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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여중 전투 - 71명의 학도병들은 어디서 왔을까.(일부 수정)
이미 몇번 다룬 주제지만, 한번쯤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요. 실제 포항전투 시기에 맞춰 8월에 올리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는데, 학도의용군 자체의 창설이 그보다 훨씬 이전이니만치 지금쯤 올리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해서 써 봤습니다. 그게 바로 오늘, 6월 29일이거든요.

◆ 71명의 학도병은 포항 출신일까?
가끔 보면 종종 보이는 시각인데....포항여중 전투에 참가한 71명의 학도병들 모두가 포항 출신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가끔 계십니다. 이 사건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고 피상적으로만 알고 계시는 분들 쪽에서 종종 볼 수 있는데, 포항에서 일어난 전투니까 당연히 포항 학생들이 참가하지 않았겠느냐는 거죠. 당연한 이야기인 건 맞습니다만 적어도 이 사건에서는 정확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학도병들은 거의 포항 출신이 아니었거든요. 여기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학도의용군이 어떻게 결성되었나 하는 부분부터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학도병의 조직화
학생들을 처음 전선에 투입한 것은 한강방어전 때였습니다. 서울이 함락될 때까지, 개전 초의 3일간에도 입대를 지원하는 학생들이 있기는 했으나 군도 혼란에 빠져 이들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죠. 이 시기 학생들의 군대 지원활동은 위문품 전달 및 부상병 치료 보조(의대생)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한강교가 폭파되고 서울이 함락되면서 위기가 확연해지자 6월 29일 오후에 국방부 정훈국의 후원을 받은 <비상학도대>가 2백여 명의 인원으로 수원에서 처음 발족하였습니다. 이들은 주로 후방에서의 선전활동 및 피난민 구호, 피난 학생들의 규합 등의 임무를 맡았지만 일부 인원은 총과 실탄을 지급받고 노량진 방어선에 투입되어 실전에 참가했습니다. 물론 사상자도 났고, 노량진 방어선에 투입된 이 학도병들이 최초로 전투에 투입된 학생들입니다.

이후 전선이 계속 남하하면서 학도병들도 어쩔 수 없이 정부와 군 본부를 따라 남쪽으로 이동합니다. 7월 4일에는 대전에서 700여 명의 인원으로 <의용학도대>가 편성되었으며, 이들 역시 학도병 모집 등 선전활동에 주로 투입되었습니다. 하지만 정부와 아군의 후퇴에 따라 학도병들도 곧 대구로 이동했고, <비상학도대>와 <의용학도대> 두 개의 조직이 대구에서 만나게 됩니다. 이들은 7월 19일자로 양측의 조직을 합쳐 <대한학도의용대>로 새로이 출범하였으며, 같은 시기 부산에서도 같은 이름의 <대한학도의용대>가 조직되긴 했으나 얼마 안 가서 수도가 다시 부산으로 옮기면서 양 조직은 다시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후 이들은 하나의 깃발 아래서 행동했습니다만, 조직 내부의 이런저런 계파간 갈등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대한학도의용대는 약 8개월 정도 활동한 후, 학도병들의 학교 복귀를 명령한 복교령으로 해체되었습니다.

하여간, 육군본부의 정리에 의하면 대한학도의용대의 깃발 아래 참전한 학생의 수는 27,700여 명에 달하며 전선 후방에서의 선전활동 등에 참가한 총 대원 수는 27만명을 넘는다고 하나 이는 단지 참고용 숫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에는 개인 차원에서 참가한 학생들이 빠져 있을 뿐 아니라 집계된 숫자 자체도 확실하지 않거든요. 학도병의 완벽한 명단 따위는 한국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_-;;

그 외에 국방부가 아닌 다른 쪽의 지원을 받은 학도병 조직이 존재합니다. 역시 대구에서 7월 17일에 창설된 <전국학련구국대>가 그것으로, 이들은 내무부의 지원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창설 초기에는 후방선전보다는 자원병 모집 및 입대에 중점을 두고 활동했으나 전선이 정체된 8월 중순부터는 후방의 민심 수습과 치안 유지에 비중을 두고 활동합니다. 9월 4일에는 내무부 장관 조병옥의 협조를 받아 500여 명의 학생으로 학도 경찰대가 창설되었으며, 이들은 치안유지 외에 지리산 공비토벌 임무에 투입되어 큰 전과를 올렸다고 합니다.
이와 별도로 구국대 일부 인원은 수복지구의 대민선무활동 및 치안유지에 투입되었으며, 경인지구 계엄사령관 이준식 소장(개전 당시 육사 교장)에 의해 학도병이 해체된 후에도 기간인원은 내무부로 편입되어 활동을 계속했습니다.

국방부의 지원을 받은 학도병들은 주로 국군에, 내무부의 지원을 받은 학도병들은 주로 경찰에 협조한 셈이니 나름 투자에 대한 보답(?)은 받은 셈이겠죠. 어디든 인원이 부족할 때니 말입니다. 지금 시점에서 봐서야 인적자원에 대한 효율적인 통합관리가 이루어졌으면 더 좋았을 거라고 아쉬워할 수 있지만, 그때 상황은 "효율적인 통합관리" 따위를 허용하지 않았으니까요.


◆대구에서 안동까지
그럼 본론으로 돌아가서.

영화에서 확실히 어떻게 묘사했는지 모르겠는데, 포항으로 간 학도병들은 대구에서 처음 조직되었습니다. 의성에서 김석원 장군을 따라 포항으로 갔다는 것 때문에 의성에서 조직된 거라는 착각을 하는 사람도 가끔 있는데(저도 처음 들었을 때는 그런 줄 알았습니다), 이들이 처음 조직화된 것은 대구에서였습니다. 7월 14일에 조직된 <대한학도의용대>가 16세의 중학생(중대 연락병인 김만규 학도병)에서 24세의 대학생까지, 총 87명의 인원을 모집해서 7월 25일자로 결의서에 서명하고 수도사단의 김석원 장군 아래서 싸우겠다고 자원한 것이 시초였죠. 이들은 바로 다음날인 26일에는 육군본부에서 보내준 트럭을 타고 대구 시내를 행진했고, 27일에 육군본부에서 출전 선서식을 가진 후 기차를 타고 안동에 있는 수도사단 후방지휘소로 갑니다.

