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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전쟁 기록의 신뢰성 문제
일본의 적나라한 침략기 '의병진압기록'

연합뉴스 보도에 의하면, 토지공사 토지박물관이 1907년 7월부터 1909년 6월까지 만 2년 동안 한국에서 의병 진압에 종사한 일본군 보병 14연대의 부대일지를 공개했다고 합니다. "진중일지"라고 하면 부대일지란 이야긴데 이걸 "의병진압기록"이라고 몰아붙여서 기사 제목을 박는 건 좀 그렇군요. 뭐, 딱 그 기간이 의병 진압기간인 건 맞으니 크게 뭐라고 할 건 없겠지만. 따옴표도 붙였고 말이죠.

토지박물관이 어떻게 저런 기록을 입수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이 기사에서 등장한 일본군 보병 14연대는 상당히 유서깊은 부대입니다. 보병 26대대를 기간으로 하여 1875년에 고쿠라(小倉)에서 처음 편성되었고, 애초에는 구마모토 진대 소속이었으나 1888년에는 6사단, 1898년에는 12사단으로 전속되어 1907년에는 12사단 예하에 있었습니다. 이 연대는 주둔지가 북부 규슈니만큼 근대 일본이 벌인 전역에 대부분 참가했었죠. 아직 구마모토 진대 소속이던 1876년에는 아키즈키의 난(秋月の乱)과 하기의 난(萩の乱), 1877년에는 서남전쟁(西南戦争)의 진압에 참가했습니다.
규슈가 한반도와 가깝다 보니 대륙 출동도 상당히 잦은 편이어서, 1882년에는 조선의 임오군란 대처를 위해 출동하기도 했고 1894년에는 청일전쟁에도 참가했습니다. 1904년의 러일전쟁 참여는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그런데 일본어 위키의 14연대 항목에는 1907년의 한반도 출동 이야기는 없네요. 임오군란 때문에 출동한 것(실 전투가 없었던)도 기재했으면서 의병진압 작전을 빼버린 이유가 뭘까나.

* 14연대는 서남전쟁에서 반란군의 공격에 군기를 빼앗기고 도주하는 불명예를 겪기도 했습니다. 당시 14연대는 구마모토의 본영에 합류하라는 진대장 타니(谷) 소장의 명령을 받고 수개 제대로 나뉘어 고쿠라에서 구마모토성으로 이동하다가 미처 이동이 완료되지 않은 상태로 사이고 다카모리 휘하의 사쓰마 반군과 조우했거든요.
무사히 구마모토 성으로 들어간 것은 1제대인 1대대의 절반 뿐, 2제대였던 노기 마레스케 소좌(여순 공방전의 그 노기) 휘하의 3대대 주력 480명은 7월 22일 저녁에 400명의 사쓰마 군과 조우하여 벌인 야간전투에서 사쓰마군의 돌격에 대패, 군기를 잃고 퇴각합니다. 다음날에는 정부군(2대대가 합류)과 반란군 모두 지원군을 받아 1,200명씩의 병력으로 다시 전투를 벌이지만 또 사쓰마군의 돌격으로 완패하죠. 이때 연대기를 상실했습니다.
이후 1932년에는 제1차 상해사변에 투입, 그리고 1936년에는 만주로 전속되어 치안유지 임무를 맡습니다. 1941년에는 관동군 25사단으로 소속이 변경되어 계속 만주에 주둔합니다만 본토결전을 위해 1945년 4월에 다시 본토로 보내집니다. 그리고 미야자키 현에서 미군의 상륙에 대비한 방어진지를 구축하다가 종전을 맞지요.
그러고 보니 태평양전쟁 때 일본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스기야마 하지메(杉山元) 원수가 1906년 8월부터 대위로 14연대에서 대대부관을 맡고 있었군요. 스기야마는 1901년에 소위로 임관할 때부터 14연대에서 복무를 시작, 1907년 12월 10일에 육군대학에 입학하면서 잠시 연대를 떠납니다만, 참모본부 근무나 해외 주재무관 등 몇 가지 보직을 돌면서도 가끔씩 "고향 부대"로 돌아와 14연대 대대장 및 12사단장으로 복무했습니다.


