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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수원에서 벌어진 미군의 삽질과 바뀌어진 역사
한국전쟁이 터진지 1주일, 시흥지구전투사령관으로 임명된 한반도 최강의 역전의 노장 김홍일 장군의 지휘하에 한국군은 한강방어선을 고수하고 있었습니다. 한강 이북에서의 패전 충격으로 많은 병력과 장비를 상실하기는 했지만, 적 전차가 넘어오지 못하는 한강이라는 천연 장애물은 한국군에게 큰 도움이 되었지요. 또한 패잔병을 수습하여 재편성하면서 병력도 어느정도 정비가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도 한국군은 북한군보다 숫적으로 열세였고, 장비가 심각하게 부족했으며 독자적으로 적을 막아내고 실지를 회복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오직 미국의 지원만이 해결해 줄 수 있었죠.

미국으로서도 한국을 버릴 생각은 없었습니다. 지난번에 포스팅했듯이 미 해군과 공군은 이미 한국군을 지원하여 한반도 인근에서 작전을 시작하고 있었고, 지상에서는 처치 준장을 단장으로 하는 맥아더 원수 휘하의 ADCOM(Advaced Command, 전방지휘소)이 6월 27일부로 수원 농업시험장 내에 설치되어 한국군에 배속된 미군 고문관에 대한 지휘권 행사 및 한국군에 대한 여타 지원 문제를 협의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처음부터 서울이 아닌 수원에 자리한 것은 서울이 곧 함락될 거라는 무초 대사의 경고 때문이었죠.

수원에 자리를 잡은 처치 준장은 먼저 원활한 지원을 위하여 육군본부도 농업시험장으로 들어올 것을 권유합니다. 또한 영등포 일대에서 시가전을 벌이고 서울-수원까지의 선에 낙오병 수집소를 만들 것을 권유하는데 여기서만 장교 1천여 명에 사병 8천 명이 다시 수습되었다는군요. 설마, 한국군은 이런 걸 만들 생각도 안 한 건 아니겠죠? 이미 알고 있고, 시행하려던 사항에 대한 뻔한 조언....정도일 듯.

이때쯤에는 한국군에 대한 미군의 본격적인 지원이 시작됩니다. 해군과 공군의 작전 외에도 대량의 탄약(105mm 포탄 10만 5천발, 81mm 박격포탄 26만 5천발, 60mm 박격포탄 8만 9천발, 소총탄/기관총탄 248만발)과 야포(105mm)가 선편을 통해 부산으로 보내졌고, 대전차지뢰와 같이 전방에서 시급하게 필요한 일부 탄약류는 C-54 수송기를 이용한 항공수송으로 수원으로 곧바로 보내집니다. 6월 28일 하루 동안에만 119톤에 이르는 각종 탄약이 공수되었다고 하네요.

한편 미군 수뇌부는 탄약 지원만으로는 사태가 호전되지 않으며, 본격적인 미 지상군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합니다. 이에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24사단의 2개 대대를 선견대로 한국에 파병하기로 하죠. 24사단의 파견은 6월 30일자로 워싱턴의 승인을 받았고, 사단장 딘 소장은 그날 저녁에 일본 점령군인 8군 사령관 워커 중장으로부터

"보병 1개 중대, 중박격포(4.2인치?) 2개 소대, 75mm 무반동총 1개 소대로 지연부대를 편성하여 대대장 1명의 지휘하에 한국으로 공수하여 처치 준장 지휘하에 편입하고, 잔여병력은 가능한 신속히 선편으로 한국으로 보내라. 사단사령부는 항공편으로 부산으로 옮길 것이며, 딘 소장은 한국에 도착하는 즉시 전 미 지상군의 지휘권을 행사하라."

는 명령을 받습니다. 당시 3개 보병연대(19연대 벳부, 21연대 구마모토, 34연대 사세보) 를 보유하고 있던 딘 소장은 예하 병력 중 그래도 사기가 높고 군기가 양호한 21연대를 먼저 보내기로 했고, 연대장 스티븐스 대령은 6월 30일 저녁 10시 반에 1대대장인 스미스 중령(가엾게도 비상대기로 전날밤을 새고 9시에 퇴근해서 이제 좀 자려는)을 불러 A,D 2개 보병중대를 제외한 연대 전병력을 인솔하여 즉시 이다즈께 공군기지로 가라는 지시를 내립니다. 거기서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가라는 명령이었지요.

