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으로 족한 것을 비난하지 말자. "따뜻한 말은 생명의 나무가 되고 가시 돋친 말은 마음을 상하게 한다."(잠언, 15장 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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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문제 - 봉금지대는 어떻게 해체되었고 조선인들은 어떻게 건너갔는가?
미리 드리는 양해의 말씀.
* 당 포스팅에 기재된 각종 문서의 번역 및 자료 인용은 별도로 표기하지 않은 경우 <현대한국사 vol.3 - 민족의 저항(1905~1910), 편집부, 신구문화사, 1973>에 실린 내용에 의합니다. 예전에는 1969년판이었는데 교체했습니다만, 내용은 같습니다.
* 당 포스팅에 실린 각종 번역문은 작성 당시에 한문으로 작성된 원본 그대로의 내용이 아닐 수 있습니다. 전재 원본인 현대한국사 본문에서 "추려보면 대강 다음과 같다"고 적은 부분이 있으므로 그 점 감안해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 본문에서 인용한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은 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에서 제공하는 것입니다.
* 색깔 및 일부 굵은 글씨로 강조한 부분은 본 필자의 선택에 의한 것입니다.
* 간도 문제에 대한 필자의 다른 포스팅을 읽으실 분은 포스팅 하단 태그의 "간도"를 눌러주세요.


저도 얼마전까지 그랬지만, 많은 분들이 봉금지대가 청나라 초기부터 설치되어 만주가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쭉 방치된 것으로 생각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소동 때문에 책을 찾다 보니 봉금지대의 설치는 의외로 늦게 시작되었고 해체도 생각보다 빨리 시작했더군요. 간략하게나마 한번 훑어보겠습니다. 사실 시간상으로 따지면 이 포스팅이 정계비 설치에 이어 두 번째였어야 하는 셈이군요.



1. 봉금지대의 설치와 와해

청나라는 창립 초기부터 만주에 한족이 거주하는 것을 금지시키지는 않았습니다. 아직 명나라와 맞서던 건국 초기에는 명나라에 맞설 생산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명의 통치를 벗어나 청의 품을 찾아드는 한족을 환영했고, 대륙을 정복한 직후에도 남만주 지역의 경제력 복구를 위하여 한족의 이주에 별다른 제한을 두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목적이 어느 정도 달성된 후에는 너무 많은 한족의 유입으로 여진족, 즉 만주족의 기득권이 위협받는다고 느끼게 되자 강희제의 명령으로 한족의 만주 이주를 제한하게 되지요.

1740년, 1차적으로 봉천부에 이주하여 사는 한족에 대하여 원래의 본적지로 돌아가라는 회적령이 내려집니다. 그리고 차츰 범위를 넓혀 가다가 1750년에는 최후의 금령을 내려 영고탑 및 길림 지역으로의 한족 이주를 금지합니다. 하지만 이것도 완벽한 이주 금지라고 할 수는 없었던 것이, 한족이라 해도 만주족 기인(旗人)들이 가진 토지를 소작(기인이 직접 농사를 지을 수 없으므로)하거나 황무지를 새로이 개간하는 행위는 허락이 되고 있었다고 하네요. 당연히 한족의 이주는 계속되었고, 청조에서는 결국 금주/산해관 등지에 관소를 설치하여 한족 이민을 받습니다.


청대의 유조변을 나타낸 지도. 서쪽 끝에 산해관이 있고, 만주를 성경과 영고탑으로 분할하고 있다.
(사진출처 : http://blog.joins.com/usr/x/i/xiaokang/10/청대만주.jpg)


* 유조변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초록불님의 유조변이 국경?을 참고해 주세요.


