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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초기 김석원의 황당한 행동 몇 가지 + 38선 충돌에 대한 짧은 잡담.
서울수복 기념일이고 하니 한국전쟁 포스팅 하나.


한국군 초기 장성들 중 대부분이 일본군 또는 만주군 장교 출신이라는 점은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 최선임에 해당하는 사람이 바로 김석원이에요. 일본 육사 27기 출신에다 종전시의 계급은 대좌(대령), 이만하면 한국군에 참가한 일본군 장교 출신자들 중에서 최고 선임이라고 해도 되죠. 물론 영관급을 넘어 장군으로 올라간 사람도 몇 있지만, 영친왕은 귀국하지 못했고 홍사익은 처형당했으니까요. 김홍일 장군이 중국군 소장 출신이긴 하지만 계열이 다르니 말이죠.

그런데 이 김석원 장군은 후퇴를 모른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진두지휘를 한다는 등(말해 두지만 이런 것들이 꼭 바람직한 건 아닙니다) 칭찬을 받는 한편으로 꽤 여러 면에서 대차게 까이는 사람입니다. 일제시대 학병 권유라든가 이런 문제는 일단 빼놓고, 한국전쟁 시기에 보인 군사적인 문제만 일단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일단 기본적으로 일본군에 있었다는 것부터가 친일경력으로 문제거리인데, 그거야 일단 넘어간다고 쳐도 그 기간이 너무 길기까지 해서(근 30년) 완전히 일본군스러운 태도가 몸에 배어버렸습니다. 독전한다고 사단장이 일본도 뽑아들고 진두지휘에 나서는 것부터가 전형적인 일본군 초급지휘관 방식 지휘법이죠. 그런데 그러다 사단장 죽어버리면 사단 지휘는 어떻게 합니까? 콧수염이야 개인의 취향이라고 한다고 해도 말입니다.

그래도 사단장이 진두에 서는 행동까지는 무책임하기는 해도 용기의 발로라고 인정해 줄 수 있습니다. 암요, 정작 자기는 군대도 안 갔으면서 요새 장병들 정신무장이 어떠니 군대 안 가고도 국가에 공헌한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느니 운운하면서 잘난척하는 것보다야 차라리 "죽을 바엔 나도 너희들과 같이 죽겠다"고 일본도든 권총이든 뽑아 들고 병사들과 같이 돌격하는 장군이 차라리 낫지요.

이딴 사소한 것보다, 지휘관으로서 진정한 문제는 그 긴 복무기간 동안 김석원 장군이 싸워본 상대가 오직 중국군 뿐이었다는 겁니다. 숫자만 많지 전투에 대한 의지도 없으며 사기도 낮고 장비도 형편없는 중국군만 상대해본 김석원 장군은 북한군도 중국군처럼 생각했고, 그때문에 개전 전 1사단장을 맡고 있던 시절에도 미국 군사고문단으로부터 엄청난 혹평을 받았습니다. 상세한 내용은 길잃은 어린양님의 일련의 포스팅을 보시면 될 것 같고요, 그중 핵심적인 사항 하나만 뽑아보겠습니다.

사단에 예비대가 전혀 없이 전 병력이 전 전선에 얇게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고문관들로서는 경악할 일이지요-_-

이렇게 악평을 받은 데다, 유명한 "명태 사건"(*)으로 물의를 일으킨 탓에 전쟁 전 김석원 준장은 해임되었습니다만 전쟁이 터지자 현역으로 복귀했습니다. 그리고 수도사단장(7월 7일부 임명), 3사단장(8월 7일부 임명) 등으로 활약하게 되었는데......그 와중에 진두지휘로 명성을 쌓은 것까지는 좋았으나 어이없을 정도로 기가 막힌 몇몇 황당한 에피소드를 남기게 됩니다.

* 1949년, 개성 주둔 1사단장으로 복무하던 김석원 준장이 대북교역으로 들여온 명태를 모조리 압수하여 1사단 장병들의 급식용으로 쓰거나 매각하여 부대 운영비로 사용한 사건. 김석원은 대북교역의 반입품이 대개 명태 등 소비식품류인데 반해 한국측의 반출품이 의약품과 자동차 부품, 시멘트 등 전략물자라는 점에서 이적행위라고 생각하고 이를 차단하였음. 하지만 그 파문이 워낙 컸던 탓에 파문의 당사자인 채병덕, 김석원 양인은 예비역에 편입되었으나 채병덕은 곧 복직함.

위에서도 암시했지만 전투지휘에 있어서 김석원의 방침은 전형적인 일본군식으로 "무조건 목표의 점령"이 아니면 "무조건 사수"로서 유연성이 완전히 배제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지휘는 당연히 공격이건 방어건 엄청난 사상자를 내게 되지요. 그런데 워낙 대선배라 직급상 상급자인 군단장이나 군단 참모들도 김석원 준장이 마음대로 하는데 대해서 뭐라고 하지를 못합니다.


1. 구체적인 사례로, 수도사단이 안동에 있을 때의 사건입니다. 안동사범학교(현재 안동대학교의 전신, 소재지는 현 안동시청 자리)에 사령부를 두고 있는 김석원 장군의 지휘소를 신성모 국방장관이 군단장 김홍일 장군과 함께 찾아왔습니다. 김석원 장군은 국방장관을 맞아 어려움을 토로했는데, "부대의 훈련이 미숙 할 뿐 아니라 용기가 없어서 전투를 못 하겠다"고 했다고 해요. 뭐 당시 국군의 질이 절대 높다고는 할 수 없으니 훈련 부족인 건 맞고, 용기에 있어서도 성격이 워낙 그런 사람이니까 그런 불평을 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이 불평에 대한 신성모 장관의 대답이 쇼킹합니다.

"앞으로 우리의 일은 잘 될 것입니다. 일본에서 의용군이 출병한다고 하니 걱정할 것 없습니다."

..............님 제정신?

그런데 이 이야기를 들은 김석원 장군은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오오 그럼 문제 없습니다!!!"

얼굴 잔뜩 미소를 띠우고 말이죠-_-

두 사람의 행각에 어처구니가 없어진 군단장 김홍일 소장이 "이 땅에서 왜놈들이 물러가는데 36년이 걸렸는데 이제 왜놈들이 들어오겠다는게 그렇게 좋으냐!"국방장관 앞에서 화를 냈다고 합니다. 그 후 이승만 대통령이 "어떤 경우든 일본군이 한국에 온다면 먼저 일본군부터 공격하겠다"는 담화문을 발표하면서 일본군 지원설은 캐버로우.


2. 이번에는 부군단장과의 일.

1군단 부군단장 김백일 준장이 역시 지휘소를 찾았을 때 김석원 준장은 부군단장을 보고 이런 소리를 했습니다.

"죽일놈의 새끼들 탄약도 안 주고 무엇으로 싸우란 말이냐, 너는 무엇하는 놈의 자식이냐. 부군단장이면 부군단장이니 무엇이냐."

부군단장 김백일 준장은 만주군 중위 출신으로 김석원 준장보다 나이도 한참 어릴 뿐더러 군 경력으로도 까마득한 후배가 맞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지금 같은 준장일 뿐더러 김백일 준장은 김석원 준장의 직책상 상급자인 부군단장으로, 군단장 유고시 김석원 본인에 대한 지휘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상대에게 저런 막말을 한다는 건 김석원 준장이 수양이 안 됐다는 증거밖에 될 게 없죠. 이날도 두 사람의 감정이 폭발하는 것을 부사단장이 사단장을 진정시켜 겨우 수습했습니다.