1907년의 한국 출동 당시 연대장은 기쿠치 토노모(菊地主殿, 독음 맞나요?) 대좌(대령)로, 이해 2월 27일부터 1909년 11월 30일까지, 즉 출동 기간 내내 보직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위 기사에 인용한 일지의 일부 내용을 보면 재미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진압기록에 나타난 전투
"오후 1시 (문경) 대승사 동쪽 1천m에 있는 1030고지에 이르러 의병 한 무리가 적성으로 침입하는 것을 목격하고 적성 서쪽으로 나와 해당 시장 부근에서 식사를 하던 약 100명의 의병을 공격하니 적은 흩어졌고 이에 따라 동쪽 산기슭 등지에 있는 적에 대한 총검 돌격을 해 해당 지역을 점령함. 적은 골짜기를 경유해 681고지로부터 도곡 방향으로, 일부는 석곡 방향으로 어지러이 후퇴해 우리 병사들이 그들을 석곡으로 추격함. 이 전투에서 적의 사망자 중 발견된 이는 15명이고 부상자는 불명확하고 노획품은 화승총 4정, 깃발 1개, 탄환 약간임. 우리 측의 손해는 소비 탄약 382발. 적의 수괴는 이강년인데, 사망자 중에는 그를 찾지 못했고 적성은 전부 의병이 점령하고 있음"

이와 같이 1907년 9월15일 문경 부근의 전투보고에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은 의병장 이강년(李康秊.1858-1908)의 이름이 보인다.


위 기사의 9월 15일은 양력으로, 당시까지 한국(특히 민간)에서 많이 사용된 음력으로 바꾸면 8월 8일입니다. 그리고 저날 문경 적성에서 전투가 있었다는 기록은 우리측에도 있습니다. 바로 기사에서 언급한 운강 이강년의 의병투쟁기를 다룬 <운강선생창의일록(雲崗先生倡義日錄)>이죠. 이 책은 을미의병 시기부터 남긴 이강년 본인의 기록에 편자인 박정수, 강순희의 종군이를 붙여 간행한 것입니다만, 여기에 등장하는 9월 15일자(음력) 적성 전투에서의 쌍방 손실은 의병 부상자 수명, 일본군 전사자 36명입니다. 기사에 소개된 그나 전투에 대한 14연대 전투일지의 의병 사망자 15명 확인에 부상자 미상, 일본군 사상자 전무에 비하면 정말 엄청난 수치 차이인데, 그래도 후군장 "신태원"이 패했다고 적고 있기는 합니다.

이런 문제는 사실 허다합니다. 예전에 포스팅한 남대문 전투 이야기에서도 그랬지만, 많아야 전사/부상을 합쳐 42명 정도의 손실을 낸 일본군 피해에 대해 당시의 일부 한국측 기록은 일본군 300명 사살 운운하고 있었단 말이죠-_-

이런 점들을 감안하자면, 의병장들의 개인 기록을 바탕으로 한 양측의 전과 비교와 의병의 일본군 사살 수치는 전적으로 재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위 기사의 예를 볼 때, 의병 15명 사살이라는 일본군의 전과보고에는 과장이 들어갈 소지가 있어요. 고의건 오인에서건 전장 주변의 민간인이나 마을의 양민을 사살하고 그 시체를 계산했을 가능성이 제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을 주민을 의병 동조자로 간주하여 사살하고 그 숫자를 포함시켰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의병의 전과, 즉 사살한 일본군의 수는 운강선생창의일록의 수치가 과장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14연대 일지의 내용은 "사상한 장병의 성명, 계급은 물론이고 부상한 부위까지 정확하게" 적고 있을 정도로 자세하다는 것이 위 기사의 핵심인데 적성 전투에서 사상자가 있었다면 손해가 소비한 탄약 382발밖에 없을 리가 있습니까? 그리고 일본군이 36명이나 전사했다는 손해를 입었다 하면 의병이 엄청난 공을 세운 일인데 한국인인 기자가, 혹은 해당일자 기록의 발췌문을 보도자료로 제공한 토지공사 박물관 관계자가 그 부분을 빼놓고 기사를 작성할 리가...있을까요.....?

결론 : 기자나 관계자나 한국측에 "그날 그 전투"에서 의병이 36명이나 되는 일본군을 사살했다는 기록이 있음을 모르고 있다.

일본측 기록이 사상자를 축소하고 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만약 저 문서가 대외발표용 홍보문서라면 선전 목적에서 손해를 줄여 기재한 것으로 볼 수 있고, 타 기관이 기록한 내용이라면 잘못된 정보를 입수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어요. 하지만 저 문서는 바로 "해당부대의 자체기록"으로, 구라로 쓰는 게 거의 불가능합니다. 군대에서 부대일지 써보신 분들은 모두 기억하실 테지만, 아무리 부대일지를 구라로 채우더라도 인원 결손 문제는 절대 구라질을 못 합니다. 작전행동이나 교육훈련은 안 해놓고 했다고 기록할 수 있고 보급품은 모자라는 거 충분히 있다고 적을 수 있지만(빌려오거나 돌려막기로 대처), 없는 사람은 있다고 못 해요. 그딴 짓을 했다가는 "얘 불러와"했을 때 대책이 없습니다-_-