이에 스미스 중령은 03시에 주둔지를 출발, 08시 05분에 이다즈께 기지에 도착하여 사단장 딘 소장에게 신고를 한 후 장병들을 인솔하여 비행기에 탑승한 후 08시 45분에 한국으로 갑니다. 그런데 부산 수영비행장의 날씨가 좋지 않았던 때문에 6대의 수송기 중 1,2번기만 착륙할 수 있었고, 나머지 비행기들은 일단 일본으로 회항했다가 다시 돌아와서 10회에 걸친 착륙시도 끝에 13~14시(또는 14~15시)에 걸쳐서 착륙을 완료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한국군이 제공한 트럭을 타고 부산역으로 이동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원들은 22시에 출발하는 기차에 탑승, 다음날인 7월 2일 08시에 대전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리고 북쪽으로 가서 방어전 준비를 하죠.
한편, 후에 죽미령에서 이들과 함께 싸운 페리 중령의 52포병대대 A포대(105mm 곡사포 6문)는 비행기가 아니라 배를 타고 스미스 부대보다 하루 늦은 7월 2일에 부산에 도착하여 7월 3일 오후에 대전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인 7월 4일에 평택에서 스미스 부대와 합류하고, 7월 5일에는 죽미령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북한군과 첫 교전을 벌이게 됩니다.

이 앞에 지나간 이야기는 다들 아시는 이야기일 겁니다. 이게 왜 삽질이냐고 궁금해 하실 분들이 많으실 듯.

여기서 삽질인 부분은요, 애초에 스미스 부대는 부산이 아니라 수원으로 가게 되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 아래쪽 이야기는 정말 쪽팔리는 이야기라 별로 유명하지도 않지요.

6월 30일, 처치 준장은 한강에 나가 있는 고문관으로부터 한강 방어선이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보고를 받습니다. 그런데 이는 사실과는 전혀 다른 보고였어요. 강을 건너온 북한군 보병이 말죽거리, 동작동 일대에 일부 교두보를 설치한 것을 가지고 현장을 보지도 않은 고문관이 확대보고를 한 겁니다. 그런데 처치 준장은 이 보고가 사실이라고 생각하고 한강선이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보고를 합니다. 그리고 오산에 있는 상업통신중계소에서 극동군 참모장 알몬드 소장과 직접 통화를 하는데, 이때 동경의 맥아더 사령부는 다음날 정오까지만 수원비행장을 확보하고 있으면 미 지상군이 파병될 것이니 그때까지만 버텨 보라고 하지요. 2개 대대의 미 육군이 파견될 예정이라는 소식을 들은 처치 준장은 내일 낮까지는 수원을 지켜내겠다는 굳은 결의를 가지고 귀대합니다.....만, 그 귀로에서 정말 말도 안 되는 미군의 추태를 목격하게 됩니다.

사건의 발단은 정찰기의 잘못된 보고였습니다. 수원 일대의 상공을 날고 있던 미군 정찰기 1대가 수원 동북방에서 행군대열을 목격했는데, 이는 관악산으로 들어가는 한국군이었습니다만 피아 식별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조종사가 "북한군이 수원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진격중"이라고 보고해 버렸습니다. 여기에 지휘소 동쪽 500m 지점의 철로상에서 불꽃이 치솟으면서(사실은 철도신호였음) 이미 한강선이 무너지는 것으로 알고 있던 ADCOM의 미군들은 수원이 포위되는 줄 알고 패닉 상태에 빠졌지요.

이때 치명적이었던 문제는 지휘소장인 처치 준장은 오산에 가 있고 고문단장인 라이트 대령은 헤이즐릿 중령 등 고급장교들과 함께 한강선에 가 있는등 책임지고 지휘할 사람이 없었다는 겁니다. 때문에 지휘소의 미군들은 우왕좌왕하다가 "일단 비행장으로 가자!"고 해서 있는대로 차를 타고 우루루 몰려갔고, 당장 운반할 수 없는 지휘소의 통신장비는 통신병들이 소이수류탄으로 파괴해 버렸습니다. 그 불은 이들이 본부로 쓰던 농업시험장 건물에까지 옮겨붙어 신나게 타올랐고, 같이 농업시험장에 있던 한국 육군본부 요원들은 어안이 벙벙해서 그 꼴을 구경할 뿐이었습니다. 이 불길이 미군들을 더 흥분하게 했다는 거야 말할 필요도 없겠죠.