이들의 지원 대상이 하필 수도사단이었던 건 사단장 김석원 장군의 개인적 인기 때문이었습니다. 김석원 장군은 1사단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북한군과 벌인 송악산 전투로 인해 용명을 떨치고 있었거든요. 1사단이 벌인 일련의 전투는 육탄 10용사(육탄 십용사에 대한 과거 포스팅 참조) 등 많은 신화를 낳았고, 사단장 김석원 장군의 이름은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게다가 김석원 장군은 이른바 "명태 사건"으로 1949년에 예비역이 된 후 자기가 세운 성남중학교 교장으로 재직했었는데, 학도병에 지원한 87명의 학생들 중에는 바로 이 성남중학교 학생들도 있었죠. 사실 이들은 의용군을 조직하기 전 이미 김석원 장군에게 전갈을 보내 학도병을 받아주겠다는 확약을 받아둔 상태였습니다.

학생들의 방문을 받은 김석원 장군은 이들을 크게 환영하고 사단 직할대로 배속, 안동 시내 성당에 머무르게 하고 무기(단 38식, 99식, 칼빈, M1등 제각각이었다고)와 장비를 지급했습니다. 학도병들은 상호 합의로 중대장 (김용섭, 서울사대 교육과 2년), 1소대장(유명욱, 서울 배재중 6년), 1소대 향도(이우근, 서울 동성중학교 - 어머니께 보내는 편지를 남긴 장본인), 2소대장(김일호, 서울 중앙대학교), 2소대 향도(안영걸, 서울농대 수의과), 연락병(김만규, 대구 성광중 3년) 등의 직책을 맡을 사람을 선출했죠. 김용섭 중대장은 <포화 속으로>의 탑처럼 "너 실전 경험 있으니까" 중대장 하라고 위에서 지명받아 중대장이 된 게 아니었습니다. 지명? 소년원? 개나 먹으라죠. 사실 김용섭 학도병은 조직의 핵심 창립 멤버였고, 1차 39명을 모집했을 때부터 이미 임시 소대장으로 재임중인 상태였습니다. 1소대장 유명욱 학도병도 1차 모집 때 이미 선임하사 임무를 맡고 있었죠. 결국 하던 사람이 계속 한 거란 이야깁니다.

기껏 도착한 안동에서 학도병들에 대한 훈련은 사실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27일 새벽에 도착해서는 그날 오후에 총을 지급받고 집총훈련 실시, 그리고 장교 하나가 야간훈련을 지도한 게 전부였어요. 그 후에는 아무도 뭘 가르치지 않아 학생들이 자체적으로 훈련을 해야 했습니다.
이후 학도병들이 처음 실탄을 받은 건 7월 31일 저녁에서였습니다. 하지만 유엔 지상군 총사령관 역할을 수행하던 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이 내린 철수명령에 따라 국군 수도사단과 8사단이 낙동강 건너로 철수하게 되면서 학도병도 철수했죠. 김석원 장군은 이들을 배려하여 철수 명령이 확실히 떨어지기도 전에 먼저 철수시켰기 때문에 학도병들은 7월 31일 저녁에 이미 낙동강을 건넜고, 철수의 혼란에 휩쓸리지도 않았습니다. 먼저 철수한 87명의 학도병들은 안동교 남안에 배치되어 후퇴하는 수도사단 1연대를 엄호하는 임무를 받아 처음 실전에 투입되었습니다. 다행히 본격적인 교전이 아니고 강을 사이에 둔 가벼운 사격전으로 끝나 사상자는 없었어요.


◆안동에서 포항까지
낙동강을 건너 의성군안동군 길안으로 후퇴한 수도사단에서는 학도병들에게 부사관 2명을 붙여서 본격적인 훈련을 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이건 안동에서는 별다른 훈련 없이 대기만 했다는 의미로 해석하면 될 것 같아요. 이후 학도병들은 낮에는 이들 2명의 부사관으로부터 맹훈련을 받고, 야간에는 사단 지휘소 경계임무를 수행했습니다. 8월 3일에는 사단장 김석원 장군에게 사열을받고 군복도 지급받았어요. 이때까지는 다들 학생복을 입고 있었거든요.

다음날인 8월 4일부터 전열을 가다듬은 인민군 12사단의 공세가 재개됩니다.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공격으로 수도사단과 8사단이 계속 밀리자 사단장 김석원 준장은 민간인 지원병으로 구성된 4백에 달하는 사단 직할대 병사들 앞에서 적 전차에 근접공격을 감행하여 내부에 수류탄을 집어넣거나 캐터필러를 절단하여 전진을 방해할 자원자를 찾았으나 단 한 명의 장병도 나서지 않았다고 합니다. 단지 58명의 학도병만이 자살적인 이 임무에 나서겠다고 자원했지만 김석원 장군으로서도 차마 학도병에게 이런 일을 시킬 수는 없어, 전차 공격을 위한 특공대 편성은 취소되고 말았다...고 하는데, 생존자 증언으로는 자기가 그 임무를 실제 수행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최연소이자 중대 연락병, 김만규 학도병). 다만 잡으려던 전차가 대전차포에 뻗어버려서, 그냥 구경만 하고 왔다고 하지만...F--;;

이후 학도병들은 계속해서 낮에는 훈련, 밤에는 경비를 서는 일과를 이어나갔습니다. 개인 단위는 물론이고 분대/소대/중대 단위의 공격 및 방어훈련이 한여름의 폭염 속에서 이어졌고, 전투가 치열해진 8월 5일 아침에는 학도병들이 있는 숙소에 적의 박격포탄이 날아들기도 했습니다. 학도병들은 곧바로 사단 직할의 다른 민간인 부대인 호림부대와 함께 능선에 올라 방어진을 구축하고 다가오는 적과 교전함으로써 본격적인 첫 실전을 치르게 되었는데, 이 전투에서 학도병의 사상자는 경상자 2명으로 다행히 큰 피해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다음날인 6일, 학도병들의 마음을 흔들리게 한 사건이 터졌습니다. 안동 철수과정에서 나타난 대규모 혼란과 이로 인한 병력 손실의 책임을 물어 김석원 장군이 수도사단장 직에서 해임되었던 거죠. 7일 저녁에 이 사실을 알게 된 학도병들은 크게 동요했습니다. 이들이 굳이 수도사단을 찾아 입대를 청했던 것은 김석원 장군 때문이었는데 김석원 장군이 사단장을 그만둔다니, 계속 여기 머물러 있을 이유가 있는지 다시 생각해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오랜 시간 회의가 길게 이어졌죠. 결국 이 문제에 대한 학도병들의 결론은 일단 수도사단에서 계속 싸운다는 것이었습니다.

신임 수도사단장으로 부임한 백인엽 대령은 학도병들의 결심을 치하하면서 환영했습니다. 하지만 백 대령은 한 가지 조건을 달았어요. 학도병들이 사단의 명령을 받아 전투를 수행한다 하더라도, 신분상 민간인으로서 별도 조직을 유지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으니 전원 정식 군인으로 입대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대학생에게는 상사, 중학생에게는 중사 계급을 줄 테니 평양까지 함께 가자고 했죠. 그럼에도 학도병들이 순순히 응하지 않자, 백인엽 사단장은 결국 학도병들에게 현지입대하거나 군복과 무장을 반납하고 해산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요구합니다.

