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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관군의 한 단면 - 동학농민운동과 그 진압
동학농민군의 죽창에 대한 어떤 보도에서 셀프트랙백.


지난번에 올린 사진 일단 재활용 한 번.
(사진출처 : http://www.greatopen.net/magazine01/res/200603/200603_6601.jpg)


지난번에 예고했던 포스팅입니다. 예고까지 한 것 치고는 별 내용 없습니다만...뭐, 역사포스팅으로는 꽤 오랜만이네요.


지난 포스팅에서도 언급했지만, 2천 명의 동학농민군은 첫 번째 대규모 전투(*)인 황토치 전투에서 전주감영이 파견한 감영군 2천(2천이라고 해야 정규 병졸은 절반, 나머지 절반은 보부상)을 격파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감영군의 행동을 보면 개판도 이런 개판이 없어요(이하 날짜들은 음력임).

* 황토치 전투 이틀 전(음력 4월 4일) 있었던 백산 전투가 최초의 전투입니다만, 이 전투에서는 관군이 기습을 당해 궤멸, 산산이 흩어져 도주하는 바람에 도리어 사상자는 더 적었습니다.

일단 전라감사 김문현의 명을 받은 관군이 고부를 출발한 것은 전투가 벌어진 날, 4월 6일 이른 아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병력이 황토치에 도착한 건 무려 해가 뉘엿뉘엿한 저녁 무렵;; 1960년대에 동학농민운동 자료를 수집하러 현장에 갔던 이규태 씨 이야기로는 자기 걸음으로 1시간 걸렸다고 하던데, 도로사정 문제와 대군이 행군할 경우의 속도 차이를 감안해도 이건 좀 심하지 않나 싶기는 해요. 1시간 걸었으면 겨우 4km 정도란 이야긴데, 이걸 아침부터 저녁까지 걸었다니....

그런데 사실 길이 안 좋기는 했다고 합니다. 비가 온 직후인 탓에 워낙 도로사정이 안 좋아서 군량을 실은 소달구지가 움직일 수 없었고, 그래서 동네 사람들을 끌어다 운반을 시켰다고 하네요. 동네 사람들 외에 군인으로 동원된 보부상들도 짐이 잔뜩 든 고리짝을 메고 갔고, 관군 병사들은 소풍이라도 가듯 유유자적 룰루랄라, 노래를 부르며 손뼉을 치며 그렇게 길을 갔다고 하는군요.

이렇게 해서 저녁나절에 황토치에 도착한 관군은 진을 치고 농민군의 접근을 기다리면서 본격적으로 질펀하게 놀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술과 쇠고기(돈 주고 사 왔을 리는 없을 듯 - 아마 농가에서 약탈해오지 않았을지)를 곁들인 저녁을 배불리 먹고 "바보 천치같은 동학당 놈들은 지금 개울물을 마시고 나무껍질이나 벗겨 먹고 있겠지!"하고 비웃으면서 말이죠.

술과 고기로 끝났으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관군 간부들은 주변 촌락 아낙네들을 끌어다가 작부처럼 자기네 술시중을 시켰고, 심지어는 겁탈하기까지 했습니다. 동학군이 관군 진지를 들이쳤을 때, 옷깃이 풀어헤쳐진 젊은 여자들이 울면서 막사 사이를 헤메는 것을 목격했다는 기록이 동학군 쪽에 남아 있다고 하네요.


황토치 전투를 재현한 축제의 한 장면
(사진출처 : http://cfs2.flvs.daum.net/files/41/87/73/1/9449633/thumb.jpg)


이렇게 술에, 고기에, 여자에 빠져 놀아나고 있었으니 전투준비라고 제대로 할 리가 없지요. 저녁에는 그래도 경계하는 시늉이라도 하고 있었던 관군은 동학군이 얼른 나타나지 않자 안심해서는 술먹고 춤추며 놀다가 다 퍼져버렸습니다. 그리고 죽창이 주무장인 동학군의 야습을 당해서 전멸해 버렸죠. 생존자는 극소수-_-;;;

* 위 대목은 당시 전투의 생존자들을 인터뷰(1960년대 초기)한 이규태씨의 저서에 주로 근거한 것이나, 이에 대해서는 다른 기록이 존재합니다. 동학군의 진지에 대해 감영병 250명과 수천의 보부상으로 이루어진 관군이 돌격하다가 패주했다는 이야기(주로 공식 기록)도 있는데, 제가 공부가 부족해서인지 뭐가 맞는지 모르겠군요.
이와 같이 대립되는 양자의 기록이 있는 경우, 관군은 실제로 술먹고 퍼져 자다가 기습당해 놓고서는 명목상으로만 "용감히 돌진하다가 함정에 빠져" 패했다고 보고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큽니다. 이럴 경우 정부의 "공식" 기록은 후자의 것으로 남게 되지요. 뭐가 맞으려나.