전방지휘소, 군사고문단, 대사관 요원 등이 비행장으로 몰려들자 이번에는 비행장을 지키고 있던 장병들도 패닉에 빠졌죠. 당시 수원비행장에는 북한군의 공습으로부터 비행장을 지키기 위해 대공포대가 설치되어 있었고 이를 조작하기 위한 미군 병력이 파견되어 있었는데, 전방지휘소에서 몰려든 장변들의 공포가 이들에게도 그대로 퍼져버렸습니다. 그래도 처음에는 지휘소 및 고문단 병력과 합류하여 비행장을 방어할 준비를 했지만 결국 22시가 되자 지휘소 소속 장교들이 대공포 요원들에게 장비를 파괴하고 자신들과 함께 철수하란 명령을 내립니다. "우리가 탈 비행기는 없으니, 자동차로 대전으로 가자!"는 거죠. 이에 비행장에 모여든 50여 대의 차량들이 서로 먼저 빠져나가려고 난리를 피웠고, 이제서야 수원 일대의 한국군은 인민군이 밀려와 미군이 수원을 철수하는 줄 알고 철수준비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이때 오산에서는 알몬드 소장과의 통화를 마친 처치 준장이 흥겨운 마음으로 지휘소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수원을 향해 가던 중 난데없는 차량 행렬과 맞부딪힌 처치 준장은 당연히 이 대열을 세웠습니다.


"누구의 지시로 어디로 가는 중인가?"
"대전으로 가는 중입니다."
"누구 명령으로?"
".........."


책임지고 명령한 사람이 없으니 당연히 아무도 안 나섰고, 전원이 꿀먹은 벙어리 상태로 있자 군인들 대신 대사관 직원 한 명이 처치 준장 앞에 서서 자초지종을 밝혔습니다. 어이가 없어진 처치 준장은 격분한 상태로 간단하게 말했지요.

"당장 수원으로 돌아가!"


문제는 돌아가는 것으로 모든 게 원상복귀되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지휘소 건물은 통신장비와 함께 잿더미가 되었으므로 지휘소 기능을 발휘할 수 없게 되었고, 수원비행장을 방어할 대공포가 죄다 고철이 되었으니 비행장에 내습하는 적기로부터 이착륙하는 아군기를 엄호할 수 없게 되었죠. 이는 다음날 투입되는 스미스 부대의 수송기가 북한군 전투기에게 격추되는 최악의 상황을 빚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 경우 미군 수백 명이 허공에서 산화하게 되는 거죠. 이제 비행장의 안전도 담보할 수 없는데다 지휘소 기능조차 발휘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할 수 없이 처치 준장은 다시 오산으로 가서 사령부에 사건의 전말을 보고한 다음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정말로" 대전으로 지휘소를 옮깁니다. 그리고 다음날 부산에서 기차를 타고 온 스미스 부대를 맞이하죠. 비행장의 안전 문제 때문에 스미스 부대의 착륙지도 수원에서 부산으로 바뀌었거든요.

* 미 공군 전투기가 수송기를 엄호하면 될 것 같은데 그걸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어쩌면 호위임무에 돌릴 전투기가 없었을 수도 있고, 타이밍을 맞추기 힘들다는 점 때문일지도 모르겠고요.
실제 수원비행장에서는 북한군 야크기의 내습으로 이날까지 최소 3대의 C-54 수송기와 1대의 F-82 트윈무스탕이 격추 또는 지상주기중 파괴되었고 1대의 F-82와 2대의 B-26 경폭격기가 적기의 기총소사로 지상에서 파손되었습니다. 김포나 여의도에서 파괴된 항공기를 빼고도 말이죠.