학도병들로서는 학생으로서, 나가지 않아도 되는 전장에 스스로 자원해서 순수한 자유의지로 참가했다는 긍지가 있었기 때문에 일개 군인으로서 전체 집단 속에 묻히는 상황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학도병이라는 명패, 학도의용군이라는 깃발은 그들이 가진 자랑스러움이었고 명예심의 상징이었거든요. 그것을 버리라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구였습니다. 결국 87명의 학도병 중 16명만이 현지입대를 선택했고, 71명은 백인엽 대령의 요구를 끝내 거부했습니다. 백인엽 대령은 즉각 이들의 군복과 무기를 회수하고 귀향 명령을 내렸죠.

하지만 김용섭 중대장 이하 71명의 학도병들은 순순히 고향으로 갈 생각이 없었습니다. 이미 고향이 공산군 치하에 들어간 학생들이 다수였을 뿐더러, 그렇지 않은 학생들도 반공투쟁을 여기서 중단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3사단장으로 전임된 김석원 장군을 좇아 포항으로 가기로 했고, 8일 정오경에 도보로 의성역에 도착했습니다. 마침 경주로 가는 미군 군용열차 하나가 역에서 짐을 싣고 있었고, 학생들은 이 작업을 도와주는 대신 열차를 얻어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경주에 도착한 뒤에는 포항으로 탄약을 싣고 가는 다른 보급열차를 찾아 편승할 수 있었어요.


◆포항여중 전투
학도병들이 포항역에 도착한 것은 8월 10일 07시였습니다. 처음에는 포항국민학교에 숙소를 마련했으나 전황이 긴박하다는 것을 알고 곧바로 후방지휘소인 포항여중(현 포항여고) 강당으로 숙소를 다시 옮겼습니다. 여기서 다시 투표를 통해 간부를 결정한 결과 중대장 및 1,2소대장 전원이 그대로 유임되었습니다. 투표는 지도부에 대한 재신임의 역할만 했다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이날 저녁에는 사단으로부터 개인마다 신품 M1소총 1정과 실탄 250발이 지급되었습니다. 다만 3사단은 이때 여분의 무기 재고가 없었기 때문에 남쪽 영일비행장에 주둔중인 미국 해병대에게 장비를 얻어다 지급했다고 하네요.

이후 벌어진 상황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곳에서 다뤄졌고 저도 전에 간략하게나마 쓴 적이 있기는 하지만 간단하게만 다시 한 번 다뤄보죠. 기왕 앞에서 다 썼으니.

8월 11일, 3사단 주력이 장사동 해안에 고립된 상황에서 북한군 12사단과 766부대가 포항 시내로 밀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일부 게릴라는 시내에서 준동하고 있었고, 사단 후방지휘소는 학도병과 군악/행정병(50명 가량)을 학교 뒷산과 학교 울타리에 배치해 두고 있었는데 04시가 되자 03시에 울타리에 배치된 학도병들의 눈앞에 20여 명의 인민군 정찰대가 나타났습니다. 학도병들은 이들을 끌어들여 일거에 전멸시키는데 성공했으나 후속하는 적 주력과의 교전은 그렇게 쉽지 않았죠. 인민군 주력은 학교 앞 논에 숨어 날이 밝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6시가 되자 다시 치열한 사격전이 벌어졌습니다. 1시간 가까이 교전이 계속된 후 인민군은 일단 후퇴합니다. 그 뒤에는 포탄이 날아오기 시작했죠. 이때서야 전방의 사단 본부와 통신이 연결되었는데, 무전은 "곧 아군이 갈 테니 사단본부를 사수하라!"는 말만 외치다가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 첫 교전에 대해서는 다소 불명확한 부분이 많습니다. 생존자들의 증언은 "자다가 4시 반쯤 총성에 놀라 일어나" 배치됐다고 하는데 <학도의용군>은 미리 배치했다고 쓰고 있고, <3사단 학도의용군>은 총성에 일어났다고는 하는데 시간이 3시입니다. 첫 교전에서 싸운 적의 규모도 <한국전쟁사>는 200여 명으로 적었는데 <학도의용군>은 두 권 모두 20여 명으로 적었습니다. 이건 0 하나가 실수로 추가 혹은 탈락한 걸수도 있습니다만...

한편 학도병들이 포항여중에서 버티는 동안 3사단 후방지휘소는 미친듯이 철수를 서두르고 있었습니다. 후방지휘소에는 상당한 양의 기밀문서는 물론 전방부대에 지급할 보급물자, 그동안 적으로부터 빼앗은 노획장비 등이 쌓여 있었거든요. 사단본부는 적에게 넘겨줄 수 있는 이런 물자들을 남쪽으로 철수시키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대부분의 군수품은 배에 실린 상태였기 때문에 그대로 철수할 수 있었고, 병기부가 관리하던 노획장비는 손에 들 수 있는 만큼은 들고 가고 나머지는 일단 파묻었다고 하네요. 한편으로는 퇴각하는 병사들을 모아 형산강 남안에 재배치하는 작업도 진행되었으며, 이것 역시 학도병들이 북한군 주력을 붙들고 있어준 덕분에 가능했습니다.

애타게 기다리는 지원병은 오지 않는 가운데 전후방을 막론하고 모든 연락은 끊기고 학도병들은 고립무원의 상태가 되었습니다. 곧 세 번째 전투가 시작되었고 이번에는 삼면이 포위된 상태로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나마 아직까지는 소수이기는 해도 국군 잔여병력이 학도병들의 좌우에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면의 적만 상대하면 되어 비교적 용이하게 막아낼 수가 있었죠. 하지만 이들은 마지막 전투를 앞두고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전멸인지 후퇴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들은 절반이 사상할 때까지 버티다가 후방 고지로 철수했다고 합니다.

뜻밖에 완강한 저항에 직면하자 북한군은 회유를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학도병 중 1명이 시험삼아 그들이 요구하는대로 총을 놓고 걸어나가 보니(아마 시간을 끌려고 했던 듯) 그냥 쏴버렸다고 하네요-_-;; 이를 신호로 4번째 교전이 시작되었습니다.