3. 김석원과 상급 지휘부의 충돌은 위의 경우만이 아니었습니다. 국군 제1군단이 미8군 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낙동강 이남으로 완전히 철수하게 되었을 때도 수도사단장 김석원은 "왜 후퇴만 계속하느냐"면서 후퇴를 거부했습니다. 끝내 분통이 치밀어오른 김백일 준장이 "작명이다! 후퇴하라!"고 강력하게 명령하자 김석원 준장도 분격해서는 자기 권총으로 자살하려고 했습니다. 화급히 달려든 부관의 만류로 사태가 진정되기는 했지만 가뜩이나 부족하던 철수 시한(*)이 이 쓸데없는 소동 덕택에 더 줄어들었고, 결국 풍산 쪽에 1개 중대의 분견대를 이끌고 나가 있던 부사단장 김응조 중령조차 철수명령을 하달받지 못했습니다.

* "수도사단과 8사단을 8월 1일 05시까지 낙동강 이남으로 철수시키라는 워커 장군(미 제8군 사령관)의 명령은 미군 연락기를 통해 지령문 형태로 전달되었는데, 7월 31일 19시에 영문으로 된 명령서를 받은 1군단 사령부는 문서의 번역 및 지도의 축척을 맞추는 데(미군이 쓰는 지도와 한국군이 쓰는 지도가 달라서 축척을 맞추고 지명을 다시 대조해야 했음) 3시간, 작전회의에 4시간을 소비했습니다. 회의를 20시에 소집하긴 했지만, 이래서는 철수에 쓸 시간이 충분할 리가 없죠? 회의 종료가 새벽 1시, 8사단 참모장이 명령문을 휴대하고 귀대한 시간이 새벽 4시였습니다-_-;;;

야간의 무리한 도강철수가 극심한 혼란을 초래할 것임을 짐작한 군단장 김홍일 장군은 고문관에게 정오까지 철수작전의 시행을 연기하도록 상신해줄 것을 청했으나 고문관은 상부의 명령을 어길 수 없다는 구실로 거절했고, 결국 한밤의 강행철수는 막대한 장비 및 인명손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김석원 준장의 자존심이 한 몫을 단단히 한 셈이죠.


4. 이번에는 상급부대와의 충돌은 아닙니다만, 역시 김석원의 독단으로 인해 초래된 비극입니다.

김석원 준장은 7월 20일에 수도사단을 이끌고 안동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는 도착하자마자 대 시민 연설을 했는데, 이 훈시의 요지를 한 줄로 적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 김석원이를 믿고 시민 여러분은 절대 안심하십시오. 그리고 군작전에 적극 협조하시기 바랍니다."

불안해하던 시민들은 김석원의 장담을 믿었고, 안동 시내의 분위기는 안정되았습니다만 이 선무조치는 뜻밖의 고약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뭐냐고요? 그야 안동 시민들이 제때 피난하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거죠-_- 시민들이 시내에 그대로 남아있었기 때문에 안동에 도달한 북한군에 맞서 시가전을 벌이지도 못했고, 북한군이 들어온 시내에 포격도 가할 수 없었습니다(뭐 그 덕에 시내가 덜 파괴된 걸 시민들은 다행으로 여겼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리고 이 결과는 순전히 김석원 준장의 독단적인 대민선전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안동 일대에서는 개전 전까지 공산게릴라의 활동이 판을 치고 있었고, 상당수 적색주민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수도사단과 함께 작전중이던 8사단 16연대는 개전 전 2사단 소속으로 안동지구에서 토벌작전에 참가한 적이 있어서 상당수 장병들의 얼굴이 지역주민에게 알려져 있었고, 이로 인해 철수의 와중에 민간복으로 갈아입고 도강을 시도하던 장병들 중 많은 수가 적성 주민의 고발로 적의 포로가 됩니다. 국군의 철수 전에 체계적인 민간인 소개가 이루어졌다면, 이런 피해의 규모도 확실히 줄어들었겠지요.


5. 무분별한 학도병 전선 투입.

김석원 장군과 관련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 학도병 이야기. 유명한 것으로는 포항여중 전투가 있습니다. 수도사단장에서 3사단장으로 보직이동된 김석원 장군을 따라 포항으로 간 71명의 학도병들이 북한군 1개 연대를 맞아 장장 12시간의 혈전을 치른 사건이죠(여기 대해서는 Qui-gon님의 영화 '71'과 포항여중 전투포스팅 참조). 뭐, 이때 김석원 장군은 나름 학도병들을 배려한 거였다고 합니다. 전선에서 죽게 하지 않으려고 사령부 외곽 경계를 맡겼는데 재수없게도 하필 그 위치로 기습이 들어왔을 뿐이라나 뭐라나...

하여간, 문제는 이게 처음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수도사단은 김석원 장군 부임 2일만인 7월 9일 진천 탈환전을 전개했는데, 이때 진천중학교 학생 100여 명이 고향과 학교를 도로 찾겠다며 참전을 자원했습니다. 같은 학교 출신인 성명 미상의 청년방위대원이 발의했다고 하는데, 그 연령대의 어린 청소년들이 얼마나 선동에 넘어가기 쉬운지를 보여주는 한 사례라고 할 수 있겠죠.

어쨌든 그 자신 일본군적인 정신을 아주 풍부하게 가지고 있던 김석원 장군은 이 어린 학생들의 애국심에 감동하여 보유하고 있던 일본제 99식 소총을 이들에게 지급하여 전선에 내보냈고, 제대로 된 훈련이라곤 하나도 받지 않고 전쟁터에 나간 이 학생들은 전원 진천 탈환전에서 전사했습니다. 1961년 6월 25일에 마을 사람들이 이들을 위한 위령비를 세워주었다고 하네요.

아무리 전황이 급박하고 아무리 학생들의 결의에 감동했다고 하나, 훈련 한번 받지 못한 중학생들에게 총을 들려 돌격에 투입한다...쓴웃음나는 이야기입니다. 어쩌면 이때 있었던 사건에 대한 죄책감 또는 죽은 학생들에 대한 미안한 감정이 포항여중 전투에서 학도병들을 후방에 배치한 이유가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리플을 달아주신 "백암산"님에 의하면 이런 사건은 실제로 없었으며, 해당 비석도 지금은 철거되었다고 합니다. 일단 쓴 글을 지울 수는 없으므로 그어둡니다.



* 그리고 **드립하는 어느 분 이야기와 관련된 짧은 이야기.
- "1949년 1월 18일부터 1950년 6월 24일까지 있었던 전투횟수는 총 874회였다. (중략) 북측의 주장에 따르면, 남한군이 침입한 횟수는 432회에 이르고, 그 가운데에 71회는 비행기 침입, 42회는 함대습격도 포함이 되어 있었다.
=> 응 그쪽이 하는 말 다 받아들였을 때 말입니다, 그럼 북한쪽이 침입한 회수가 442회네요? 10번 더 많은데요?^_^
그런데 그쪽 발언을 아무리 호의적으로 받아들여봐야, 남북이 다 똑같은 짓 했다는 이야기가 될 뿐 남한이 보다 침략적이었다는 걸 입증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릴까요?

저 통계 인용, 오류입니다.