만약 스미스 부대가 원래 날짜에 수원에 내렸다면 어땠을까요? 한강 방어선은 7월 3일, 북한군 전차가 복구된 철교를 통해 도하할 때까지 유지되고 있었으므로 7월 1일에 수원에 내린 스미스 부대는 아무리 늦어도 다음날인 7월 2일 오전까지는 한강선에 배치될 수 있었습니다. 그럼 이들 미군들이 한강선을 지키고 북한군을 저지할 수 있었을까요?

하지만 비행기로 도착한 스미스 부대는 2개 보병중대에 지원부대를 합쳐 406명에 불과했고, 장비도 개인화기 이외에는 75mm 무반동총 2문/4.2인치 박격포 2문/60mm 박격포 4문/2.36인치 바주카포 6문이 고작이었습니다. 원래는 75mm 무반동총 2문과 4.2인치 박격포 2문을 더 가지고 있었지만 수송기의 중량 문제로 두고 와야 했지요. 미군의 도착이 한국군의 사기야 높여 줄 수 있었겠지만, 이런 장비를 가지고 북한군을 유효하게 저지할 수 있었을지, 솔직히 제 생각에는 좀 회의적입니다.

실제로 죽미령 전투 당시에도 북한군 전차를 파괴한 유일한 화기는 105mm 곡사포(대전차고폭탄으로 2대, 일반 고폭탄의 지근거리 집중사격으로 2대)였고, 보병들이나 포병 방어진지에서 사격한 75mm 무반동총이나 2.36인치 바주카는 단 한 대의 전차도 부수지 못했습니다. 이 장비를 그대로 들고 한강으로 간다고 해서 전차를 부술 수 있을 가능성은 별로 높지 않죠. 페리 대대의 105mm 야포와 대전차포탄은 앞에서 말했듯이 7월 3일 오후에야 겨우 대전에 도착했고, 이때 북한군의 전차는 이미 한강을 건넌(7월 3일 새벽 4시) 후였습니다. 만약에 이때 한강선에 스미스 부대가 있었더라도 큰 도움은 되지 않았을 공산이 큽니다. 한강 방어선은 역시 무너졌을 거고 미군의 첫 패전은 이틀 일찍 왔겠지요.

물론 방어가 성공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습니다. 미 공군이 폭격으로 한강철교를 완전히 절단하는데 성공하거나 했으면 인민군이 전차를 도하시킬 수 없으니까, 보병 교두보만 상대로 한다면 며칠 더 버티지 못한다고 볼 수도 없거든요. 김포 방면에서 내려오는 북한군 6사단으로부터 옆구리를 지킬 수 있다면, 3일 정도 더 버틸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단언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6사단에도 전차중대가 있었다는 거지만....하여튼 최대한 희망적으로 상황을 만들어서 한번 3일 더 버텼다고 가정을 해 볼까요?

처음에 미군은 일본에 있는 4개 사단 중 2개 사단을 파견할 예정이었는데, 7월 6일까지 북한군 주력이 한강 북쪽에 못박혀 있었다면 24사단의 주력이 한강까지 올라올 수 있었고 북한군 공세에 대해서도 보다 유효한 방어를 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1개 사단이 추가되면 김포 방면에 대한 방어도 보다 충실해질 수 있고, 한강-김포선에서 북한군 진격이 저지되는 사이 미군이 더 증원되거나 한국군 후방에서 신규 병력이 편성되거나 해서 병력도 증강될 테죠. 수원쯤에 전선비행장이 확보된 상태에서 무스탕 비행대라도 자리잡으면 근접항공지원도 보다 충실해질 수 있고요. 이 경우 김포반도의 북한군 6사단은 보급로가 끊긴 상태에서 괴멸하게 만들 수도 있겠죠. 이렇게 된다면, 일이 잘 풀렸을 때는 전화가 한강 이남으로 퍼지지 않고 끝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남한 전역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이나 재산파괴 등은 모면할 수도 있어요. 보도연맹 학살 같은 경우도 서울함락 이후 계속 밀리는데서 온 충격으로 일어난 영향이 크거든요.