4번째 전투에서는, 학도병들은 완전히 포위되고 말았습니다. 사단 군악대와 행정병이 배치되어 있던 학교 뒷산도 어느새 비어버려 그쪽에서도 인민군이 몰려왔고, 탄약도 떨어져 가고 있었죠. 교전 중간에 무기고를 부수고 탄약을 꺼내왔지만 그래도 부족했습니다. 여기에 장갑차 2대까지 가담해서 공격해오자 도무지 항전이 불가능했습니다. 중대장 김용섭 학도병은 사단 본부와 연락해 보겠다고 무전기를 들고 뒷산으로 올라가다가 목에 총을 맞았고, 1소대장 유명욱 학도병이 지휘권을 인계받아 계속 항전했으나 결국 최후의 일탄까지 모조리 소모하고 힘이 다해 생존자 전원이 북한군에게 잡히고 말았습니다. 일부는 전투 현장에서 잡혔고 일부는 포항 시내로 후퇴하다가 시내에서 잡혔는데, 인민군이 일부러 태극기를 게양해서 국군이 시내에 들어온 것처럼 가장한 것에 속아서 잡힌 사례가 있다고 하네요.

이 전투에서 학도병들이 입은 피해는 전사 48명, 실종 4명,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한 사람 11명, 포로가 되어 돌아오지 못한 사람 2명, 초기에 부송으로 후송된 사람 6명으로 총 71명이 참전하여 단 17명만이 살아남았습니다. 48명의 전사자도 수습했을 때 이미 사망 후 보름이 지나 시체가 부패하고 신분증도 비에 젖어 알아볼 수 없었던 탓에, 확실히 신원이 확인된 것은 10명 남짓밖에 되지 않았죠.

포로가 된 13명 중 3명은 전투 직후 끌려가는 도중에 탈출에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10명은 다른 국군 포로들과 미군 포로들이 있는 임시 포로수용소까지 끌려갔어요. 거기에는 국군 100여 명과 미군 19명이 있었다고 하는데, 북한군은 국군 포로들에게 식사를 미끼로 인민군에 입대하여 "해방전사"가 되라고 강요하고 있었습니다. 포로가 되었던 학도병들 중 하나인 황재호 학도병은 이때 무려 북한군 2군단장 김무정과 직접 대면을 했다고 하네요.
하지만 학도병들은 3일간 굶으면서도 김일성대학에 보내줄테니 우리 편이 되라는 등의 설득에 응하지 않았고, 도리어 16일 밤에는 2명이 탈출하기도 했습니다. 북한군은 이번에는 밥을 먹이면서 전향을 권유했지만 그래도 듣지 않자 모두 총살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비가 내리고 미군기가 폭격하는 등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는 중에도 탈출자가 속출하자 그냥 모두를 북으로 끌고 가기 시작했는데, 포로가 된 대부분의 학도병들은 적이 보인 이런저런 틈을 타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중 2명만은 결국 돌아올 수 없었죠.

이후 포항을 탈환한 김석원 준장은 학도병들의 시신을 모아 일단 가매장하고, 표를 세워 두었습니다. 이후 1957년에 전몰학도 충혼탑이 세워져 이들을 포함한 학도병 1,394위의 영혼이 봉안되게 되지요. 하지만 실제 전사한 학도병의 수는 이보다 훨씬 많으며, 최대 7천 명으로 추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확실한 근거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해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만...


◆포항여중 전투 이후
포항이 3사단에 의해 탈환되고, 병원에서 치료를 마치고 복귀한 학도병들과 포로가 되었다 탈출한 학도병들은 다시금 김석원 장군 휘하로 모여들었습니다. 8월 20일까지 9명이 된 학도병들이 계속해 싸울 의지를 분명히 하자 김석원 장군은 이들의 용기와 우국충정을 크게 치하한 후 무기와 군복을 지급했습니다. 기운을 얻은 학도병들은 인원 보충을 위해 경주/울산/부산/, 대구/밀양으로 구역을 나눠 모병활동을 전개했는데 각각 56명, 48명을 모으는 데 성공하여 안동전투 때보다 큰 113명 규모로 병력을 확충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김용섭 중대장이 입원한 상태기도 했으므로, 이때부터는 현역 장교가 학도병들을 지휘하게 되지요. 부대 내의 간부들도 새로 선출되어, 유명욱 1소대장(개편에서는 2소대장)을 제외한 두 소대장은 모두 새로 뽑혔습니다.

김석원 준장의 명령을 받아 8월 24일부터 <학도의용군> 중대장을 맡은 남상선 소위는 병기와 군복 및 군화를 지급받은 학도병들을 거느리고 매일같이 송도 해수욕장에서 맹훈련을 시켰습니다. 이때도 학도병들은 낮에는 훈련, 밤에는 사령부 경비를 맡았고, 일선에 투입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뒤집히자 이들도 새로운 역할을 맡게 되지요. 그 이야기까지 하면 좋겠지만, 단일 포스팅이 너무 길어진 듯 하니 여기서 일단 커트^^;;


◆학도병들의 출신지는?
자, 이제야 제목에서 이야기한 "주제"의 단계에 도달했군요...^^;;

이미 앞에서 말했듯, 이 전투에서 쓰러진 학도병의 숫자는 알려져 있지만 그 인적사항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하다 못해 전체 명단이라도 있다면 거기서 살아남은 사람의 이름만 빼도 되겠지만 그것도 남아있지 않은 것 같고요. 그래서 제가 확인할 수 있었던 학도병 명단은 약 절반인 35명밖에 없습니다. 그나마 생존자들의 이름은 다 확인한 듯 하네요.


* 생존/작고한 학도병들 중 "포항여중전투 결과" 항목이 빈 칸으로 된 경우는 후송인지 포로가 된 후 탈출한 사람인지 분명하지 않기 때문임.
* (08:40) 위 표에서 교통학교 출신의 박인표 학도병은 제외해야 하는데 실수로 넣었습니다;; 박인표 학도병은 3사단 학도의용군에 입대, 활동한 사람은 분명하지만 참전 시점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포항여중 전투 당시 확실하게 이름이 거론된 사람은 아닙니다;;

*(17:30) - 이 표는 자료가 미흡하여 정확하지 않으므로 재작성하였습니다. 다음 포스팅에서 다시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이 표가 완벽하지 않다는 게 문젭니다. 일단 통일된 리스트가 없어서 여기저기서 찾아 모으다 보니 구멍이 너무 많아요.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은 그렇다 치고, 이름이 남은 사람들도 자료가 아예 없는가 하면 상호모순이 속출합니다. 그걸 감수하고 일단 가지고 있는 자료만 취합한 결과가 이것인데...여기서 문제가 되는 부분만 골라서 추가설명을 하겠습니다.


1. 이 사람은 71명 중 하나가 맞을까?

포항 6·25 학도의용군 자취를 찾아(글로벌 포항뉴스)에는 이런 증언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당시 포항여중(현 포항여고) 자리에는 육군 3사단 소속 학도의용군 71명(포항중, 동지중, 수산중)이 포항을 내 손으로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집결해 있었다. 생존자 김춘식씨는 "학도의용군으로 자진 출전하는게 사는 길이라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출전했다"고 했다. 자진 출전하지않은 학생은 헌병에 끌려 강제 징집될만큼 학생들은 전쟁이 무언지도 모르고 참전했다.