물론 의병전쟁에 대한 한국측 기록 자체가 전적으로 믿을 수 없는 허구 투성이는 아닙니다. 의병전쟁 자체는 분명히 존재했으며 가열찬 투쟁도 행해졌어요. 하지만 그 상세한 전투양상 및 양측의 손해에 있어서는 솔직한 검증이 필요합니다. 실제 당시 일본군의 "토벌 기록"을 보면 일본군 측은 전투에서 거의 사상자를 내고 있지 않아요. 의병 전사 20명에 일본군 부상 1명 식의 기록이 한둘이 아니거든요.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은, 한국에서 기록을 남긴 당사자들이 대개 역사 기록자가 아닌 선비로서, 자신이 보고 들은 것 그리고 경험한 것들만을 바탕으로 기록을 남긴 데다가 그 기록을 남긴 목적이 단순한 기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남긴 행록, 또는 행장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글쓴이가 남긴 업적을 후대에 전하는 것에 큰 의미를 두었고, 이는 임진왜란 시기에 작성된 수많은 행장기들을 보아도 입증됩니다. 의병을 일으켜 왜적 수천을 일거에 진멸하거나 이순신이 왜적을 섬멸할 수 있도록 신묘한 계책을 내놓았다는 수많은 선비들의 기록이 남아있다고 하지요. 그런데 그게 사실일까요?^^

혹시나 의병전쟁에 대한 한국측 기록은 쓰레기 같은 기록이니 전혀 믿을 수 없다...하고 부정하는 분이 나올까 해서 노파심에 말하지만(그래도 나올 것 같군요), 수치 면에서 신뢰성이 다소 떨어진다고 해서 의병전쟁 당시 한국인들이 남긴 기록을 모두 무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분명히 투쟁 자체는 존재했고, 이 행록들은 우리 편에서 그 사건들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판단할 수 있는 소중한 기록이니까요. 전투양상이라거나 양측의 피해에 대한 수치의 정확성이라는 점에서는 분명 교차검증이 필요하지만, 당시 한국인들이 의병투쟁에 대해 가진 관념이라거나 우리측의 준비, 일본군의 잔학행위 등에 대해서는 충분히 참고할 가치가 있습니다. 일부 문제가 있는 기록이라고 해서 전적으로 부정하고 버릴 필요는 없는 거죠. 필요한 부분만 적당히 참고하면 될 일입니다.



참고자료 :

독립운동사 교양총서 vol.02 - 한말 의병전쟁, 조동걸, 독립기념관, 1989
독립운동사 교양총서 vol.13 - 한말 의병장 열전, 윤병석, 독립기념관, 1991
민족전란사 vol.1 - 의병항쟁사,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84
일본 근대의 풍경, 유모토 고이치, 그린비, 2004
일본군사사, 후지모토 아키라, 시사일본어사, 1994
조선군사령부1910/1945, 古野直也, 1997, 대왕사
현대한국사 vol.3 - 민족의 저항(1905~1910), 편집부, 신구문화사, 1969

위키피디아(일) - 歩兵第14連隊
엔싸이버 백과 - 운강선생창의일록

http://www.h2.dion.ne.jp/~sws6225/zinbutu/sugiyama.html

by 슈타인호프 | 2009/08/11 13:54 | 한국현대(~20XX) | 트랙백(1) | 덧글(16)
트랙백 주소 : http://nestofpnix.egloos.com/tb/42087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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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슈타인호프의 홀로 꿈꾸.. at 2009/08/12 09:22

제목 : 진중일지 관련 두 번째 포스팅
의병전쟁 기록의 신뢰성 문제에 이은 연작 포스팅입니다. 기자를 좀 까야겠다 싶은 부분이 있어서 말이죠. "의병 숨겨준 마을 불태워라" 위 기사에서 제가 한 마디 하고 싶은 부분은 이런 내용입니다. '진중일지'가 다루는 시기는 대한제국 군대 해산에 반발해 구식 군인을 중심으로 한 의병이 무기를 들고 치열하게 항일운동을 했던 때로, 의병 활동은 일본군의 진압 작전에 밀려 1909년 이후 사실상 중단됐다. 심광주 토지박물관장은......more

Commented by 耿君 at 2009/08/11 13:57
기쿠치 도노모 맞습니다 ㅋㅋ
Commented by 뽀도르 at 2009/08/11 14:11
노획 무기를 보니 의병은 화승총으로 -_-; 1907년이라면 일본은 국산화한 5발 들이 후장식 38식 소총을 쓰고 있을 시점이겠네요. 그전 러일전쟁에선 기관총이 대활약했었고....
Commented by 초록불 at 2009/08/11 14:14
좋은 지적입니다. 기록이라는 건 대조해 볼 수 있는 한 대조해야죠.
Commented by 아브공군 at 2009/08/11 14:37
근데 이런 기록 미비나 신뢰성 문제를 가지고 '의병 활동은 대부분 거짓이었으며 대부분이 일본을 따랐다' 라고 나올 사람들이 생길 것 같다는게 무섭죠.