다만 이 경우에는 다른 지역은 몰라도 서울은 완전히 초토화되어버릴 가능성이 큽니다. 실제 역사에서는 북한군 주력은 낙동강에 있었고 서울은 의용군이 주가 된 허접한 병력이 지키고 있었기에 유엔군의 공격이 쉽게 먹혔지만, 북한군 제1선 정규 병력이 충분한 전력을 갖추고 들어차 있는 서울이라면 쉽게 떨어질 리가 없죠. 그것도 기껏 벌인 전쟁의 거의 유일한 성과가 서울이라고 하면....-_- 정말 건물 하나하나에 토치카 들어갈 거고, 100만 시민의 인간방패화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거기에 미군이 진입작전 벌이기 전에 포폭격은 오죽 하겠어요. 그럴 경우 수십만의 민간인 시체가 쌓이는 것과 함께 중앙청이고 경복궁이고 죄다 씨알머리도 안 남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서울, 개성을 탈환한 후에 그 이상 전진했을까도 의문이 돼요. 당시 유엔의 명분은 "38선 이남 대한민국 영토의 회복"이었고, 38선 이북으로의 북진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비교적 초기에 북한군의 남진이 저지되고 38선까지 회복이 될 경우, 과연 한국의 통일을 위하여 유엔이 북진해 줄까....도 의문시되는 거죠. 이렇게 전진이 멈출 경우 옹진반도는 확실히 애매한 존재가 되어버리고 말이죠. 해주 상륙작전 따위를 벌여 탈환할 수도 있습니다만 이곳이 본토에서 지원이 어렵다는 문제는 여전하므로 차후 또 북한이 쳐들어왔을 때 충분히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지역을 포기하고 그 대신 같은 면적의 경기도나 강원도를 더 점령하느냐, 아니면 그냥 포기하느냐, 연결하는 회랑을 확보하느냐......고민거리는 많지요. 뭐, 정말로 38선까지만 딱 찾고 말 수도 있습니다. 실제 일어난 일이 아닌 이상, 지금 생각해서야 모를 일이죠.

만약에 저런 식으로, 비교적 조기에 한국전쟁이 끝났다면 어떨까요? 그랬다면 아마 이승만은 유엔군에게 작전지휘권을 넘기지 않았을 겁니다. 협조 하에 작전을 수행하고, 그때그때 편의에 따라 일부 부대의 지휘권을 이양하는 경우는 있어도 실제 역사에서처럼 전체 지휘권을 유엔군 사령관이 행사하게 하지는 않았겠지요. 그랬으면 한국군 스스로의 작전 경험도 좀 더 생겼을 듯.
또한, 그 이후 남북 국경은 허구헌날 총포탄이 오가는 대치국면이 되었을 걸요? 한번 지독하게 풀어버릴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실제 역사보다 오랜 기간 38선이 시끄러웠을 가능성이 있지요. 그랬다면 그건 나름대로 끔찍한 일.

어쨌거나 6월 30일 저녁에 있었던 미군들의 헛짓거리 덕분에 한강은 확실히 뚫어졌고, 이후 역사는 우리가 아는대로 진행이 되었습니다. 만약 이랬다면 어땠을까.....는 이제 각자 상상의 영역 :)


참고자료 :

6.25전쟁사 vol.03 - 한강선 방어와 초기 지연작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6
육군종합학교, 박경석, 서문당, 1990
일월총서 vol.08 - 한국전쟁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조셉 굴든, 일월서각, 1982
전투전사(하) - 방어, 육상자위대 후지편수회, 능성출판사, 1981
한국전쟁사 vol.2 - 북한 괴뢰군의 남침(1950.6.25~1950.7.31),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1968
한미 군사 관계사 1871~2002,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2