하지만 그 뒤로도 중국 한인의 이주가 이어지고 이를 도저히 막을 수가 없자 청나라 조정은 만주를 한 조각 한 조각씩 개방하기 시작합니다. 1799년에는 직례/산동 한인의 이주가 최고조에 달해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으므로 장춘-흥안 방면의 한 구역을 떼어 한인의 민간 경작을 허용하고, 장춘보(堡)에 이사통판 한 명을 두어 유민을 감독하게 합니다. 여기서 또 불과 2년이 지난 1801년에는 직례성(북경 인근 지방을 의미)에 대규모 흉년이 드는 바람에 직례/산동인에 한해서 봉천성으로의 이주를 허용했고, 다시 2년이 지난 뒤 1803년에는 전국적인 흉년으로 인해 만주로 밀려드는 유민의 물결을 도저히 통제할 수 없게 됩니다. 당시 청나라 조정은 남부 지방을 휩쓰는 백련교의 난을 진압해야 하는 막대한 과제를 떠안고 있어 유민 문제 따위에 전념할 상황이 아니었거든요.

게다가 이 때쯤이 되면 러시아의 위협이 점점 현실화되고 있었습니다. 러시아의 침입을 막는다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면 변경의 인구를 늘려야 했고, 당연히 봉금정책을 유지할 수 없었지요. 때문에 청 조정은 사실상 19세기 중반에는 만주를 완전히 개방하게 됩니다. 1860년에는 흑룡강 장군 진흠이 100만여 상(1상은 1천~2천 평에 해당한답니다)의 토지를 개방, 산동에서 이민자를 불러들여 개간하게 할 정도였습니다. 1867년에는 길림에서 50만 묘의 토지가, 1869년에는 성경장군의 관리하에 있는 지역에서 180만 3천묘의 토지가 개방됩니다. 단 만주 기인을 보호하기 위하여 길림의 납립하 유역, 길림의 양식목하, 대준하(셋 다 河입니다) 방면에는 기인둔전을 설치(1812)하여 한족이 범할 수 없는 땅을 남겨두었지만, 잘 유지되었을지는...F-_-
게다가 미개방지라 해도 사금채취가 성황을 이루면서 금을 캐기 위해 몰래 잠입하는 자도 있었고, 남아있는 관문도 많은 수가 폐허화되어 제대로 순찰이 이루어지지 않으니 점차 땅을 개간하는 자나 산삼을 캐러 오는 자들이 들끓게 됩니다. 겨울이 되어 관문을 지키는 관리가 철수하면 아예 산에 터를 잡고 벌목을 하여 재목을 물에 띄워 보내고 눌러앉아 농사를 짓는 자들도 연이어 생겨났고요.

이런 식의 개방은 당연히 인구의 대량유입을 불러왔고 이들 중에는 조선과 가까운 압록강 대안에 거주하려는 자도 적지 않았죠. 조선 조정은 양국간에 무인지대로 두기로 합의한 바 있는 압록강 북안에 거주자가 발견되면 청나라 조정에 통보하여 이들을 추방했습니다. 물론 조선 관리들이 먼저 청나라 유민들에게 "여기는 중립지역"이라면서 나가라고 했지만 이 유민들이 "우리는 황제의 허락을 받았다"느니 청나라 장군의 허락을 받았다느니 하면서 뻗대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결국 중앙정부에 통보해야 했던 거죠.

1842년, 조선 정부는 압록강 상류의 상토진-만포진 대안에 청나라 사람들이 집을 짓고 경작하는 것을 발견함에 따라 청나라 정부에 이를 알립니다. 조선 측의 항의와 철거 요구를 받은 청나라 정부는 봉천장군에게 명하여 이를 철거시키게 했고, 이후로는 매년 봄/가을에 두 나라에서 각각 위원을 파견하여 두도구에서 이 문제에 대해 논의하자는 회답을 보내옵니다(실제 회담이 이어졌는지의 여부는 모르겠습니다). 이때 압록강 북안 지구에서 철거된 청나라 사람들의 와책(窩柵)이 28개처, 초방(草房)이 98간, 경작한 밭의 면적이 3,300여 묘(중국의 1묘는 243㎡)에 달했다고 하죠.