문맥상으로 보면 "김춘식"이라는 분이 3사단 학도병으로서 포항여중 전투에 참가한 포항중, 동지중, 수산중 출신의 71명 안에 있었다고 해석이 됩니다. 하지만 이미 앞에서 살피셨듯, 3사단 학도병들은 대부분 포항이 아닌 외지 출신으로 대구에서 출발, 안동과 의성 경주를 거쳐 포항에 도착한지 하루밖에 되지 않아 전투를 벌였습니다. 포항에서 신병을 모집하지도 않았고요.
물론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망자가 절반 이상이고, 감포중학교에 다니던 감포 출신 전사자가 1명(김춘식, 중대 연락병. 이쪽은 공식 기록에 나오며, 묘비명조차 "김춘식 외 47명"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있는 것을 감안하면 포항 출신자가 아예 없었을 것으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가능성이 높지는 않죠. 게다가 중요한 건 생존자인 "김춘식"의 이름이 다른 공식 기록에 나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런 경우는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영화 <포화 속으로>의 관련 기사를 보다가 발견한 이름인데요,

`포화속으로` 한국 전쟁씬의 새로운 지평열다.(아시아경제)

실감나는 사건 재현에는 철저한 사전조사도 한몫 했다. 시나리오 작업부터 제작진은 학도병 생존자 김만규, 손주형을 만나 당시 상황을 체크했다. 각각 15살, 17살이었던 그들의 증언은 60년 전 실화 재구성에 길잡이 역할을 톡톡히 했다.

포항여중 전투를 영화로 제작하기 위해 만났다고 하는 위의 손주형 씨 역시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해당 전투의 생존자여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분 역시 공식 기록에 이름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자, 그럼 이 두 분은 어떻게 된 걸까요?

제가 생각한 가능성은 둘 중 하나입니다. 첫째, 공식 기록이 잘못된 겁니다. 둘째, 이분들이 포항여중의 71명이 아닌 겁니다. 이 두 분은 포항여중 전투 이후에 또는 포항이 아닌 다른 곳에서 참전한 분들인데, 기자의 고의 또는 실수로 마치 포항여중 전투에 참가한 것처럼 묘사된 겁니다. 실제로 제가 만약 이 사건을 영화로 만든다고 하면, 포항이 아닌 다른 지역에 있었던 학도병들로부터 증언을 듣는 것도 불합리한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포항에서의 특수한 사정"이 아닌 "학도병의 일반적인 모습"은 그분들에게도 얼마든지 들을 수 있기 때문이죠. 다만 이런 점들이 기사로 소개될 때 확실하게 설명되지 않으면, 기사를 읽는 사람은 "아, 이 사람은 71명 중 하나였구나"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영화 말미에 증언 영상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 부분에서 이 의문점이 어떻게 해소가 됐는지 모르겠군요.
만의 하나 그런 식으로 타 전선에서 싸운 분을 포항에서 싸운 것처럼 만들어버렸다면 그건 증언자 분에게도 모독입니다. 그분이 젊음을 바쳐 싸웠던 바로 그 전선을 없는 걸로 만들어버린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어떻게 그걸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어쨌거나 지금 현재로서는 어느 쪽이 사실일지 저로서는 판단할 수 없습니다. 자료가 너무 부족하네요.


2. 김만규 학도병은 생존해 계신게 맞는 걸까?
저는 최초 이에 관련된 포스팅을 쓰면서, 올해 초에 출간된 육군 홍보잡지가 포항여중 전투 기사를 쓰면서 "71명의 학도병 중 생존자는 5명"이라고 쓰고 그 명단과 사진을 기사로 실은 것을 보고 중대 연락병이었던 김만규 학도병(후에 목사)을 작고하신 것으로 적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생존해 계신다는 제보가 댓글로 들어왔고, 여러 리퍼러를 따라가 본 결과 네이버 쪽에서 "중대 연락병이셨던 김만규 학도병은 우리 외할아버지고 지금 살아계신다"고 쓴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포화 속에서>에 대한 기사들 중에서도 위 기사처럼 "학도병 생존자 김만규"를 언급한 기사가 있다는 것도 확인했고요.

위의 상호모순되는 기록들을 모두 합리화하자면, 김만규 학도병은 다른 옛 동료들과 일체 연락하지 않고 지내셔서 공식 기록을 발간하는 육군조차 그분이 사망하신 줄 알고 있다는 이야기밖에 되지 않습니다-_-;;

일단 개인의 증언으로 사실성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댓글 제보만 제외하면, 시나리오 작업 중에는 살아계셨으나 올 봄 육군 홍보지가 발간되기 전에 운명하셨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이 경우 "우리 외할아버진데 살아계셔요"라는 제보는 장난으로 치부할 수밖에 없는데, 설마 이런 장난을 누가 할까 생각하면 그렇게 간주해 버리기도 곤란하고......으음, 현재의 저로서는 확인 불가능입니다-_;;;


3. 그래도 생존자가 많다;;; : 본 항목 역시 다음 포스팅에서 재작성합니다.
논란이 되는 위의 세 사람을 제외하고도, 생존자가 육군본부가 낸 공식 기록보다 많습니다-_-;;

저도 이 포스팅 때문에 명단 꼼꼼히 따져 보면서 깨달은 건데, 71명에 속하는지 여부가 불확실한 김춘식(2), 손주형 두 분을 제외하고 나머지만 따져도 생존자가 20명입니다. 3명이 남죠-_-;; * (동시수정)박인표 학도병을 빼명 남는 인원은 1명으로 줄어듭니다. 죄송합니다;;
이중 한명(안영길)은 포로가 되었다는 증언은 있지만 확실히 탈출했다는 증언이 없으므로 잡혀서 돌아오지 못한 2명 중 하나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그래도 나머지 21명은 설명이 안 되요. 결국 공식 숫자에 문제가 있는 거고, 48명의 전사자는 시체 수를 세었으니 아마 맞을 것이고 실종자 또는 포로가 된 분 6명 중 나중에라도 돌아온 사람이 21정도 있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디였던가, 본 장소가 기억나지 않는 어떤 뉴스에서는 "기록된 사람 말고도 많이 참전했다"는 증언이 있긴 했는데, "포항여중의 71명"은 인근에서 새로 인원을 구하기에는 시간 여유가 너무 없었어요. 도착한 바로 다음날 새벽에 전투를 했으니...그리고 인원 모집이 있었다면 생존자 중에 그 부분에 대한 증언을 한 사람이 하나도 없을 이유도 없지 않습니까. 솔직히 대구에서 온 71명 이외에 추가 참전자가 있었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생각해요.


