어지는데, 거기까지 가는 건 포스팅의 본 의도에서 벗어나니 생략. 개인적으로 이런 차이가 나타난 것은 역시 참전 학도병들의 시야가 좁았던 탓이 클 거라고 생각합니다. <학도의용군>의 해당 파트는 기록이 너무 없는 탓에 생존 학도병 단 2명의 회고를 중심으로 작성되었거든요. 이들 학도병들로서는 자기가 속한 부대 편제가 지금 중대인지 대대인지도 몰랐을 것이 뻔하고, 다른 부대가 있었는지 제대로 살피지도 못했을 것도 분명해 보이니까요. 하지만 전투가 새벽에 시작되어 아침에 끝났다는 주장과 오전중에 시작되어 정오경에 끝났다는 주장은 차이가 참 큰데, 이것도 결국은 정식으로 편찬된 공식 전사 쪽에 비중을 둘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신 공간사가 이 전투를 다뤄줬다면 좋을텐데 여기서는 25일 12시에 화개장터가 점령되었다는 이야기 이상은 묘사하지를 않네요. 일단 구 공간사와 점령시각이 일치하니 그걸로도 어느 정도는 됐습니다만. 자, 어쨌거나 사건의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건 훈련되지 않은 학도병들이 빈약한 무장을 한 채 중무장한 북한군 정예병력과 맞서 싸웠고, 단 몇 시간일지언정 북한군의 전진을 막는 데 공헌했다는 거죠. 전혀 훈련받지 못한 학도병, 전차를 동반하고 팔로군 출신 대장의 지휘를 받는 정예 북한군, 지원해 주지 않는 국군...어떤가요? 진짜 포항여중 전투보다 이 화개장터 전투가 영화 포화 속으로의 시놉시스랑 더 비슷하지 않습니까(쓴웃음)? 다만 여기서는 학도병들이 전멸하지 않았고, 11시간이 아닌 3시간만에 철수했을 뿐입니다. 포항에서 11시간을 버틴 건 그중 9시간 정도는 다른 국군이 같이 버텨줬기 때문이지 11시간 동안 학도병들끼리만 버틴 것도 아니었고, 그쪽 분들은 이 포스팅의 주인공인 여수-순천 지구 학도병에 비하면 훨씬 질 높은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나마 이쪽은 한쪽에서만 공격받았으니 그 점에서는 사방을 포위당한 포항보다는 형편이 나았던 셈이지만요. 하여간 어느 쪽이건, 포항에서건 화개장터에서건 목숨을 걸고 자신의 삶을 희생해 싸운 이런 선배분들 덕분에 지금의 우리가 삶을 누리며 살아있는 셈입니다. 잊지 않고 늘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참고자료 : 6.25전쟁사 vol.04 - 금강/소백산맥선 지연작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8 한국전쟁사 vol.2 - 북한 괴뢰군의 남침(1950.6.25~1950.7.31),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1968 한국전쟁시 학도의용군, 군사연구실, 육군본부,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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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가 없네요... 어떻..by SAGA at 03/01 헐... 대단한 퀄리티.. by SAGA at 03/01 앗 경인왜란 읽는중인데.. by 페퍼 at 02/24 퀄리티 굿... by KittyHawk at 02/23 저거 진짜 놀랐죠 by intherain at 02/22 엄청난 작품이네요. 그.. by asianote at 02/22 와......전 처음엔 .. by 까마귀옹 at 02/22 대체 어떻게 저런 문장이.. by 까마귀옹 at 01/31 외신기사를 구글번역기.. by 도연초 at 01/31 .... 좀 거시기합니다만.. by 漁夫 at 01/31 최근 등록된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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