하지만 간도로 넘어가는 조선인들이 그랬듯, 이 지역으로 들어오는 청나라 유민들의 이주도 정부가 금지한다고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1842년의 첫 "일제단속" 이후로도 이주는 계속되었고, 1846년에도 강계-상토진 등 무려 40여개소에 청나라 유민들이 들어와 자리를 잡은 것을 발견한 조선 조정이 청나라 중앙정부에 항의하여 이들을 몰아내기도 합니다. 조선 정부의 철회 요구를 받은 청나라 조정이 압록강 연변을 토색한 결과, 초방 65개처 및 유민 28명, 벌목인 220명이 걸려들었다고 합니다. 이 4년 동안 적발된 총 사건수를 모두 합하면 잠입한 유민이 300여 명, 와책과 초간(둘 다 오두막집으로 보면 됨)이 200여 개처, 개간한 밭이 500여 묘, 벌목은 12,000여 건에 달했지만 끝까지 불법 이주가 근절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질문 : 조선이 압록강 너머 만주 땅을 영토로서 관리했다면, 왜 금지구역에 거주하는 청나라 유민들을 직접 몰아내지 못하고 청나라 중앙정부에까지 호소해야 했을까요?


자 여러분, 아무리 불법으로 간주해서 처벌해도 도저히 근절할 수 없는 행위를 법적으로 해결하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물론 단속을 엄중히 해서 근절하려고 시도할 수도 있지만, 사실 아주 간단하고 돈도 벌리는 방법이 있어요.


법을 고쳐서 "합법"으로 만들면 됩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대마초(마리화나)와 매춘이죠. 우리나라에서는 그렇지 않지만 구미권에서는 나라에 따라 이것들을 합법화한 사례가 꽤 됩니다. "아무리 억제해도 근절이 불가능하고 허용했을 경우의 폐해도 그렇게 크지는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풀어줘 버린 다음 세금을 걷는 거죠. 자, 그 문제를 여기 적용하면?

한족 이민에게 만주를 개방한다.


는 결론이 나오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 되는 거죠. 청나라는 결국 1876년, 길림장군으로 하여금 길림에 특별히 간무국(墾務局)을 설치하게 하여 청조의 발상지라 하여 특별히 보호한 금산위장(禁山圍場, 백두산 일대)을 제외한 만주 전역을 개방합니다. 위에서 말했듯이 흑룡강성 일대는 이미 개방되었으므로 길림 일대의 개방은 만주 최후의 유보지를 열어젖뜨린 격이었어요.
그리고 최후의 봉금지였던 금산위장조차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자 불과 5년 뒤인 1881년 7월에 개방, 이해 9월에는 토문강 동북방의 개간도 허락하고 이를 관리할 관청으로 초간국(招墾局)을 혼춘에 설치합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길림 동남부, 간도 일대에 조선인들이 대규모로 들어와 농사를 짓고 있다는 사실이 처음 청나라 정부에 알려지게 되지요.


혼춘이 어딘지 보이시죠?



2. 조선인의 월경 거주

한편 조선인들이 국경 너머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청나라 측이 처음 인지한 것은 1869년 8월로 거슬러올라갑니다. 다만 이것은 중국땅이 아니라 러시아 땅에 살고 있는 조선인들을 발견한 것이었죠. 혼춘협령이 "비적행위를 하는 청나라 백성들에 대해서" 러시아 코미사르와 회담하라는 길림장군의 명령을 받고 러시아령 연해주의 포세트로 가는 길에 포세트에 이미 1천 호에 달하는 조선인 부락이 형성되어 있음을 발견하거든요.
돌아온 혼춘협령으로부터 이 보고를 받은 길림장군은 그냥 넘길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북경에 보고했고, 북경의 중앙정부는 "혼춘 협령을 시켜 재러한인의 송환을 교섭"하라는 명령을 내림과 함께 조선에 대해서는 "유민을 송환하고, 변민의 도망에 대해 심히 경고하라"는 지시를 내립니다. 이 사건이 청나라 정부가 월경한 조선인에 대해 관심을 가진 첫 계기에요.
(공식 기록에 의하면 1863년부터 한인의 연해주 이주가 시작된 것으로 알려짐)