by 슈타인호프 | 2009/07/18 02:27 | 한국현대(~20XX) | 트랙백 | 덧글(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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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고느님을 찬양합니다 at 2009/07/18 02:36
이런 일이 있었군요...ㅎㅎ 재밌게 잘 봤습니다..ㅎㅎ
Commented by Allenait at 2009/07/18 02:40
그래도 미군 병력이 그다지 많지 않았던 바에 의하면.. 결국 뚫리지 않게 되겠나 싶군요. 모르죠. 또 그렇게 된다면 스미스 부대는 바보소리 듣기 보다는 영웅적으로 산화했다는 소리 들을지도요.
Commented by tore at 2009/07/18 02:41
이야 이런 희대의 삽질이... 잘 봤습니다.
수원 리브로에 가봤는데 책이 없어요 ;ㅅ;
Commented by 한뫼 at 2009/07/18 07:47
이런 빌어머글 고문관시키들....삽질도 이런 삽질은...
Commented by asianote at 2009/07/18 08:10
덧붙여 말한다면 안타까운 일이지만 한국전쟁때 가장 못싸운 군대는 한국군대였습니다. OTL. 중국 애들이 호구 취급했을 정도니까.
Commented by 오토군 at 2009/07/18 08:10
'브레이크 아웃-장진호 전투-'란 책에서 한국전 당시 미 해병대가 왜 그리 미 육군을 '졸라 까는가' 했더니만 이유가 있군요.(…아니 그게 원래 해병대 스타일이라고들 하지만서도.)
Commented by dunkbear at 2009/07/18 08:20
끔찍한 삽질이군요. 2차 대전 때 나치와 일본을 물리친 기상은 도대체 어디로... ㅡ.ㅡ;;;
Commented by 오토군 at 2009/07/18 08:36
발지 대전투의 DVD 인터뷰 중에서 "(미군은)전투에선 패배해도 전쟁에선 이겼어요." 라는 명언이 있죠.
Commented by JOSH at 2009/07/18 09:00
이야...
시대가 낙동강 방어선을 원했네.... T-T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9/07/18 09:32
고느님을 찬양합니다//감사합니다^^;

Allenait//뭐 지금도 영웅적으로 싸웠다..는 공식 평가는 받습니다.

tore//감사합니다^^;; 음음 정 없다면 인터넷 구매를(...)

한뫼//늘 그렇죠 뭐.

asianote//잘 싸울 때는 괜찮은데, 이게 패닉에 제대로 빠지면;;;

오토군//하나 더 웃기는 건 미 육군은 "2.36인치 바주카로 T-34는 도저히 잡을 수 없어!!!"하고 발악했는데 해병대는 그걸로 T-34를 간단하게 해치웠다는 겁니다-.-;;;

dunkbear//원래 미국은 이제까지 벌인 거의 모든 전쟁의 첫 전투에서 참패하는 징크스가 있습니다.

오토군//끄덕끄덕.

JOSH//전쟁이 안 나고 그냥 사이좋게 잘 먹고 잘 살았으면 좋았겠죠.
Commented by 김희대 at 2009/07/18 17:50
개전후 첫전투에 투입되는 병사들은 죽을 맛이겠군요.
그런데 해병대라면 대한민국 해병대를 말씁하시는 건지요?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9/07/19 01:03
김희대//미 해병대입니다.
Commented by 을파소 at 2009/07/18 10:24
원래 주인공이 초반에는 악당에게 발려줘야 역경을 극복하고 승리하는 재미가 있기 때문에 저러는 건...(퍽)
Commented by 댕글댕글파파 at 2009/07/18 10:58
재밌네요 ㅎㅎ
사실 전쟁이라는 극한의 경험에 다다르게 되면 저런 삽질이 한두개가 아닐듯 합니다.
군대에 갔다 온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실감할듯....
"이 길이 아닌가벼"는 얼마나 많은지....
Commented by 上杉謙信 at 2009/07/18 10:59
미군들의 특징은 항상 새로운 전장에 투입되어서 새로운적과 싸우면 초반에는 삽질이 이어지다가.... 갈수록 발전하죠 적응력이 빠르다고해야하나...

근데 이걸 인종으로 연결시켜서 2차대전때는 백인들만 전투부대를 구성해서 잘 싸웠는데 열등학 흑인들이 백인이랑 혼성을 이루어서 전투에서 졌다는 괴악스러운 주장을 펼치던 분들이 계시던데...
Commented by asianote at 2009/07/18 12:23
흑인이 열등인종이라는 설이 우리나라에서 잘 먹히는 것 같습니다. 하긴 뭐 선진국이라고 자처했던 나라들의 사람들이 한세기 전만 해도 그런거 잘믿던데요. 뭘.
Commented by 행인1 at 2009/07/18 11:22
저 전방지휘소 사건은 집단패닉의 사례로 들기에 부족함이 없을듯 합니다...
Commented at 2009/07/18 11:37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미망인제조기 at 2009/07/18 12:00
피아 식별은 중요한것...!!!
육군보다는 해병대가 근성이 더 좋은듯 하죠...공수부대도 그렇고...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9/07/18 13:01
을파소//오오 히어로물!!!