5.18때 시민군측 증언이 오류가 많다는 것을 들어서 '진압군의 잔악성을 높이려는 반정부 주의자들의 음모가 지금까지 이어져왔다'라고 하려는 것을 이미 이곳 이글루에서 지난 5월에 봤으니까요.
Commented by 네비아찌 at 2009/08/11 14:45
꼭 의병전쟁이 아니더라도, 역사 기록이란 건 교차검증이 가능하면 가능한대로 교차검증을 하는게 맞죠.
Commented by Matthias at 2009/08/11 14:51
이른바 춘추필법이라는 건가요? 의병장들의 그런 기록들 말이죠...
Commented by 自重自愛 at 2009/08/11 15:25
아, 노기의 깃발 상실 건은 들은 기억이..... 노기가 하도 고문관(?) 장교인지라 노기 휘하 장병들은 상급자가 노기라는 것을 알기만 하면 이제 우린 죽었다며 울고불고 했다던데..... -o-;;;;
Commented by 라라 at 2009/08/11 17:54
흠 노기각 고문관 장교였나요 그래서 러안전쟁에서 그런 돌격을..했구나
Commented by 이준님 at 2009/08/11 18:09
저런 논리로 청산리 전투를 설명하는 연구도 있습니다. -사실 일본 연대장 손수 사살+ 3천 3백명 완전 전멸크리는 이범석의 회고록에"만" 나오는 이야기니까요. 청산리에서 벌어진 일에 대한 일본 내부문서가 오래전에 신동아인지 월간중앙인지에서 공개된바 있는데 3천 3백명정도는 아니고 독립군은 체코제 무기+덤덤탄 사용 의혹도 지적했다고 하더군요.
Commented by Alias at 2009/08/11 18:10
사실 일본서기 같은 것도 상당 부분 참고할 부분은 있게 마련이고, 김영삼 회고록이나 김일성 회고록조차도 교차검증해볼 소스의 가치는 있게 마련인데, 어떤 특정자료를 맹신하거나 혹은 특정자료는 다틀렸다 식으로 나가는 경우가 흔해서 문제입니다...

Commented by Allenait at 2009/08/11 18:13
역시 교차검증이 필요하군요.
Commented by rumic71 at 2009/08/11 18:21
2차대전 때 독일과 영국의 기록도 서로 엇갈리는 경우가 허다했지요.
Commented by 계원필경Mk-2™ at 2009/08/11 18:42
사실 좀 더 나가면 "패배자의 역사" 운운 댈지 몰라서 좀 걱정이 되긴 합니다...(비교와 증거 확보는 언제나 필수!)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9/08/11 20:19
耿君//앗 다행이군요. 사실 기쿠치라는 성은 본 적이 있는데 이름 쪽 독음을 몰라서 번역기를 돌린 터라^^;;

뽀도르//일본군도 38식이 다 배치가 안 됐을 때죠. 의병들은 1909년쯤 되면 대체로 서양식 총기로 무장을 완료합니다.

초록불//당연한 말씀입니다. 잊지 말아야죠.

아브공군//그 주장 내세우는 사람들도 나름 증거는 있으니까요. 문제라면 그 증거의 수준이 양쪽 진영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가 하는 점.

네비아찌//동감입니다.

Matthias//글쎄요 F--

自重自愛//뭐 그럭저럭 평균은 되는 지휘관이라고 들었던 것 같습니다.

라라//그 때는 사실 그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이준님//일본 쪽 자료를 근거로 사상자 10여 명 설을 주장하는 분도 있더군요.

Alias//동감입니다. 꼭 하나 찍어서 다 옳다 다 그르다 이러는 분들은 좀....그래도 환단고기는 아니지 말입니다(...)

Allenait//언제나 필요합니다.

rumic71//죽은 줄 안 놈이 살아돌아갔다거나 등등.

계원필경Mk-2™//패배자의 과대망상 정도로 비웃는 분위기는 일본쪽에 이미 있는 것 같더군요.
Commented by 아텐보로 at 2009/08/11 22:31
본문과는 상관없는 내용이지만 종전직전에 본토에 배치되다니 운이 좋은부대로군요.
만주에 있다가 소련군에게 포로가 된 일본군들에 비한다면.....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9/08/11 22:46
네, 명색이 전쟁 전부터 존재하던 정예부대였으니 그 덕을 본 거죠. 만주에 남은 관동군이 껍데기 뿐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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