왜냐 하면 말이죠. <38선 연선 무장충돌 조사결과에 관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조사위원회 보고서(1949.10.8)>에 기록된 남한 측의 월경 침입은 1949년 1월~9월의 기간에만 국한된 것이기 때문이죠. 와아, 이 이야기 들으면 그분들 좋아하시겠죠? 왜냐고요? 한국군의 북한 공격 회수가 더 늘어날 거 아닙니까?^_^
이런 문제에 있어서 양측의 발표 내용만으로 정확한 전투 회수를 세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일입니다. 1949년 11월 한국군 자료에 의하면 1949년 1월 1일부터 10월 5일까지 북한군은 563회에 걸쳐 침범행위를 벌였습니다. 결론? 양쪽 다 뻥입니다-_-

그리고 재미있는 자료를 하나 더 보죠. 한국전쟁 이후 편찬된 대한민국 쪽의 공식 전사에서는 남침 직전까지 북한의 침공 및 불법사격 횟수가 874회라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북한 쪽 공식전사는 한국군의 침범에 대해 어떻게 적었을 것 같으세요? 무려...

1949년 한 해에만 2,617차례(*)


의 "무장 침습 행위"가 있었다고 적었습니다^_______________^

* 1972년에 출간된 책(물론 북한에서)은 1949년에 총 1,836차례의 침공이 있었다(그중 1~9월 432회, 비행기 71회, 해상 침습 42회)고 했습니다만 1983년에 출간된 책(물론 북한에서)은 2,617차례로 적습니다. 미공개 자료의 대량 신규 발굴일까요? :)

그리고 당연히 1949년의 "침입"이 전부가 아닙니다. 위의 1983년 자료를 대량 인용한 1993년 판 북한 연구서는 남측의 무장공격 회수를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출전 허종호(1993), 『미제의 극동침략전쟁과 조선전쟁(1)』, 사회과학출판사, 84쪽.
『한국전쟁 :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정병준, 돌베게, 2006, 264쪽)』에서 재인용.
1949년의 통계에서 2회의 오차가 있는 것은 원본을 그대로 옮긴 것임.


아이구, 이거 의문이네요. 저 글을 쓰신 분은 왜 북한에 대한 "남조선괴뢰군"의 "불법적인 침략행위" 횟수를 저렇게 축소하셨을까요? 고작 432회? "최신" 연구결과가, 그 횟수가 무려 5,150회나 된다고 입증해 주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저분이 말씀하신 "874회"는 "반민족친일정권인 남한 정부"가 주장한 충돌 횟수인데, 그 통계를 그대로 갖다 쓰는 걸 보니 저분도 아마 "반민족주의자"에 "친일분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충돌 회수를 의도적으로 줄여서 말할 리가 있을까요?^__^

뭐어...그냥 간단하게 그런 것 같다는 겁니다. 그런 것 같다는 거라고요. 아니라면 오해한 거고요~~^_^*


참고자료 :

6.25전쟁사 vol.04 - 금강/소백산맥선 지연작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8
육군종합학교, 박경석, 서문당, 1990
한국전쟁 :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 정병준, 돌베게, 2006
한국전쟁사 vol.1 - 해방과 건군(1945~1950.6),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1968
한국전쟁사 vol.2 - 북한 괴뢰군의 남침(1950.6.25~1950.7.31),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1968
한국전쟁전투사 - 진천, 화령장 전투(중서부지역 지연전),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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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슈타인호프 | 2009/09/28 02:08 | 한국현대(~20XX) | 트랙백 | 덧글(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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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갑그젊 at 2009/09/28 02:19
저..저..저..런 인간이;;; 어휴... 참 오죽 사람이 없었으면 저런 사람을 계속 썼겠냐마는 증말...어휴...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9/09/28 02:30
정말 없기도 했죠. 그나마 못한 인간들도 있었고...전쟁이 길어지면서 "검증된 인사들"이 기용되게 됩니다^^
Commented by Allenait at 2009/09/28 02:34
..정말 대뇌가 비계로 된 사람이군요(...)
Commented by Empiric at 2009/09/28 03:39
저런 인간이 영관까지 달았다니 일본군의 인사 시스템도 어지간히 만만치 않았나 보군요..(..)
Commented by 필군 at 2009/09/28 05:18
이 양반이 세운 성X 중고등학교(이름과는 달리 성남이 아니라 서울에 위치)에서 중학교를 다녔는데 - 교내에 이 양반 흉상/가묘도 있습니다. 학생동원해서 가묘근처 청소하곤 했죠 - 학도병에 관해서는 무슨 페티쉬가 있나 싶을 정도였죠. 6.25행사때만 되면 학도병 영화틀고, 중고등학생들 사열(? 뭐, 이건 당시 기본이었던듯 합니다만) 등등.
Commented by Bluegazer at 2009/09/28 05:26
저는 카이젤수염+일본도+"나 죽일 포탄은 아직 안만들어졌음ㅋ"드립 정도로만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거 뭐 영 황이었군요.
좀 다른 얘기가 되겠지만...일본육군 상태 안 좋은거야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그 일본군한테 발려나간 국부군은
도대체 뭐하는 놈들이었나 하는 생각밖에 안 듭니다.
Commented by milln at 2009/09/28 06:46
저당시에는 전술교범이 없었나요?;
Commented by 스카이호크 at 2009/09/28 06:53
국방일보에선 진두지휘 사례를 들어 용장으로만 기록해놨죠. 낄낄낄
적이든 아군이든 평가는 냉정해야 하거늘. 저러니 신용을 못 받지.
Commented at 2009/09/28 07:23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ㅀㅇㄴ at 2009/09/28 07:42
한국전쟁때 우리를 지켜준것들 중 물질적인면은 미군의 폭탄이고 정신적인면은 일본제국의 일본도였네요
Commented by dunkbear at 2009/09/28 08:00
명태사건의 에피소드는 요즘 대북관계를 생각하면 참 흥미로운 내용이네요. ^^
Commented by ddd at 2009/09/28 08:32
북침이네 남침이네 떠들기 전에 '한국전쟁 :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 이 책좀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음.
Commented by 이준님 at 2009/09/28 08:33
1. 악명높은 유원식의 "김석원 적전 도주설"은 뭐 아직도 신화로 남았지요.유원식의 고의적인 모함이 맞지만 마봉춘에서도 천연덕스럽게 반영되었고 친일파 99인 같은 책에도 그대로 실려 있으니까요.

2. 김석원의 여러 행각중에는 불가피한 일이 없지 않아있습니다만 몇가지는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하지요.

3. 최덕신이 이XX (이쪽이 좀 정치적으로 복잡한 일이 있어서 가명처리합니다.)와 미국에서 발표한 "한국전의 진실"류의 증언이나 --;;; 일본에서 출간한 회고록을 보면 김석원은 6월에 비밀 복직되서 채병덕과 함께 북침의 일선에 섰다더군요. --;;이런 분을 빨아주는 차칸 한걸레 --;;
Commented by 이준님 at 2009/09/28 08:36
ps: 38 선 분쟁건은 "그냥 그런게 있었다+아아. 옹진전투의 위대한 승리"류로 넘어간편이 많았습니다.(악명높은 육탄 10용사? 건도 있구요.) 커밍스를 비롯한 수정주의쪽에서 이 관련 연구를 최초로 심도있게했고(목적이야 아실듯) 수정주의가 아닌쪽에서 이것을 분석한 결정체가 정병준의 연구이지요. 사실 정병준의 연구조차도(군사적 전술적 측면에는 비판받아야하지만) 38선 분쟁이 북침/남침이 맞다와는 무관하다는 걸 밝힙니다만 38선 분쟁의 교훈이 한국전 초반의 전략적 결정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Commented by 행인1 at 2009/09/28 09:01
저런 양반이 개전당시 1시단장이 아니었던건 조국의 홍복입니다. 암요.-_-;;
Commented by 화성거주민 at 2009/09/28 13:42
그렇지요;;;;
Commented by 아브공군 at 2009/09/28 09:05
.....지는 군대는 다 이유가 있다니까요.....OTL
(개인적으로는 한국사 최악의 후퇴, '현리전투'의 그 인간의 유명한 '제 지휘 군대 어디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가 최고의 명대사.... 그러고도 노통까는 모습이란.....)
Commented by 미연시의REAL at 2009/09/28 09:17
단순하게 진두지휘의 원칙을 사단장이 지켰다는걸 비판할 대상은 아니라 봅니다. 어떠한 경우에서라도 결국 진두지휘의 원칙은 지휘관 스스로가 솔선수범을 보인다는것도 있지만.. 현장상황을 직접보고 신속하게 결정할수 있음을 의미하죠.. 2차대전 1940년 서부전역당시 독일군의 구데리안을 비롯 롬멜등 독일군 장군들의 진두지휘에 의한 효과적인 사례가 있고 진두지휘자체가 전통적인 문제이더라도.. 말이죠..