이 패배 이전에 전라감사는 서울에 원병을 요청했습니다. 조정은 이에 양호초토사 홍계훈(임오군란 때 중전의 생명을 구하고, 훗날 을미사변 때 경복궁을 지키다가 전사한 바로 그 사람입니다)에게 800의 정예 경군을 딸려 파견했습니다. 홍계훈은 일찌기 동학도들의 보은 집회(1893년 3월)를 진압하러 600의 군사를 이끌고 출동한 경력이 있는 사람이었지요.

이들 병력은 모두 서양식 훈련을 받고 군복도 모두 양복으로 갖춰 입은 장위영 소속의 정예였어요. 홍계훈은 보무도 당당하게 기선 창룡호와 한양호(관민합작 해운회사인 이운사 소속의 배), 그리고 청나라 군함 평원호를 타고 이들과 함께 인천을 떠나 출항 다음날인 음력 4월 5일에 군산포에 상륙했습니다. 그리고 4월 7일에 전주성에 들어갔습니다만 이때 홍계훈의 병력은...

470명 뿐이었습니다.


단 이틀 동안 절반에 가까운 330명이 탈영해버린 거죠. 사실 훈련도 받고 군복은 잘 갖춰입었지만 당시 조정의 병사들에 대한 대우는 엉망진창이었습니다.

당시 경군 병사들은 현금으로 하루에 50문의 급료를 받았습니다(당시 조선군은 직업군인제). 그런데 이 돈 외에는 쌀 한 톨 지급이 안 되었던 데다가, 이 알량한 봉급도 3개월째 지급이 안 되고 있었어요. 가족들 생활도 힘든 판에 민란을 진압하러 가라는데, 전라도에 도착하자마자 들은 소식이 감영군의 패전 소문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병정들이 기혼자였으므로 자기가 죽으면 뒤에 남을 처자식이 걱정될 수밖에 없었죠.

게다가, 관군 병사들에게는 잘 싸운다고 해서 포상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었고 전투중에 죽거나 다친 데 대한 보상도 전혀 없었습니다. 한 병사는 첫 전투인 백산 전투에서 복부에 총을 맞아 관통상을 입고 돌아왔는데, 감영에서는 이 병사에게 치료조차 해주지 않고 1관문(1관문 = 10냥 = 1,000문)의 돈을 주고 즉각 제대시켜버렸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죠. 이런 대우를 받으면서 관군의 사기가 높을 리 있나요.

농민군에 대한 숫적 열세에 겁먹고, 지방민들의 반정부적인 분위기에 위기감을 느낀 데다 승승장구하는 농민군에게 승리할 자신이 없었던 홍계훈은 동학군의 규모가 워낙 큰 데다 "사방에 적도와 내통하는 자가 널려 있어"서 싸울 수 없으므로, 원병을 보내달라는 전보를 보냅니다. 이에 장위영의 잔여병력 300명과 강화도의 심영병 500명이 추가 파병되고, 이 소식에 기운을 얻은 홍계훈은 비로소 싸움에 나설 결심을 합니다.

하지만 아직 원병이 실제로 도착하지는 않았으므로 홍계훈은 자기가 거느리고 온 병력에다 남아있는 감영병 소속의 정예병력을 달달 긁어 남부 지방을 맴돌고 있는 동학군을 추적합니다만, 공연히 병력을 양분해서 활동하다가 4월 23일의 장성 전투에서 대관 이학승 지휘하의 별동부대 300이 또 참패합니다. 홍계훈 나름대로는 서울에서 내려온 원군이 법성포에 상륙했으므로 자기는 이 병력을 인수하고 이학승에게는 그동안 동학군의 발을 묶어놓게 할 심산이었지만 계산이 빗나간 거죠. 홍계훈의 예상대로라면 이학승이 동학군 주력을 붙들고 있는 사이 자신이 거느린 관군이 그 배후를 쳤어야 했는데, 너무 쉽게 이학승이 패해 버린 겁니다.