하지만 청나라의 "첫 관심"은 의외로 싱겁게 끝나버렸습니다. 다음해 9월 포세트에서 혼춘 도통과 대면한 코미사르는 조선 유민을 송환할 뜻이 없다는 태도를 공공연히 비쳤거든요. 러시아 측의 반응은 일면 당연한 것이, 조선인들을 정착시키기 위해 토지를 주었을 뿐 아니라 수확할 때까지의 생계를 위한 대량의 식량까지 제공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러시아 측은 극동의 개발을 위해 주민을 필요로 했고, 가급적 많은 조선인이 이주해 오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중국인이 늘어나는 것은 훗날 분쟁의 소지가 될 수 있으므로 곤란하지만 조선인은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조선은 국민의 출국 자체를 금지하고 있는 나라이므로 모국과 연계할 리가 없다는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였죠.

때문에 러시아 측은 혼춘 도통에게 "계속 한인의 송환을 요구하면 선제공한 식량에 대한 배상을 청구하겠다"고 협박(?)했습니다. 한편 유민 송환 통보를 받은 조선 지방관 쪽에서도 월경민들이 어느 한 고을 출신이 아닌데다 중앙의 지시가 없다는 이유로 시큰둥한 태도로 나왔으므로(러시아에 지불할 배상금이 아까워서가 아닐까요-_-), 청나라 관헌들은 이 문제에 더 이상 개입할 필요가 없겠다고 생각하고 손을 떼기로 했습니다.

일단 한 가지 문제에서 손을 떼게 되자, 길림장군의 머리 속에는 자연스레 다른 고민이 생겼습니다.

"조선인들이 러시아 국경을 넘었다면, 우리 국경은 넘지 않았을까?"

이에 길림장군은 영고탑 부도통에게 명하여 영고탑, 혼춘 지방의 조선 이주민 실태를 조사하도록 했습니다. 그 결과 상당수의 조선 유민이 이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들은 함경도 지방의 흉년 때문에 굶주림을 못 이겨 고향을 떠난 가련한 처지임을 알게 되었죠. 이들이 밀무역이라든가 기타 등등 무슨 악의가 있어서 국경을 넘은 것은 아니라는 점을 확인하자 청나라 관헌들도 이들을 밀입국의 죄로 처벌하려 하지 않고 본 그대로를 상부에 보고, 길림장군도 유화적으로 사태를 처리하기로 합니다. "조선의 경원, 회령 부사에게 조회문을 보내어 조선 관리와 함께 합동으로 유민을 수사, 송환하고 본래 살던 땅에 잘 정착할 수 있도록 돌보아 주라"고 다시 영고탑 부도통에게 명을 내린 것이었죠.

이번에는 조선도 청나라와의 교섭에 응합니다(청나라 쪽에는 돈 안 줘도 되니까가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이 계속...-_-). 1871년 3월 6일, 조선 조정은 경원진 (慶源鎭乾原權管) 김광우(金光雨)를 도민영회차사원(逃民領回差使員), 행영전가의(行營前嘉義) 황계현(黃繼賢, 1871년 7월 19일자 실록에는 동관 첨사(潼關僉使)로 기재)을 별정군관(別定軍官)으로 임명하여 경원을 떠나 혼춘으로 가게하지요. 이들은 수백 명의 유민을 인수받아 돌아오지만 도중에 죽거나 도망친 자가 상당수였습니다. 조정에서는 돌아온 이들에게 양식과 의복을 나누어주고 밀린 빚과 세금을 탕감해 주었으며 다른 사람 손으로 넘어간 토지까지 되찾아 주었고요.