4. 출신지는 제각각. 하지만...
위 표에서 보셨듯, 신원이 밝혀진 학도병의 대부분은 포항이 아닌 타 지역 출신입니다. 당시의 현실상, 도 경계를 넘어간 타 지역으로까지 중학교를 유학가지는 않으니까 대부분은 학교가 소재한 인근 지역 출신이라고 생각해야겠지요. 솔직히 이런 이야기를 하면 포항 분들이 실망하실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긴 했습니다만...전혀 실망하실 이유 없습니다. 그 전투에 참가한 학도병들이 포항 출신이 아니라고 해서 포항여중 전투의 빛이 바래는 건 아니니까요. 그런 장한 일이 포항에서 있었다는 것만 해도 충분히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꼭 자기 고장 출신자가 고향에서 한 일이라야 자랑스러울 수 있다면, 이순신 장군이 거둔 한산대첩이나 명량해전을 자랑스러워 할 권리가 그 지역에 없다는 소리가 되게요? 이순신 고향이 한산도나 진도, 목포가 아니니까? 이순신 장군이 너무 옛날 사람인가요? 그럼 같은 한국전쟁의 다부동 전투를 보죠. 다부동 전투에서 국군 1사단의 지휘관 백선엽 장군이 평양 출신이었다고 대구가 다부동 전투를 기리지 않던가요?

포항 분들은 포항여중 전투를 충분히 자랑스러워하셔도 됩니다. 설사 신원이 밝혀진 절반 말고 나머지 절반 중에도 포항 출신자가 하나도 없다고 해도 포항여중 전투는 대한민국의 젊은 학생들이 그 애국심을 충분히 빛낸 사례이고 전 국민이 존경심을 표하기에 충분한 전투입니다. 그리고 이런 전투의 무대였던 포항은 충분히 이 사건을 자랑스러워 할 자격이 있습니다. 혹시라도 제 부족한 포스팅 때문에 포항여중 전투에 대해서 실망을 느끼셨다거나 하시는 분이 없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포스팅을 이만 마칩니다. 후에 보다 많은 자료를 입수하게 되면 아직 미흡한 부분들을 채울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덧 : 안 할까 했지만 아무래도 안 할 수 없는 말들.
- 소년원 대신 학도병?
- 총도 제대로 쏴보지 않고 훈련도 전혀 안 받고 실전 투입?
- "너밖에 전투경험 없으니까" 위에서 찍어서 중대장 임명?





참고자료 :

3사단 학도의용군, 남상선, 대한민국재향군인회, 1975
민족의 증언 vol.2, 중앙일보사, 1983
한국전쟁사 vol.3 - 낙동강 방어작전기,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1970
한국전쟁시 학도의용군, 군사연구실, 육군본부, 1994


by 슈타인호프 | 2010/06/30 02:20 | 한국현대(~20XX) | 트랙백(2) | 핑백(1) | 덧글(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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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슈타인호프의 홀로 꿈꾸.. at 2010/06/30 18:09

제목 : 어제 포스팅한 포항여중전투 학도병 생존자 명단을 수..
포항여중 전투 - 71명의 학도병들은 어디서 왔을까.(일부 수정) 날짜를 맞추고픈 조급한 마음에 책이 덜 도착한 상태에서 글을 마무리하고 일단 올렸더니 역시 펑크가 나네요-_-;; 의 내용이 대부분 에 인용되어 있어서, 이를 그대로 참고하고 작성해도 별 상관 없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인용은 원문이 아니었습니다. 대체적인 스토리라인은 문제가 없는데 세부적인 면에서 생략한 부분이 상당히 되는군요. 일단 의 원문을 확인하여 새로 작......more

Tracked from 슈타인호프의 함께 꿈꾸.. at 2014/06/24 08:57

제목 : 4년 전 포스팅 내용 업데이트 하나.
포항여중 전투 - 71명의 학도병들은 어디서 왔을까.(일부 수정) 위 포스팅에서 포항 전투 참전 여부가 확실하지 않다고 언급했던 손주형 학도병(당시 17세)께서 확실한 참전자라는 기사가 오늘 나왔더군요. 지금 학도의용군전우회 회장까지 맡고 계신다고 합니다. "죽이지 않으면 죽겠구나 … 64년 지나도 악몽 꿔"(중앙일보) 이에 트랙백으로 기사를 추가해 둡니다. 위 포스팅 작성 시에, 제가 기록을 찾지 못했다는 이유만......more

Linked at 일본에 먹으러가자. : 110.. at 2011/07/01 13:05

... 진 일이긴 하지만요. 포항여중 전투는 예전에 슈타인호프님이 포스팅한 것처럼 실화 쪽이 더욱 드라마틱하고 비장합니다. -&gt; 포항여중 전투 - 71명의 학도병들은 어디서 왔을까.(일부 수정) 그 때는 이런 이야기를 너무 많이들어서 보러가지 않았었는데, 625 특집으로 TV에서 보게 되니 정말 화가 나더군요. 그러니까 ... more

Commented by 네리아리 at 2010/06/30 02:21
역시 구라 즐.... ㅠㅠㅠㅠㅠ
Commented by 초록불 at 2010/06/30 02:34
구라 즐...
Commented by maat at 2010/06/30 02:55
김석원 장군이 포항여중앞 노에 가매장한 41명의 시신은 1968년인가에
국립묘지로 이장했을껄.
대외적으로 기념실하고 에총등 제대로 했어.
날짜는 가물가물한데 알고 있겠지만 혹시
모르면 날짜하고 영상 찾아서 전해줄께.
Commented by pokjk at 2010/06/30 03:29
안동에서 포항 까지 항목에 나오는 '의성군 길안' 의 의미가 의성군 길안면 이라면 틀리신듯 하네요. 길안면은 안동군입니다. 그 동네에서 길안이라면 다른 지명이 떠오르지 않으니 잘못 아신거라고 여겨지네요.
Commented by 아브공군 at 2010/06/30 05:35
구라 즐...
Commented by 니르바나 at 2010/06/30 05:47
일어나면 안 되는 한국내란 때문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고 고통받으며 살았던 세월이 얼마인데 개념은 날아가버린 기업이나 방송인들은 뭐 하자는 생쇼인지.(--;)게시물 내용도 많습니다. 슈타인호프님께서 좀 쉬엄쉬엄 하시면 좋겠군요.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_^