이학승도 나름 자신은 있었습니다. 그는 개화기를 맞아 새로 교습한 새 군사학을 배운 제법 유능한 장교였고, 고지에 자리잡고 대포 진지와 기관총 진지를 만든 데다(대포만 2문이라는 기록도 있는데, 당시 개틀링 기관총을 "회선포" 또는 "기관포"로 표기했으므로 이를 그냥 포로 취급, 대포 2문으로 적었을 수도 있습니다) 능선에 소총병들을 위한 참호까지 파서 진지를 구축해놓고 있었거든요. 게다가 병사들의 각개 무장도 동학군이 기껏 화승총인데 서양식 라이플(양총이긴 하지만 당시 관군의 무장은 연발이 안 되는 후장 단발총임)이었으니, 압도적으로 유리했죠.

다만 압도적인 수적 열세와 종교적 광신성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학승의 군사가 300명인데 반해 동학농민군은 4,5천에 달했습니다. 게다가 "궁궁을을(弓弓乙乙)"이라고 적힌 부적을 달고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라는 주문을 외우며(부적과 주문의 힘으로 총알이 피해 간다고 믿었음) 돌격하는 동학군을 저지할 수는 없었습니다. 오전의 전투에서는 이겼지만 오후에는 압도당해버렸죠. 잠깐의 휴식 동안, 동학군 수뇌부가 생존 장병을 대상으로 "죽은 놈은 부적을 잃어버렸거나 주문을 외우지 않은 자들 뿐이다"라는 정신교육을 실시했거든요.

이에 종교적 신앙심으로 사기충천한 동학군은 총탄이 날아오건 포탄이 날아오건 상관없이 "닥돌"했고, 원체 수가 적은 관군은 장비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일패도지하고 말았습니다. 병력을 추스르려고 애를 쓰던 대관 이학승도 패주하는 경군 배후에서 5명의 부하 병졸들과 같이 최후까지 분투하다가 전사하고 말았지요. 현재 장성에는 장성 유생들이 건립하고 최익현(다들 아시는 그 사람)이 비문을 쓴 이학승의 추모비가 남아 있습니다. 물론 승전한 동학농민군을 기념하기 위한 동학농민군 승전 기념공원(사적 406호)도 있어서, 기념행사도 천도교 주최로 열리고 있다고 하네요.


장성에 남아있는 이학승의 추모비
(사진출처 : http://donghak.go.kr/images/historic/add2/034.jpg)


영광 법성포에 머무르고 있던 초토사 홍계훈은 장성에서의 패잔병들을 수습한 다음 서울에서 온 원군을 이끌고 서둘러 동학군의 뒤를 쫓았지만, 동학군이 먼저 전주성에 들어가고 말았지요. 그나마 남아 있던 병력도 홍계훈이 긁어간 뒤라 전주성은 제대로 저항도 못 해 보고 함락되었습니다. 이들의 뒤를 따라온 관군은 성을 탈환하려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청나라와 일본의 개입 가능성을 들어 농민군 지도부를 설득한 끝에 전주성을 돌려받습니다. 하지만 이미 양쪽 군대가 조선에 들어와 있었고, 얼마 안 가서 청일전쟁이 이땅에서 발발하게 되지요.

청나라와 일본의 주전장이 만주로 넘어가자 동학군은 2차 봉기를 통해 일본군을 격파하고자 했으나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작전으로 붕괴, 진압당하고 맙니다. 진압의 수적 주력은 관군이었고, 일본군은 단지 후비보병(전역 5~9년차의 예비군. 지금 우리 개념으로 생각하면 향토예비군 수준) 1개 대대뿐이었어요. 다만 조선군의 지휘권은 일본군 장교가 행사했습니다. 여기에 각지에서 일어난 "민보군" 및 "의병"들이 동학군 공격에 나서면서 관군, 일본군, 민보군의 협공을 받은 동학군은 쇠멸하게 됩니다. 관군 및 일본군에게는 장비와 전술에서 밀리고, 양반들이 주도한 민보군은 그 보조병력으로서 숫적 우세를 강화했으니 말이죠.