그런데 의외네요.. 진두지휘원칙때문에 김석원 이사람 자체를 좋게 봤고 중국군과의 교전 즉 제판단에는 공산중국군과의 교전에서의 승리때문에 나름 능력있는 인간으로 봤는데.. 삽질을 의외로 많이했군요;;

그런데 김석원 장군의 일본도 활용문제에 대해서.. 지적을 한다면.. 아마 국방경비대때의 문제가 아닌가합니다. 슈타인호프님의 고문단과 국방경비대때의 포스팅도 있지만.. 장교라는걸 확실하게 인식하고 동양적 사고에서의 지휘관 하면 검을 휘두르는 인식때문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일본군적 사상도 당연하게 포함해서 말이죠.;;;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9/09/28 09:29
저도 진두지휘의 문제는 "사소한" 것으로 취급했습니다. 분명히 사기를 올리고 판단을 빠르게 하는 효과는 있지만 유고시 사단 지휘의 문제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진두지휘의 문제는 그것만이 아닙니다. 사단의 정면에서 사단장이 직접 볼 수 있는 위치가 전부는 아니기 때문에 어느 한 전선에 사단장이 직접 가 있는 것은 시야를 좁혀 해당 장소 이외에 다른 전선의 상황을 접하는 것을 어렵게 하며, 자칫 사단장의 위치가 모호해지면서 상급부대 및 예하대와의 통신이 두절되어 곤란에 빠질 수 있습니다. 독일군에서도 미친 듯이 전방을 싸질러다니는 롬멜 때문에 아프리카군단 사령부가 뒤집힌 게 한두 번이 아니었지요. 군단장 어디갔냐고-_-;; 뭐 사단장 정도라면 그래도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고, 그래서 저도 사소하게 취급한 겁니다.

그리고 뭐 일본도 차고 다닌 문제는 말씀하신 게 맞을 겁니다.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9/09/28 09:24
Allenait//에이, 비계뇌는 채병덕이죠. 김석원은 비계가 아니라 근육에 가깝습니다.

Empiric//일본군에서야 저런 사고방식이 아주 자연스러운 거였으니-_-;

필군//그게, 사람 이름 따서 세운 거였나 그랬으니까요. 학도병...참 자원한 사람들은 정말 칭찬해야 하는데, 받아들인 군 관계자들은 욕 좀 먹을 사람이 많습니다. 아무리 자원자라도 최소한 어느 정도 훈련은 시켜야죠.

Bluegazer//국부군은 뭐, 중앙군 일부를 제외하면 말 그대로 오합지졸일 뿐입니다.

milln//있었죠. 다만 당사자가 "내 오랜 경험과 연륜"을 강조해 버리면 말짱 도로아미타불일 뿐.

스카이호크//용장은 분명히 용장입니다. 다만 그 용기에 지(知)는 좀 모자라는 거죠. 그나마 용장도 아닌 것보다야 훨씬 낫습니다. 채병덕보다야 차라리 낫죠.

비공개//앗, 감사합니다. 조언해주신 바에 따라 문장을 수정했습니다.

ㅀㅇㄴ//뭐, 상당수 간부가 일본군 출신이었으니 그런 면이 없다고는 못 하겠죠.

dunkbear//여전히 북한에서 들어오는 수입품이 농수산물이죠. ㅋ

ddd//읽겠습니까--;;

이준님//
1. 그런 식의 조작에는 정말 어처구니가 없더군요. 적어도 그런 종자는 아닌데 말입니다-_-;;
2. 넵 맞는 말씀입니다.
3. 그 사람이 처한 입장이라는 게 있는데...말입니다. 참 거-_-;;;
ps: 요즘 나오는 국방부 판 한국전쟁사는 그쪽을 많이 생략하더군요.

행인1//백선엽 장군을 1사단에 보내주신 신께 감사드리고 싶을 지경입니다.

아브공군//그러고 보니 비슷한 대사가 게티즈버그에서도 나온 일이 있지요...^^;;
Commented by 윤현철 at 2009/09/28 09:33
1. 김석원 장군이 2차대전때, 중국에서 일본군으로 복무했다면 예비대가 없는것은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입니다.
->일본군 1명이 중국군 10명보다 우월하다는것을 실제 전적으로 증명해버리는 일본군. 이런식으로 전쟁을 경험한 사람이 한국전쟁에서 그렇게 움직인것도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2. 중공군이 공격온다고 헬기타고 도망간 어떤 장군보다는 그나마 김석원장군이 더 나은 정도입니다. 그렇다고 명장이나, 용장은 절대 아니라는 의견에 동의합니다. 단지, 6.25때 국군 장성들이 워낙에 엄청나서 김석원 장군정도면 평범해 보일정도입니다.
Commented by 이준님 at 2009/09/28 09:37
참고로 소싯적 괴작 열전에 들어가는 영화 "잔류 간첩"(새파랗게 젊은 최불암, 이낙훈의 압박과 처녀 김수미의 등짝 연기가 돋보이는 --;;)에 보면 김창숙을 통해서 특무대장을 방법하려는 대북 무역사업체 대표 "허장강"이 나오지요. 당연히 이 사람은 빨갱이라는... --;;;
Commented by organizer™ at 2009/09/28 09:44
>> 대북교역의 반입품이 대개 명태 등 소비식품류인데 반해 한국측의 반출품이 의약품과 자동차 부품, 시멘트 등 전략물자라는 점

특이하군요. 대체 지금으로부터 50 년 전에도 완전 "비슷한" 일이 있었군요....... 그것 참.

산천은 정말 의구한 듯 합니다.
Commented by 소시민 at 2009/09/28 09:46
그런데 이 김석원 장군은 후퇴를 모른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진두지휘를 한다는 등(말해 두지만 이런 것들이 꼭 바람직한 건 아닙니다)

- 은영전의 젝트와 프레겔을 생각하면 이해가 되는군요...
Commented by 네비아찌 at 2009/09/28 09:49
중일전쟁 때 서로 적이었던 김홍일 장군과 김석원 장군은 서로 상대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요.....
Commented by asianote at 2009/09/28 09:51
이런 주제에 못난 중국군 외치는 이유는 뭘까요?
Commented by AyakO at 2009/09/28 09:56
게티즈버그에서의 그 대사는 리 장군의 시대착오적 정면돌격으로 휘하 부대가 전멸당한 피켓의 분노의 표출 아니었던가요...;
Commented by 고독한별 at 2009/09/28 10:19
역시, 용장보다는 지장, 지장보다는 덕장이 낫다는 말은 다 이유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Commented by 카바론 at 2009/09/28 10:22
키키키키키키키키키킼

아, 엄청 웃기군요.