에이지II에서 바이킹 선택해서 바이킹 군선으로 바다를 확 쓸어버리심이 어떠한지? 빈란드 사가 단행본 소장하시고 있다니.. 오오오! 슈타인호프님께서도 아셰라드의 매력에 빠지신 모양입니다. 바이킹을 미화하는 것도 아니라서 이 사람도 괘 좋아합니다. 그런데 바이킹 군선은 화공선에 잘 부서지나? 기억이 가물가물...^^;
Commented by 개발부장 at 2010/06/30 08:38
포항여중 전투 이전 단계까지만도 이거 엄청 장대하잖아! 하면서 봤습니다;
조국의 위기를 맞이하여 자신의 의지와 명예심으로 나가지 않아도 좋은 전장에 모여든 학도병들... 차라리 이게 더 영화에 어울리지 않았을라나요;;

물론 그 뒤도 엄청나죠. 라이언 일병 같은 느낌으로 만들어도 윗분들도 우리들도(?) 좋아할만한 작품으로 만들 수 있었을지도.
Commented by 소년 아 at 2010/06/30 08:44
처음에 포스팅 길이 보고 깜짝 놀랐는데, 의외로 술술 읽혔습니다. 학도병의 집결부터 포항여중 전투까지- 좋은 글 감사합니다(_ _)
그나저나 영화는 각색의 수준과 함께 상식의 수준도 넘었네요. 후에 더 좋은 다른 영화 또는 드라마로 만들어질 수 있길 바랍니다.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10/06/30 08:53
네리아리//즐.... ㅠㅠㅠㅠㅠ

초록불//즐!즐!즐!

maat//국립묘지 가본 지 좀 돼서 솔직히 그런 거 봤는지도 기억이 안 납니다;;; 참배 한번 가야 할까봐요;;;

pokjk//저도 좀 아리송하긴 해도 일단 책에 있는 표기를 그대로 옮겼습니다만...지금 다시 보니 <성군 길안>이라고 되어 있네요. 성군이라는 지명도 없는 건 맞으니 <학도의용군>의 저자가 길안면이 의성군에 속한 것으로 착각한 게 맞는 것 같습니다. 틀린 줄 알면서 고집할 건 없으니,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아브공군//즐~~!!!

니르바나//글쎄요. 바이킹은 좋아하지 않아서...그리고 베트남전 문제로 반론을 받으시는 건 당연한 결과입니다. 한국군의 양민학살 주장에 대해서는 예전부터 의론이 분분하니 니르바나님이 이를 주장한다 해서 새삼스러워 할 사람도 없으나, 명백한 사실로서 존재하는 의료활동, 각종 시설 건설, 농촌 일손돕기 및 지원물품 제공 등 대민지원 및 민사작전의 존재에 대해 부인하신 것은 분명한 오류였으니까요.

개발부장//그러게 말입니다. 배달의 기수 틱하다고 싫어할 사람도 있겠지만 그게 진짜 역사적 사실인걸요. 물론 증언을 보면 지원하는 줄도 모르고 끌려나간 사람도 있다고 하지만 적어도 포항의 71명은 그 케이스가 아니었습니다.

소년 아//잘 보셨다니 감사합니다. 저도 정말 역사를 반영한 괜찮은 영상물이 만들어졌으면 좋겠어요.
Commented by 행인1 at 2010/06/30 09:24
사실 백인엽 대령이 하려던대로 정식군인으로 편입하는게 맞는건지도 모르겠는데 참.... 그리고 내무부 산하에도 학도병 조직이 있었다는건 처음 알았습니다.
Commented by 네비아찌 at 2010/06/30 11:08
그런데 지휘관이 백인엽 대령이라면 저 같아도 그 밑에 들어가기 싫었을 거 같습니다^^;
Commented by 위장효과 at 2010/06/30 09:26
구라 즐!즐!즐!

헌책방을 가서라도 1970년대 보이스카웃지-이걸 격월로 내놨던가...하여간 당시 한국 보이스카웃 연맹에서 정기적(매달이었나 격월이었나) 내놨고 당시 초딩 보이스카웃 단원이었던 저도 당근 정기구독했습지요.-를 구해봐야겠습니다. 예전에도 호프님 포스팅에서 댓글 단 적이 있던 거 같은데 그때 연재하던 게 포항전투 실화를 재구성한 소설이었거든요. 그런데 당시에는 잘 몰랐는데(꼬꼬마 초딩이 알아봐야...)그 소설이 참 제대로 썼네요. 이번 포스팅에 언급하신 대로 김석원 장군이 해임되고 백인엽 대령이 부임하자 학도병들이 수도사단을 떠나 포항으로 가는 모습이 제대로 언급됐었거든요. 30년전에 읽었던 겁니다만 그 대목을 지금도 기억할 수 있습니다.(자세한 내용은 틀리지만)
두 장군의 이름(백인엽 장군도 나중에 별 달았으니)은 안나오지만 둘이 교체된 후 "젊은"대령의 연설장면이 나오는데 그거에 반발해서 "노"장군님 찾아가자...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Commented by 인민해방군 at 2010/06/30 10:08
어떤 새끼들의 눈에는 저들도 수구꼴통일 뿐이죠.
Commented by 개멍 at 2010/06/30 10:41
줄거리만 훑어도 이렇게 드라마틱하기 그지없는 얘기를 갖고,
그딴 시나리오를 썼단 말이죠...

... 작가 얼굴 좀 보고 싶다능.
Commented by 천지화랑 at 2010/06/30 11:01
여담이지만 태극기휘날리며에서처럼 학생 신분인데도 강제징집당한 경우가 꽤 있는 모양입니다. 아직 태극기휘날리며 개봉하기 전에 학교 선생님께서 은사분이 하신 말씀이, 학생 신분이었는데도 '학도병으로 징집'당하셨다더군요. -_-;;
Commented by 네비아찌 at 2010/06/30 11:06
진짜 영화 제작사는 학도병 여러분들 앞에 사과해야 한다는....
그런데 역사 그대로 영화를 만들었으면 모모 영화 잡지나 모모 평론가들은 냉전 수구 이념에 매몰되어 학생들을 전쟁광으로 묘사...운운 할게 뻔 하니 그것도 문제죠.
Commented by Matthias at 2010/06/30 11:54
연작 포스팅으로 인천 상륙작전 이후의 학도병의 활동도 써주세요오오오....
압박 넣는 건 아니고, 궁금해서요(...)

저거 보면, 참 대단하다 싶습니다. 아니, 10대의 혈기라 그랬을려나;;

뭐, 저였다면 좋아했던 여자애 데리고 도망쳤을 듯도 한;;
(...아마, 여자애가 거부했겠지만요;;)
Commented by 뚱띠이 at 2010/06/30 13:09
구라즐!

어찌보면 대단한 분들이로군요...
Commented by Allenait at 2010/06/30 13:50
구라 즐!!(...)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10/06/30 14:01
즐!!!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10/06/30 14:01
행인1//원칙을 준수하느냐 특수 사례를 인정하느냐의 문제니까요.