....에에, 애초에 쓰려고 했던 포스팅은 당시 관군의 엉망진창인 처우였는데 이게 쓰다 보니 안드로메다로 갔군요. 쳇-_;;;


참고자료 :

들불, 유현종, 삼성당, 1994
이규태의 개화백경 vol.5 - 개화는 싫어 개국은 더욱 싫어, 이규태, 조선일보사, 2001
한국사 vol.40 -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국사편찬위원회, 2000
현대한국사 vol.1 - 시련에 선 왕조(1863~1895), 편집부, 신구문화사, 1969
동학농민혁명 기념관
동학농민혁명 지식정보시스템 - 兩湖招討謄錄
인터넷 신문 장성사람들

by 슈타인호프 | 2009/05/26 17:49 | 한국근대(~1910) | 트랙백 | 덧글(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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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Allenait at 2009/05/26 17:58
...결국 '닥돌' 과 '숫적 우세' 는 장비의 우월성 쯤은 가볍게 넘기는군요
Commented by rumic71 at 2009/05/26 18:25
러일전쟁때 일본군도 그렇게 믿다가 ...
Commented by Allenait at 2009/05/26 18:26
노몬한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지 않나 싶군요
Commented by rumic71 at 2009/05/26 21:51
노몬한에서야 깡통전차가 그나마 작살날까봐 내빼는 바람에 발린 거구요 ^^
Commented by 델카이저 at 2009/05/26 22:35
닥돌을 받는 쪽이 허접하니까 가능한 겁니다. -_-;; 그게 아니라면 저런 개돌이 성공하는 케이스는 매우 예외적인 경우죠.. 참호에 포까지 있고 후장식 라이플이 있는 상황에서 개돌은 필패입니다. 남북전쟁에서 저런 형태의 개돌은 절대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수십번이나 실증해 보였죠..

실제로 우금치에서 저거보다 훨씬 많은 병력과 저 개돌에 못지 않은 열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캐를링의 화력이 그냥 발립니다. -_-;;
Commented by 瑞菜 at 2009/05/26 18:08
이학승은 아쉽네요. 제대로 진지를 피고 지휘를 했는데 수적우세에 무너져 전사하니.
패전은 하더라도 전사하지 말고 홍계훈에 합류해 홍계훈을 거들면
유능한 장교로 성장할 수 있었을 텐데.

뭔가 남북전쟁을 보는 것 같습니다. 참호를 피고 방어하면, 돌격으로 뚫어대는.
Commented by rumic71 at 2009/05/26 18:25
월남전을 보는 기분도 들고요.
Commented by 이준님 at 2009/05/26 18:27
1. 안중근 아버지가 바로 그런 "민보군" 중 하나를 지휘했지요. 차마 그대로 쓰기 어려우니 위인전 버젼은 "동학군을 사칭한 도적떼" --;;라고 표기했지만요.

2. 개화기 관련해서 이규태 선생 기록은 의외로 신빙성을 의심할만한 이야기가 너무 많습니다. 반드시 교차검증이 필요한 부분이지요. 에헴. 더군다나 1960년대초면 "동학란"(이게 정식명칭이었습니다)이 "동학혁명"으로 바뀌는 시점이라서 의외로 동학군쪽에 미화가 많은 시점이었습니다.

3.
Commented by ZECK-LE at 2009/05/26 18:37
뭐가 어찌되었든 망국의 군대 다운 활약상이군요. 당나라 말엽의 군대가 이러했던가.
Commented by 我行行 at 2009/05/26 18:42
개틀링을 가지고도 죽창부대을 이기지 못했다니 한심하군요.

총알이 모자랐나요?
Commented by rumic71 at 2009/05/26 21:51
관군의 개념이 모자랐던 것으로 보이는군요.
Commented by 천지화랑 at 2009/05/26 22:31
1900년대까지만 해도 이놈의 '기관총'이라는 것이 '탄약 잡아먹는 괴물'이었으니, 탄약을 전량 수입에 의존하는 조선군이 넉넉한 기관총 탄환을 보유하고 있진 않았을 듯. -ㅁ-;;
Commented by 이준님 at 2009/05/26 18:49
3. 동학 관련 "소설"로는 의외로 괜찮은 작품이 나왔습니다. 서기원(나중에 조선일보에 광화문을 연재하는)의 모 작품은 평작이고 이념의 편향성의 압박이 심하지만 박태원의 "갑오 농민전쟁"도 이쪽에서는 레퍼런스급이지요. 일제 연간의 "구보" 된장남이자 모 영화 감독의 외조부인 이 사람이 이런 소설을 쓰는게 이상하겠지만 인터넷에 출몰하는 모 인사들 머리에 드는 망상대로 "지식인도 빡세게 노동시키면 개조된다"는 이론을 혹부리왕이 실행하는 바람에 산골에서 농사짓고 오니까 그렇게 되었지요