* 511명/454명은 <현대한국사>의 수치에 의한 것입니다만, 여기에는 좀 의문의 여지가 있더군요. <고종실록> 1871년 7월 19일자 기사를 보면 "국경을 넘어간 109명을 데려오다가 그중 71명이 도망쳤다"고 했으며, 국사편찬위원회 간 <고종시대사 1집>의 같은 날 기사를 보면 "454명을 데려오다가 71명이 도망갔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수치상으로는 다소 오차가 있을지언정 최소 수백 명이 소환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조선 조정에서는 앞으로 이런 사태가 재발하지 않으려면 변민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갱생의 길을 열어주는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휼민에 나름 힘쓰기는 하지만, 워낙 개판인 나라 사정상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었습니다. 두만강을 넘어서 삶의 길을 찾는 월경민의 대열은 그 뒤로도 끝없이 이어졌고 찔끔찔끔 쇄환하는 정도로는 월경민이 줄기는 커녕 늘어날 뿐이었습니다. 이에 조선 관리들도 결국 어쩔 수 없이 중국 관리들과 똑같은 해결책을 쓰기로 하지요.


법을 고쳐서 월경을 허가하고 지권을 발급하여 세금을 걷습니다^^


월강봉금령이 정식으로 철폐된 것은 1883년으로, 서북경략사 어윤중에 의해 행해진 조치였습니다. 이후 본격적으로 조선인들의 간도 이주가 이루어지며, 두만강 좌안에 면한 토지는 거의 한국인만 거주하는 땅이 될 정도였습니다. 북간도 지역에는 이로써 행정구획이 수립되고, 오늘날 "조선이 간도에 영토권을 행사했다"고 주장하는 주요한 근거가 됩니다.

* 서간도 지역은 1871년에 처음 28면이 설치되고, 1889년에 24면으로 개편합니다. 향약도 설치하지만 1909년 간도협약의 체결과 함께 집안현 지사에 의해 향약소가 폐지되고 그 소유재산은 압수되었습니다. 한국인의 자치권은 인정받습니다.

이후 간도 거주민의 쇄환 문제와 영토권 문제로 인한 다툼은 청나라 측의 강제귀화 및 송환 시도와 두 차례의 감계회담으로 이어집니다. 그 부분은 이미 앞에서 익히 다루었으니 새삼 쓸 필요는 없겠죠?^^



참고자료 :
간도는 조선땅이다 - 백두산정계비와 국경 : 전 경성제대총장 시노다 지사쿠의 30년 연구 · 조선국 대표 이중하의 국경담판실록, 시노다 지사쿠, 지선당, 2005
잊혀진 땅 - 간도와 연해주, 이윤기, 화산문화, 2005
현대한국사 vol.3 - 민족의 저항(1905~1910), 편집부, 신구문화사, 1973

위키피디아(중, 번체) - 延吉市

by 슈타인호프 | 2009/09/15 17:44 | 한국근대(~1910) | 트랙백 | 핑백(1) | 덧글(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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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고 작성한 것이니 놓친 부분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추가] 간도 문제에 대해서는 슈타인호프님의 아래 포스팅을 보시면 좋습니다. http://nestofpnix.egloos.com/4235131 [클릭] http://nestofpnix.egloos.com/4233539 [클릭] ... more

Commented by 쿠라사다 at 2009/09/15 17:52
근절할 수 없으면 결국 합법화해서 관리하는 쪽으로......
과연 과연... 불가능한 대책을 계속 고수하면 골머리만
아플 뿐이지만 지금 저 사례가 후세에 엉뚱한 논란의
불씨가 되리라고는 당시 관료들은 꿈에도 몰랐을 것
같습니다. ;;
Commented by Allenait at 2009/09/15 18:17
어쩔 수 없이 택한 것이겠지만 결국 후세의 불씨가 될 줄이야..(..)