네비아찌//저도 좀;;;

위장효과//아무래도 가까운 시대니, 잘못 왜곡했다가는 큰일나지요. 부디 성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인민해방군//아마도...

개멍//그러게 말입니다-_-;;;

천지화랑//선생님이라든가 학도호국단 간부라든가 등등이 사전 설명도 없이 끌고 가서는 "자 이제 우리는 학도병으로 지원했다" 케이스가 제법 있기는 있는 모양이더군요. 하지만 이 71명은 그 케이스도 아니라 말입니다.

네비아찌//그게 사실인 걸 어쩌라고요-_;;;

Matthias//대단하고 고마운 분들입니다. 좋아하던 여자애...하시니 확실히 쓸 에피소드가 있군요(...)

뚱띠이//정말 대단한 분들입니다.

니르바나//니르바나님이 모든 걸 아시는 건 아니잖아요. 저 역시 모든 걸 아는 건 아니지만...
그리고 한국군의 민생지원을 선전하지 않기는 누가 안 합니까. 당시 다룬 출판물마다 나오고, 베트남 참전이 베트남에 대한 우호적 입장에서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는 경우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대민지원입니다. 교과서? 베트남전 참전 자체가 현 교과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데 무슨 재주로 그게 적힐까요?
다른 나라들의 시각을 찾으시는데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에서 미제가 학살을 저질렀다"는 주장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미군의 대민지원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합니까? 아예 언급 안 하죠? 그렇다면 베트남 참전 한국군을 비하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긍정적인 역할을 묘사할 이유가 있습니까?
Commented at 2010/06/30 14:59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10/06/30 15:09
저도 봤습니다만, 그냥 "먹이를 주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내버려 두면 그냥 흘러흘러 묻힐 텐데 무엇하러 수고를 들여 주목받게 해주려고 하십니까(...)
그냥 밸리에 다른 포스팅 올라가게 해서 눈이나 즐겁게 하는 게 낫지요.
Commented by Ruum at 2010/06/30 15:15
그렇군요. 혹시 한국전쟁 관련으로 추천하실만한 책이 있을까요?
전사 중심으로 되어 있다면 좋겠습니다.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10/06/30 15:28
김병륜-최용호 공저로 된 <그때 그날> 추천합니다. 한 권 짜리로는 그거만한 게 없을 거예요. 절판이라 구하기가 좀 어려우실수도 있습니다만 도서관에는 있을 겁니다.
Commented by 누군가의친구 at 2010/06/30 16:46
구라는 즐!...

어째 최근 방영된 전우, 로드 넘버원은 BOB나 더 퍼시픽을 본 저로써는 안습입니다. 어째 멜로물로 넘어갈 느낌이...ㄱ-
Commented by 노이에자이트 at 2010/06/30 16:50
전국학련 명단이 많이 나온 책이 한국반탁 반공학생운동기념사업회<한국학생건국운동사>이니 한번 참조하십시오.전국학련 출신 중 요즘도 정치적 발언도 하면서 가장 활동을 열심히 하는 이는 역시 이철승 씨지요.
Commented by 쿠루니르 at 2010/06/30 18:10
구라즐!!! ㅇㅅㅇ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10/06/30 18:38
니르바나//70년대, 80년대에 나온 베트남전 관련 서적들을 도서관에서라도 한번 구해 보시기 바랍니다. 한국군의 대민지원이 나와 있으니까요. 현대 대한민국이 베트남전을 떠받들지 않는 건 명분상으로 실패한 전쟁이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한국군이 지키고자 했던 남베트남은 패전으로 소멸해버리고 적이던 북베트남이 승리했는데, 베트남전 참전을 국가적 차원에서 강조하고 떠받드는 건 적대관계를 지속하겠다는 의사표시 이상이 아닙니다.

누군가의친구//뭐 멜로물로 넘어가건 말건 스토리나 개연성 있게 짜 주면 좋겠을 따름입니다.

노이에자이트//이름이 같기에 그분이 그분이 맞나 햇더니 정말 그분이 맞군요. 나중에 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쿠루니르//즐!!
Commented at 2010/06/30 18:57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maat at 2010/06/30 20:28
니르바나님 연세 정도면 충분히 그러실만 하네요.
딱 그 연령대가 구수정크리와 맞물려 완전히 개밥그릇된 형태고
그 이전에 베트남 관련 사관은 정부에서 완전히
지워버립니다.
그때 베트남과 재수교 했거든요 ㅡㅡ;
그뒤에 구수정이 90년 후반에 완전히 대체역사 써데고는
그냥 베트남으로 튀어서 한국과는 이별했죠.
파병당시 영상이나 이런거 보면 베트남에서 맨 학교건설하고
길 만들고 위문품 나눠주는것밖에 안나옵니다.
전투영상보다 그런게 더 많아요.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10/07/01 00:17
비공개//
1. 학도호국단은 "히틀러 유겐트가 아니라 화랑의 후예"라고 주장했더군요 ㅋ
2. 예, 저도 백인엽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다만 그 개인이 한 짓들이 별로 인기가 없는 게 많다 보니...
3. 가능하면 그쪽과 겹치는 부분은 그쪽을 참고하려고요.
4. 확실히 체계를 갖추는 쪽이 규정에 따라 처리하기 낫지 않겠습니까.
5. 전 못 봐서 ㄷㄷㄷ;;;

maat//80년대 이후 크게 강조하지 않으니, 각자 스스로 찾아 볼 밖에는 없지요.
Commented by 정보2 at 2010/07/01 00:56
업무에 수고 많으십니다.

월남전에서의 국군은 자유의 십자군이 아닙니까?
고려조이후 수천년간 이어진 외침과 침탈에서 벗어나
단군이래 말그대로 첫 해외파병으로서 육이오 북괴남침 이후
가난과 기아에서 원조만 받던 최빈국의 입장에서 처음으로 자유진영의
일원으로 기여한것은 절대 부정해선 않될것입니다.
당시 자유월남이 태생적 한계 와 지도부 및 국민들의 무능과 분열로
공산 월맹에 패망하였기에 현재 국군이 미국의 용병론 혹은 양민학살이
운운되는것 아닌가 합니다.
파월장병들의 복지와 명예를 생각치 못할망정 일부 소수 의견 및 사건으로
전체를 오도하며 모독치 않았으면 합니다.

Commented by 정보2 at 2010/07/01 00:59
상기 댓글은 나르바나 님께 올리는 댓글임

이상.
Commented at 2012/01/22 20:33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at 2012/06/04 01:41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12/06/04 01:52
참고하시는 건 뭐 괜찮겠으나 개인의 블로그는 공신력 있는 출처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가능하시면 제가 제시한 원 자료를 직접 참고하세요. 대학교 도서관이라면 있을 겁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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