아, 정말 코미디...
Commented by 이준님 at 2009/09/28 10:33
명태 사건은 김석원도 불리했던게 그렇게 압수한 제품들을 증빙자료로 국가에 헌납해야 했는데 그걸 임의로 처분 --;;해서 사병 복지와 38선 분쟁 피해자들에게 직권으로 나누어준겁니다.김석원의 반대자들은 여기서 냠냠 의혹을 제기합니다.(물론 당사자는 그걸 부인합니다.) 냠냠이건 아니건 간에 상부 명령없이 그런 일을 한것도 불리하게 돌아간거지요.(미 고문단이 의외로 김석원을 부패인사로 몰았던게 이 사건과 사병들을 임의로 개인 용도로 노역시킨--;;; 것 때문입니다.)
Commented by asianote at 2009/09/28 10:34
뭐 오늘날 우리나라도 부하들을 임의로 개인 목적의 일에 이용하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은 듯 합니다.
Commented by 瑞菜 at 2009/09/28 10:55
저기 포스팅에도 있지만 예비대를 안 두는 것은 일본식 일종의 함정수비라더군요.

첫번째는 저 일본 의용병이 일본에 남았던 교포들의 의용병 이야기가 아니었습니까?
하지만 알게 모르게 일본 소해대가 암암리에 활동을 했으니
이승만 대통령의 담화는 물거품이...(이승만 대통령 자체가 일본을 매우 싫어했으니까요.)

두번째는 "죽일놈의 새끼들 탄약도 안 주고 무엇으로 싸우란 말이냐." 라 했는데
탄약 보급이 안 되었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일선 지휘관으로는 열 받을만 합니다.

세번째는 명령 불복이긴 한데, 열받을만 하지요.
패잔병을 주워모아 진천에서 1주일을 견뎌냈지만 이후 끝도없이 후퇴이니
자기 말대로 "이러다 현해탄까지 가자는 거냐 싶고요."

네번째는 저 정도의 대민 연설은 어디를 가던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지금 존내 짱 쎈 인민군이 내려오는데 감당하기 힘드니 님들 ㅌㅌ"했다가는
가뜩이나 뒤숭숭한 분위기에 일대 혼란이 벌어질 수 있고. 사기도 떨어지고요.

다섯번째는 포항도 몇번이나 주인이 바뀔 정도로 난전이 벌어질 정도니
오죽 급했으면 쓰겠습니까.
또 우리나라 사람들이 의병의 전통을 참 많이 존중하는 편이지요.
하지만 결국 이후 후방으로 돌리고 3사단은 완전 철수에 성공해 솜씨를 한번 보여줬고,

백선엽 장군도 초기에는 황당한 짓 많이 했지요.
개전 당시 마침 고급지휘관 연수 중이었는데, 북한군이 내려온다는 말을 듣고
육군본부에 "지금 북한군이 온다는데 교육 땡땡이 치고 부대로 돌아가도 되나요?" 했다가
욕 진탕 먹었고.
이후 패잔병을 이끌고 남으로 남으로 정처없이 가는데, 자서전에는
"병사들은 나만 보고 따라왔다. 마치 내가 어디로 가야하는 지 아는 줄 아는 것 같다.
하지만 나도 어디로 가야할 지 몰랐다. 우리는 전국시대 유량병과 같았다"라 하더군요.
또 이런 패잔병들을 긁어모아 재편성해서 3일을 주문한 진천을 1주일 막아낸 것이 김석원.
그 저돌적인 김석원 장군조차 못한 "사단장 돌격"을 몸으로 했고
(사실 하면서 무지 무서웠답니다. 다행히 북한군도 병력을 물렸다더군요.)

뭐 사는 게 다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Commented by 화성거주민 at 2009/09/28 13:47
뭐 백선엽 장군님이야 개전 당시에 이십대 중반을 갓 넘인 애송이에 불과하셨으니........;;;

그래도 그 후에는 눈부신 활약을 하셨더랬죠...;;
Commented by 少雪緣 at 2009/09/28 11:57
상무대 보병과의 문장에는 '나를 따르라!'라고 적혀있죠(먼산)
Commented by 어릿광대 at 2009/09/28 14:14
이건 뭐 할말없게 만드네요;;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9/09/28 14:41
윤현철//
1. 게다가 김석원 장군 본인은 달랑 2개 중대를 거느리고 중국군 1개 사단을 저지해낸 경험이 있었지요 :P
2. 뭐 용장의 범주에는 넣어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준님//북한과 연계된 놈 치고 멀쩡한 건 없다...는 관점이려나요;;

organizer™//산천은 유구하나 인걸은 간데없고...

소시민//에이, 프레겔은 아예 개념이 없지요. 젝트는 그래도 전선에서 대장까지 올라갔으니 프레겔보다는 낫다는 소리지 말입니다.

네비아찌//그야 저도 알 수 없는 일(...)

asianote//뭐 그래도 잘났다...는 의식일지도.

AyakO//넵 피케트 장군이 한 절규 맞습니다^^;

고독한별//그런 것 같아요.

카바론//뭐 저때 남북 전부 마찬가지....

이준님//네, 확실히 그 처분에 있어서 부주의했던 건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asianote//옛날보다야 덜하죠.

瑞菜//예, 저도 일전에 어린양님 포스팅 보면서 처음 알았습니다.
1. 말 그대로 "일본인 의용군" 이야기였던 것 같습니다. 교포 이야기라면 김홍일 장군이 화를 낼 이유가 없죠.
2. 열받았다고 상급자에게 막말을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3. 마찬가지로 이해는 가지만 그렇다고 자살하면 남은 부하들은 어쩌라고요-_-;;
4. 실제 전황이 불리한데 사단장 선에서 저런 행위를 마음대로 하면 곤란하죠. 하더라도 경찰, 행정계통에서 맡아야 하는 일입니다.
5. 그럭저럭 잘 하긴 했는데, 그래도 애들은 안 됐죠.
6. 본인도 아직 초임 아니었습니까. 만주군 경력이 있다고는 해도 고급지휘관은 아니었으니까요. 말씀대로 사는 게 다 그런 거죠.

화성거주민//정말 빛을 발하신 분.

少雪緣//원래 장교가 더 많이 죽죠(먼산)

어릿광대//뭐 역사는 재밌습니다.
Commented by 自重自愛 at 2009/09/28 15:22
1. 고지마 노보루의 [한국전쟁]에도 "재일 한국인 의용군"으로 나오던데 어느 쪽이 맞습니까? -_-a;;;;

2. 그 책에는 김홍일이 화를 냈다는 사실에 이어 김석원이 "일본 사람이 아니라 재일 동포가 아니냐고" 김홍일에게 반발하며 흘겨 보았다는 이야기로 이어지더군요.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9/09/28 15:51
1. 으음, 고지마 노보루 책을 안 읽어서 확실히 뭐라고 말하지는 못하겠습니다. 다만 재일 한국인 의용군은 일부지만 실제 파병되었으니, 아마 그쪽이 맞을 겁니다. 소문이 퍼지면서 이리저리 와전되고 뒤엉켜 뭔가 이상한 소리가 돌았을 수도 있겠죠.

2. 크으, 김홍일이 의용군 구성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거나 재일한국인으로 위장한 일본인의 파병 여부를 우려했을 수도 있겠군요--;;
Commented by 我行行 at 2009/09/28 16:19
제일학도의용군은 있었습니다.

내전 도중 센프란시스코조약이 체결되어 그분들은 돌아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Commented by 45acp at 2009/09/28 16:57
사실 저도 일본에서 오는 의용군을 재일 학도의용군이 와전된 게 아닌가 생각했었습니다.

포철의 박태준씨도 재일학도의용군출신 아니었나요?