댕글댕글파파//저도 종종 겪었지요 ㅎㅎ

上杉謙信//근데 한국전쟁까지 백인부대랑 흑인부대 안 섞었지요(먼산)

asianote//그런 게 있지요.

행인1//넵.

비공개//
1. 철수 명령은 무슨 중령이 내렸다고 하더군요.
2. 참전 경력자 중 많은 사람이 집에 가서 민간인이 되었다는 것도 문제였습니다.
3. 양측 사회를 "싹 청소"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죠.
4. 그거야 뭐 무시신공을.
5. 정말 끔찍한...-_;;;;

미망인제조기//중요합니다(먼산)
Commented by 措大 at 2009/07/18 13:56
별로 개선은 안된거 같다는게 안습 -.-; 이 친구들 중공군 들어왔을 때도 비슷한 추태를 되풀이 했으니까요.

한강방어선의 스미스 특임대라면 서울의 3일을 서울의 5일이나 7일 정도로 늘려줄 수도 있었을까요? 그게 전국에 도움이 되었을까요?

아하하하;;;
Commented by 오넬 at 2009/07/18 16:10
이 복잡한 심정 (...)
Commented by 이준님 at 2009/07/18 16:17
1.1947년인가 1948년인가 트루먼의 행정명령으로 흑백 혼성부대가 나왔으니 그런 이야기가 나올법도 합니다. 물론 전통있는 흑인 부대는 일부 한국전에서 남아있기도 했지만요.
Commented by 瑞菜 at 2009/07/18 20:28
이래서 혼란은 핵무기보다도 무섭다고 하지요.
짜르 봄바가 터져도 혼란만 안 일어나면 침착하게 다음 수를 둘 수 있는데.
Commented by 천지화랑 at 2009/07/18 22:43
북진문제야 뭐, 북조에서 또 정신 못 차리고 38선 이북에서 딱콩딱콩->빡돈 한국군 돌격! 하면....[랄라~]
Commented by Karl at 2009/07/19 00:28
스미스 특임대가 제대로 도착했어도 전황을 뒤집기엔 너무 규모가 작지 않았을까요 'ㅅ'

.....미군 지원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시작하는게 저 뻘짓 이후 몇 개월 후이니......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9/07/19 01:05
措大//실제로 한국군은 6일을 버텼습니다. 제가 이야기한 3일은 "3일 더"의 의미지요^^;;
7일을 더 버텨서 그동안에 미군 본대가 왔다면 충분히 도움이 되었을 겁니다.

오넬//복잡하죠(...)

이준님//25연대였던가요? 초창기에 모조리 도망가버린 흑인연대가....

瑞菜//끄덕끄덕.

천지화랑//그때 미군이 돕느냐 안 돕느냐.....

Karl//너무 작았죠. 3.5인치 슈퍼바주카라도 장비하고 있었다면 406명으로도 유효한 전력이 됐을지 모르지만 스미스 특임대의 장비는 한국군보다 나을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Commented by 무르쉬드 at 2009/07/19 13:42

흥미로운 일이군요. 미군의 초반삽질은 전통(?)이자 버릇인듯..

특임대 전력이 한강이란 방어물덕에 연대급 가치를 세워준다면 가능하겠죠. 일단 서울 안양 사이의 긴 협곡 지형 일대에 미군 사단급 전력이 배치될 정도까지 시간을 끌어주었다면 ..확실히 역사 자체를 변하게 만들기 힘들지만, 부산까지 내려오는 시간은 상당히 지연시켰으리라 봅니다.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9/07/19 14:17
애초의 2개 사단이 부족하다면 추가파병할 수도 있고, 한국측에서도 정리가 좀 제대로 이루어질 시간을 벌 수 있으니까요. 실제처럼 무지막지한 속도로 밀리지는 않았을지도.
Commented by 이네스 at 2009/07/19 23:07
황당하기가 그지없군요.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9/07/20 07:30
전쟁통에는 웃기는 일들이 많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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