그나저나 자동검색에 아직도 그런 류의 포스팅이 걸리는군요
Commented by 아빠늑대 at 2009/09/15 19:13
확실한 사실!!!

"세금은 언제 어느때라도 걷어 간다!!!" 아... 공포입니다 OTL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9/09/15 19:39
쿠라사다//몰랐겠지요(...)

Allenait//뭐 그쪽이 숫자는 더 많지 않겠습니까.

아빠늑대//스칼렛 아가씨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죽음과 세금과 출산! 이것만은 절대 반가울 때가 없어!"
Commented by 을파소 at 2009/09/15 19:47
여기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질문에 대한 답: 조선은 만주까지 영토가 뻗었지만 골수까지 사대주의 국가라서 그렇습니다. (밟힌다)
Commented by rumic71 at 2009/09/15 20:14
북한도 저렇게 하는 날이 올까요?
Commented by 들꽃향기 at 2009/09/15 20:36
결국 지계발급이란 자신의 땅을 확인하기 위함보다는 세금을 걷기위한 즉각적인 조치였을 뿐이었죠. -.-

특히 당시 대한제국이 내장원 재정의 확대로 공적 세수가 쪼들려가던 상황에선 뭔듯 못하겠습니까...(묵념)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9/09/15 20:43
을파소//오오 그렇군요.

rumic71//안 오기를 빌고 있습니다. 어쩌면 일부는 이미 10여 년 전부터 현실화됐다고 볼 수도 있겠죠.

들꽃향기//세금은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국가기구의 의이는 결국 세금을 걷기 위한 것...
Commented by 테일즈오브베스페리아 at 2009/09/15 21:17
조선왕조실록 등 사료를 가지고 설명해도 간빠들은
"조작되었다","사대주의에 쩔어있는 조선왕조가 다 왜곡한거다, 광개토대왕릉비를 중국것이라고 한 놈들인데 그걸 믿냐?(실제 이런놈이 있었습니다)"라고 하면서 자료들고온 사람을 바보로 만들듯 하네요....................................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9/09/15 21:40
초록불님도 하신 이야기지만, 토론은 "구경하는 사람"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겁니다. 상대편들은 설득 불가능이죠.
Commented by Allenait at 2009/09/15 22:18
세금 이야기 하니까 생각나는게.. 공자의 일화였나 그럴 겁니다. 세금은 호랑이보다 무섭다고(..)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9/09/15 22:24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지요^^
Commented by 쇼어 at 2009/09/15 22:25
영토분쟁관련해 오늘 tv에서 제7광구에 대한 방송이 나오더군요. 사실 처음 들어보는거라 신선했습니다. 얼핏 본 감상으론 바다속 대륙붕을 어디까지 영토인정이 되나 하는 문제같은데 잘은 모르겠지만 한국이 발리는듯한 느낌이..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9/09/15 23:49
그쪽은 저도 잘 모르겠네요.
Commented by rumic71 at 2009/09/16 00:09
제7광구는 박통시절부터 있던 것인데...
Commented by Wellesely at 2009/09/15 23:49
세금은 진리입니다......... 하하;;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9/09/15 23:50
세금은 진리죠 ㅋㅋ
Commented by 드라큘라 백작 at 2010/03/09 21:39
한가지 질문이 있는데요, 도대체 간도는 원래 조선땅이며 이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해야한다는 식의 그런 논리가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그렇게 퍼지기 시작한건지 알고 싶습니다 광복직후부터 1950년대 까지는 정부수립이다 한국전쟁이다 4.19 혁명이다 하는 혼란기여서 그랬을거 같지는 않고 언제부터인가요??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10/03/09 21:47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90년대 초에는 이미 빼았긴 우리 땅이라는 이미지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때는 고구려, 발해이 옛 땅이라고만 했지 간도 협약은 별로 강조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확실히는 기억이 안 나네요. 100년 영유권 설은 대충 2000년 이후에 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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