개인적으로는 김석원장군은 그냥 구시대의 용감한 군인 그 이상 이하도 아니라고 봅니다. 그래서 한계도 많았고 삽질도 많고 나름의 미덕도 있던....

저의 지도교수님과 친한 같은 대학교 국문과 교수님의 경우엔 저양반이 살아 있을때 저양반이 세운고등학교를 다녔는데, 그 교수님의 사고야 골수 좌쪽에 있지만, 김석원장군에 대해선 의외로 아주 '멋진 분'으로 기억하고 있더군요.

당시 고교를 설립할때 그 일대에서 맨처음 여교사를 채용하고 학생들에게도 의무적으로 어떤종류건 클럽활동을 하도록 강조하는등 나름 깨인(?)모습을 보여줬다던가?

그양반의 행적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게 그 교수님의 1년 선배중에 육사 2등 합격자와 공사 1등 합격자가 나오자 이사장실로 불러 당장 줄게 없다며 차고 있던 시계를 풀어주었고, 그게 당시 학생들에겐 아주 멋진 이야기로 회자되었었다더군요.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9/09/28 21:09
我行行//그분들이 돌아가시지 못한 줄은 몰랐군요.

45acp//사단장 시절 휘하 장병들의 평도 "호령은 하지만 정말 자상하고 병사들을 챙기는 지휘관"이라는 평가와 "죽여버리고 싶을 만큼 잔인한 놈"이라는 평가가 공존한다더군요. 물론 전자가 압도적으로 다수인 듯 하긴 합니다.
Commented by 제노테시어 at 2009/09/28 17:20
...크으, '예비대가 뭔가여, 먹는건가여' 이 부분에서는 작전술 교육을 1대 노통 시절에야 시작했다는 한국군 장교단의 멋진 모습이 보이는것 같아 씁쓸합니다. 뭐 그렇게 따지면 1940년 5월 어느날 처칠 수상이 가믈랭에게 예비대 어디있냐고 물었다가 들은 대답도 있겠습니다만...
Commented by 빛의화살 at 2009/09/28 20:45
처칠에게 가믈랭이 뭐라고 했는데요? 궁금합니다.
Commented by 제노테시어 at 2009/09/28 20:48
처칠이 독일군이 돌파해오는 작전지도 보고 '근데 전략 예비대 어디있소?" 라니까 가믈랭 왈.


"전혀 없습니다."


라고 했더랩니다 -_- 훗날 처칠이 정말로 깝깝하더라고 회고했다지요.
Commented by 존다리안 at 2009/09/28 19:25
그러고 보니 삼국전투기에서 진두지휘에 대해 이렇게 말한 게 기억나네요. "미친 짓"
Commented by Karl at 2009/09/28 20:27
.....개전 직전 1사단장이 백선엽 장군으로 바뀌었던 것이 다행이군요.(...)
Commented by 드레드노트 at 2009/09/28 20:58
김석원에 대해선 명태 사건이랑 '예비대, 그거 먹는건가염?'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이런 사례들이 있었군.

혹 백인엽 장군(백선엽 말고)에 대해 다뤄볼 생각 없수? 자기 지프 시동 꺼뜨렸다고 운전병 즉결처분, 무거운 군수물자 지고가는 병사가 자기 차 앞에서 얼쩡거린다고 즉결처분 등 무능+악명이 높았다는데.

거기다 옵션으로 사학비리의 종합선물셋트라는 선인재단까지...그거 때문인지 인천출신 내 선배 한명은 백선엽 얘기만 꺼내도 '그 개xx'가 바로 나오더군.(선인재단이라 도매급 취급 당하는 거지)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9/09/28 21:11
제노테시어//기가 막힌 일이죠. 그 판국에도 마지노선에서 노는 병력이 얼마였더라....

빛의화살//크흐흐흐......

존다리안//미치지는 않더라도 빡센 일이죠.

Karl//그건 정말 다행입니다. 일거에 1사단이 괴멸될 뻔 했지요.

드레드노트//나도 다른 거 때문에 책장 넘기다 우연히 알았지. 백인엽은 나보다는 이준님한테 물어보는 게 어때? 난 사실 근대사의 인물들 비사 같은 거 잘 몰라.
Commented by 천지화랑 at 2009/09/28 23:00
워낙 채병덕 신성모가 화려하게 드립쳐줬으니 김석원이 그나마 용장으로 보이는 안습한 사태 -_-;;
Commented by asianote at 2009/09/28 23:10
허허, 유재흥 장군은 어디다 갔다 파셨소이까?
Commented by 드레드노트 at 2009/09/28 23:13
신성모 장관님의 '점심은 평양, 저녁은 신의주' 드립은 너무 유명하고...

이승만 각하가 말 한마디만 하면 '지당하옵나이다, 각하~' 드립만 해서 '지당 장관'이라는 별명이 붙었다는 사람이 신성모 맞습니까?(다른 사람인가?)
Commented by 정호찬 at 2009/09/28 23:27
부하들 돌격시키고 지는 평상에서 맥주 마신다는 얘기도 있던데. -.-;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9/09/29 00:46
천지화랑//그럼요, 용장이지 말입니다.

asiamote//유재흥도 잘 할 때는 그럭러젉 자기 몫은 했는데...

드레드노트//맞을거야 아마.

정호찬//그 이야기는 악의적인 모함이라고 합니다. 이준님이 확인해주신 거니 맞을 거임.
Commented by 정보2 at 2009/09/29 01:49
신성모 국방장관이라하면 낙루장관이란 별명도 있었다고 합니다.
각하께서 말씀하시면 눈물을 흘리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낙루장관이라는...
6.25동란 전후해서 여러모로 부정적인 면이 많지만
신성모 전 국방장관께서도 나름 애국자신걸로 알고 있습니다.
일제시대 도중하여 상해 오송상선학교 졸업후
영국으로 건너가서 영국 상선대학을 졸업하고
대영제국 extra captain 까지 올라간걸로 알고 있습니다.
중국으로 건너갈때도 '해군이 되서 군함을 끌고 와서
왜놈들을 다 쳐부수겠다' 며 어떻게 보면 당시로서는 해양력의 중요성을
인식한 얼마 않되는 분들중 한분이실 겁니다.

덧붙이자면 상기 언급되신 장성분 같은 경우
갑론을박 여러가지 다양한 견해가 나올수 있지만
본직의 개인적인 견해론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신생독립국의,
군사적 전통이란것이 없었던(단절되었다고 봐야겠습니다.)
급조된 군대와 그 조직의 구성원들에게 너무 많은걸
기대하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또한 지금 기준으로 본다면 구일본군이 무능과 안일함의 저질군대라고
평가되지만, 당시로서는 욱일승천의 기세로 귀축영미(?) 서구열강과
대등(?)하게 전쟁을 수행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않될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태평양전쟁 말기나 중일전쟁 말기에 보여주는 병적(?)인 말기증상은
가관이겠지만 우리가 1920년대에서 50년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독립운동에 몸을 바치신 애국애족의 독립운동가분들이 아닌 이상
대부분 보통사람들은 일본을 강대국으로 선진국으로 알고 있을겁니다.



Commented by 이준님 at 2009/09/29 16:02
1. 김석원의 경우 욕을 먹었던게 그가 김일성의 맞수+ 조국광복회를 처부순놈으로 간주되는 것때문에 더 특정 국가에 욕을 먹지요. 사실 이건 100% 떡밥입니다.(와다하루키도 그의 저서 2판부터 이 오류를 수정합니다.)

2. 김석원은 무식하게 용감한 티를 낸 반면에 가장 문제시된 "즉결처분"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나름 괜찮은 평을 받습니다. 개무식은 아닌 장교에 나름 반공서적에서 이상하게 추앙받는 분들(고Xx같은) 이 육사 8기들에게는 "저능아"라는 평을 받을 정도였다는 걸 본다면 김석원은 그 악명?에 비해서는 이런점은 나았지요.

3. 고지마 노보루는 당대 "태평양 전쟁" 전문 논픽션 작가입니다.(대표작이 대동아 전쟁사였고 업계의 전설 대동아 전쟁 비사에도 글이 있고 미번역 부분에도 많이 글을 썼습니다.) 그런 이유로 당대 "조선전쟁" 관련 부분은 2009년 기준으로는 대단히 미흡하고 몇몇부분은 중요성이 엉망이지만 적어도 "일본 국내" 부분은 정확하다고 볼수 있습니다.
Commented by 이준님 at 2009/09/29 16:07
4. 백인엽의 경우는 전쟁 당시 옹진 전역의 맹장으로 추앙받았지만 전후 교육관련 비리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성격 이상자에 무분별한 즉결처분으로 말이 많았다고 하지만 즉결처분 자체가 법적으로 용인?되던 시기이기도 하지요.(그렇다고 남용하면 안됩니다.) 90년대 초반(슨상님이 슬슬 정계 복귀 준비할즈음) 월조에서 50년대 일어난 모 부대의 하극상(상위 장교를 사살했음)이 백인엽이 평소 가해자 장교를 괴롭혀서 그 스트레스 때문에 엉뚱한 상급자와 다툼에서 폭발한걸로 폭로한 적이 있었죠. 하여간 백인엽이 하도 비리가 많았던터라 그 자신도 인정하듯이 "정권만 바뀌면 비리 인사 척결의 측면에서" 꼭꼭 감옥에 들어갔다 나오는 케이스였습니다. --;; 백인엽의 전후 행적때문에 전쟁 당시의 일이 더 나쁘게 해석된 타입입니다.

ps: 즉결처분관련해서 법적으로 기소되고 비난받은 사람은 악명높은 석두 장군 송요찬이었습니다. 사실 그가 비난 받은건 4.19 연간의 계엄사령관이었고 5.16 이후에 김종필과 박정희와 사이가 안 좋아져서 뒤집어 쓴 누명이라는게 정확하지만요.
Commented by 이준님 at 2009/09/29 16:20
일본 본토인 관련 떡밥은 전쟁 당시에도 "앞장서서 아새퀴를 잡아먹는 미군 깜둥이" "대낮에 발가벗고 다니는 깜둥이 군인" --;;와 함께 나름 역사가 오래된겁니다. 대부분 이런 케이스는 일본계 미국인+ 미군 부대의 일본인 군속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상식적으로 일본이 미국 점령하에 있기 때문에 의용군을 편성해서 보내는것 자체가 불가능했습니다.(소해정 참가도 거의 불법적이라고 볼수있습니다.) 그러니까 김석원이나 이런 사람이 이야기하는 경우는 대부분 재일 학도 의용군인 경우가 많습니다.

재일학도 의용군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이후에 법적으로 중간에 떠버리는 케이스였고 대부분 한국내 친척을 찾아가거나 늘 그렇듯이 "밀항"을 해서 돌아가기도 했답니다. 혹자는 재일학도의용군 출신의 포로들때문에 일본의 한국전 참전 의혹이 제기되었다고 하는데 그건 신빙성은 없습니다.

참고로 마봉춘에서 "일본군 한국참전 떡밥"을 돌릴때 재일학도의용군 관련 자료를 무리하게 끼워넣기도 했지요.(똥이나 먹어)
Commented by 564 at 2009/09/29 20:26
"1949년 1월 18일부터 1950년 6월 24일까지 있었던 전투횟수는 총 874회였다."

궁금해져서 구글에서 한번 검색해보니 위키 백과에 한국 전쟁 항목에 똑같은 내용이 있네요.
Commented by B군 at 2009/09/30 00:24
호프님 조금 오해(?)하신듯 싶은데 구 일본군에서 사단장은 아무리 용감한 사람이라도 절대 앞에 나서지 않습니다...^^; 구 일본군은 사령부와 막료(참모), 즉 장성급은 철저히 보호했습니다. 김석원이 저런건 육대를 못나온 대대장 근성이 몸에 배서(...) 그런겁니다 ㅋ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9/09/30 00:38
정보2//신성모 장관이 나름 애국자였을 수는 있겠지만, 국방부장관 자리에 앉은 건 천부당만부당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상선 선장 출신이니 장관 자리를 준다면 차라리 상공부장관 같은 거에 앉혔으면 더 나았을 겁니다.

이준님//
1. 요즘도 김일성 추적한 김석원 설이 돌더군요-_-;;
2. 전투에서 사지로 내몰지언정 병사들에게는 자상했다는 이야기가 많더군요.
3. 저도 한번 읽어는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계속 밀리는데...
4. 형님 반만큼만 살지 좀-_-;;;
5. 오해의 소지가 좀 많긴 했겠죠. 교포 의용병 중에는 일본에서 태어나 한국말을 못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들었는데...-_-;;

564//네, 그게 한국 정부의 공식 통계입니다.

B군//아아, 일본군도 사단장은 전선에 안 나갔나요;;; 이런 본문 수정하겠습니다. 지적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이네스 at 2009/09/30 09:31
정신이 멍해지는군요. ㅡㅡa
Commented by 백암산 at 2009/09/30 11:10
진천에서 중학교학생 100명을 전투에 투입했다는 것은 전혀 근거없는 이야기로 밝혀져 그 비석은 이미 20 여년 전에 해체되었습니다. 누군가 공명심을 끼워 올리고자 만든 이야기로 상식적으로 보아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일본에서의 의용군도 고지마 노보루의 책에는 확실하게 재일학도의용군이라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당시 일본인 의용군은 있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미군으로부터 용역계약을 받은 구일본군출신들의 소해정이나 수송선등은 한국전쟁시 활약을 했습니다.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9/09/30 14:38
이네스//뭐어 F--

백암산//에, 거짓말입니까? 비석 사진까지 있어서 정말인 줄 알았습니다. 이건 뭐....-_-;;
일본 의용군 이야기는 뭐 소문이 잘못 퍼졌을 수 있으니 저도 그러려니 하는 중입니다.
Commented by 나인원 at 2009/09/30 19:19
뭐... 일본에서 의용병 출동했다니까 미소를 지어?

제일학도호국 청소년들의 활약상과 완벽히 겹치니까 이거 뭐... 답이 안나옵니다. 아이고....

PS: 거짓말 않고 일본에서 소해정들이 출동하여 미군의 지휘하에 소해작전 (바다의 기뢰 제거작전)에 투입되었으니 김장군의 생각은 전혀 틀려먹은 것은 아니군요 OTL....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9/09/30 22:17
뭐, 몇 가지 사항들이 와전되었을 수도 있지만 한숨나오는 면이 있는 건 어쩔 수 없죠.
Commented by hektor at 2009/10/03 02:32
잘 읽고 갑니다.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9/10/03 08:51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at 2010/05/10 23:09
내가들은 김석원은 매우 용맹하고 저돌적이라서 괴뢰군도 절절맷다이고 작전상 후퇴가없어 희생이 너무많앗다이며 그래서 미군의 반대로 강퇴당햇다는, 그리고는 화약공장차려서 잘벌고 잘살앗다는데 내말 맞나요? 그기업이 오늘날 어느회산가요? 뭐 화약공장이락하더만서도,
Commented by Dr.Nam at 2010/06/05 12:11
슈타인호프님 블로그에 오래간멘에 들리네요^^ 항상 좋은 글을 읽고 갑니다..ㅎㅎㅎ
이번에는 김석원 장군에 대한 글이 올라와 있네요.
제 사견을 서술해도 될까요? ^^

김석원 장군의 출신은 뭐 모두 아시다시피 일본육사 27기생이죠. 홍사익, 이응준, 지대형(이청천) 등으로 유명한 26기와 함께 구 한국유년학교에 재학중 경술국치로 인해 일본 육사로 진학하게 되는 비운의 기수. 그 과정상의 동기나 이유가 어쨋건 그들은 일본군 장교로 임관을 하게 되죠.
그들중 한국군에 큰 영향을 주는 장교는 2명인데...모두들 아시다시피 한국군 창설에 깊은 영향을 주는 이응준 일군대좌와 김석원 일군대좌 입니다.
두 명의 일군 대좌가 개인적으로 한국 동포들을 위해 힘을 썼다거나 교육을 위해 힘을 쓴 미담이 있긴 합니다만... 일본군에서 고위 장교로 복무한 사실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칭찬 받을 일은 아닙니다. 분명히...
독립운동가인 이갑선생 (물론 이분도 일본육사 15기, 구 한국군)의 사위이고 이러한 인연으로 유동열 장군(일본육사 15기, 임정 참모총장)이 통위부장으로 오면서 이응준 대좌를 설득했다죠.... (이응준의 회고90년에서...)
암튼 청도전투나 초창기 전투를 참전한 것 외에 주로 행정분야의 길을 걸었던 이응준과는 달리 김석원은 전형적인 일본 야전군으로 성장합니다.
소령까지는 진급이 다소 늦었으나 이후에는 대령까지 승승장구를 하게 되는데 무공때문이죠. 특히 중일전쟁에서 중국군 1개 사단을 1개 대대로 섬멸했다는 얘기는 종군기자가 죽어가면서 날린 호외로 더욱 유명해졌고, 이로 인해 "금지훈장" 을 받아 더욱 유명... 대대급부터 지휘관 이름을 붙였던 일본군에서 "김 대대" 또는 "김 부대"로 불리기까지 하죠.
동 시대에 중국군의 김홍일 대령이 만가령전투에서 중국군 102사단장(대리)으로 일군 106사단을 섬멸하여 소장으로 승진하고, 상고회전에서 중국군 19사단장으로 일군34사단을 섬멸하며서 대 항일 전선에 있던 것과는 자뭇 다른 행보라 할 수 있죠.

암튼 그 와중에 성남중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에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던 것은 같습니다.

그의 아들인 김영수도 일본육사 56기(? 부정확_기억에 의존하고 있어서..ㅎㅎ) 로 복무하다가 남방군도에서 전사하죠.

광복 후 정부수립 이전에 일본 육사출신들 모임을 이끄는 등 활동을 하지만 정작 일선에 나오지 않다가.... 주위의 설득(?)에 의거 육사8특으로 대령 임관을 하죠.
그리고 육군 1사단장으로 나가게 되는데...

배경 설명이 너무 길었군요....(다들 아시는 내용일텐데..ㅎㅎ)


Commented by Dr.Nam at 2010/06/05 12:48
명태사건의 경우 분명 적국과 교역한 수뇌부가 잘못됐다고 생각됩니다. 압수한 명태를 부식으로 지급하고 정작 본인은 먹지 않았다는 후일담이 있는 걸보면
겉으로는 명태사건이 전부이지만 육사 49기후배인 채병덕과의 일종의 알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정치장교인 채병덕을 순수 완전 야전군인인 김석원이 보기에는 좋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암튼 명태사건으로 물러났다가 한국군 개전과 동시에 다시 현역으로 복귀하는데.... 당시 전국시대 같았던 한국군의 실정에서...많은 수의 장교들이 그의 휘하로 모여들게되죠.
개인적으로 한국전에 일등상사로 참전하셨던 돌아가신 조부님께 들은 바에 의하면 한국전 당시 김 장군의 위명은 엄청났다고 합니다.
물론 고무사를 연상시키는 전술을 떠나서.... 부하들을 휘어잡는 카리스마와 지휘능력은 뛰어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실례로 총탄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사단장이 고개를 뻗뻗하게 치켜들고 고래고래 소리지르면서 지휘하는 것은 상식상 불가능하죠. 현재 교리상 말도 안되는 것이지만... 전장에서는 말도 안되는 모습이 병사들을 사로잡는 것은 분명합니다. 아마 이러한 1차대전 이전의 지휘스타일 (꼭 일본군이라서 아니라...)이 이미 현대전 교리로 전환되어 있던 미군 고문관의 관점에서는 말도 안되는 지휘방식으로 보였을 것이고 그게 낙마한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채명신 장군의 회고에 의하면 이런 일화도 있다죠...
개성 지구 전투중 격려차 나온 사단장 김 대령에게 전투 전황을 보고하고 고지와 무전 교신을 하는 모습을 본 김 대령 왈
"야 꾀꼬리(호출명)가 도대체 뭐냐?" " 무전 교신 입니다" "싸움은 그렇게 하는 게 아냐. 부관 일본도 가져와"
그리고는 일본도를 높이 쳐 들고 왈 "대대 포는 적 토치카를 쳐라" 라고 송악산 너머까지 울리게 쩌렁쩌렁 외쳤다죠...

음... 제가 봐도 물론 완전 구식 지휘 방식이긴 합니다만 야전에는 먹힙니다. 이것은 지금도 그러하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사단급 전술을 운용해야 할 장수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솔직히 그렇지만...
적에 주눅이 들어있고 불리한 정황에서 최고 지휘관의 저런 패기(?) 있는 모습을 보면 바로 올라가는게 사기 입니다.
아울러 그의 명성이 덧대어서 더욱 빛을 발했겠죠...
여하튼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는 그의 지휘방식이라 생각됩니다.

안동철수작전의 경우 공간사를 보면 미군 고문관과 한국군 1군단 사이의 의견 충돌이 크게 발생했고... 철수를 반대하는 1군단장 김홍일과 철수를 강권하는 미 군사고문단. 그리고 작전명령을 전달함에 있어 전령을 활용하여 작전개시보다 수 시간이후에 전달되는 불상사까지....
김장군의 고집이 준 영향은 시간 선후를 판단해야 할듯
이로 인해 수도, 8사단이 필요치 않은 손실을 입게 되죠... (이부분은 육본 '영천대회전'의 안동철수작전 참조)
음... 김홍일, 김석원 양 장군이 안동철수를 반대했던 이유가 무엇일지 고찰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포항전투의 경우 유 모씨가 쓴 글은 완전 허위임에도... 널리 알려져 비판의 주제로 다뤄지긴 하는데 이 부분은 좀 바로잡혀야 할 것 같고....

여하튼 제 결론은...

1. 일본군 전력은 용서 받을 수 없는 사실임 (이유 여하를 막론해서 일군 고급장교의 전력은 부끄러운 것임)

2. 성남중학교를 건립한 교육자로서의 자세는 존경받을만 함

3. 그의 전기전략전술은 분명 한 세대 뒤진 교리였음

4. 당대 한국군 지휘부에서 청년 장교들 한테 존경과 신망을 받았던 위엄있는 장군임은 분명함

5. 복귀 명령이 없었음에도 시흥사를 찾아가 임관을 하려한 사실도 존경받을만 함

6. 일본군 시절의 아우라가 너무 센 탓에 좀 강한 비판을 받는 것 같음


ㅋㅋㅋ
담엔 유재흥 장군을 다뤄보시는 것은 어떤지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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