물론 동학군이 본격적으로 활동하는 부분을 쓸때는 실명해서 부인이 병상에서 대필(했다고 하지만 거의 부인이 썼다는) 했지만요
Commented by 네비아찌 at 2009/05/26 19:21
역시 종교적 광신으로 무장한 무리를 정규군이 이기기는 어렵군요. 아마 동학군도 총탄 한두발 맞은 정도로는 쓰러지지 않고 덤볐을 듯.....
만약에 동학군이 승리해서 정권을 잡았다면 우리나라는 지금까지도 동학 원리주의 국가로 남아있었지 않을까요.
Commented by 알렉세이 at 2009/05/26 19:31
부적과 주문의 힘으로 총알이 피해 간다고 믿었음

-> 이건 청 말 의화단이나 백련교의 난이랑 비슷하네요.=ㅅ=

종교적 광신이라니 후덜덜덜
Commented by 獨步 at 2009/05/26 20:07
역시 동일컨임을 가정할 때 프로토스보다는 저그의 승률이...(퍼퍽!)
Commented by 瑞菜 at 2009/05/26 20:50
그래서 상성상 저그>토스지요. 강도경-조용호-마재윤-심소명-이제동, 이주영이 보여준...
Commented by B군 at 2009/05/26 20:11
확실히 이런 점에선 아무리 후비역을 소집한 부대라도 막말 무진전쟁과 아키타 전쟁, 오우에츠 전쟁을 거쳐 그 전부터 서양식 조련의 결과를 어떻게든 거친 일본군이 우세하다고 안할 수가 없군요;;; 동학군측에 하나라도 서양식 조련 비슷한걸 공부한 장수가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ㅠ.ㅠ
Commented by asianote at 2009/05/26 20:13
그것은 불가능. 동학은 반외세라는.
Commented by B군 at 2009/05/26 21:06
넵, 허나 막말 무진전쟁 전 일본의 각 제번들도 좌막, 양이, 존왕 등 다양한 정치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으나 군비에 관해서는 반외세와는 상관없이 달랐습니다.

최초 개항을 거부했던 도쿠가와 막부는1855년형 네델란드군 보병교범을 번역해 새롭게 설치된 막부군 보병강무서의 교범으로 삼았거든요. 또한 좌막양이(친막부 성향으로 서양과의 개항에 반대하는 정치적 입장을 지닌) 계열의 아이즈번 조차도 그 정치적 입장과는 상관없이 가신을 독일에 보내 당시 북독일연방의 제후국이던 샤움부르크 리페 공국과 무기구입 및 군사고문 고용계약을 체결해 개량형 드라이제 소총인 바움가르텐 소총을 3000정이나 구입하는 계약을 체결하기도 했죠.

반외세라도 적어도 그 외세들이 어떤 전술을 가지고 있나 연구해보는 자세가 없음이 조금 아쉽다는 얘깁니다...^^:;

관련 이야기는 예전 http://syrdarya.egloos.com/3261071을 참고하시길.
Commented by 네비아찌 at 2009/05/26 22:07
일본의 각 제번들의 좌막양이 등등은 "정치적 입장"이고, 동학의 척왜양이는 "종교적 교리"지요.
정치적 입장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지만, 종교적 교리는 목숨을 버릴지언정 일자 일획도 바꿀 수 없는 것이라는 차이점이 있지요.
그나마 좀 환상적인 극동 공영권 구상을 가졌던 일본의 천우협이 근대 무기를 지원해 주겠다며 전봉준과 접촉했지만 전봉준이 일갈하고 내쫒아 버렸다지요?
Commented by 천지화랑 at 2009/05/26 22:33
'위인전' 보면 전봉준은 2차봉기 실패하고 숨어살던 중에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알고 새로운 지식 습득을 위해' 서울 올라가려다가 신고당해 붙잡혔다고 하지요. -ㅁ-;;
Commented by 천지화랑 at 2009/05/26 22:34
이렇게 보니 조선판 의화단의 난이군요. 마지막엔 실권자(조선: 대원군 - 청: 서태후)와 손 잡았다가 외국군(혹은 서양식 군대)에게 발렸다는 최후까지 똑같으니 이건.... -ㅁ-;;
Commented by 소년 아 at 2009/05/26 22:47
믿음 하나로 돌격했던 농민도 농민이지만, 저런 상황의 관군들에게서 전투력을 기대하긴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군인의 박봉이란...ㅠ_ㅠ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9/05/26 22:56
슬픈 일이죠, 박봉이란(.......)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9/05/26 22:55
Allenait//닥돌로 돌파할 수 있는 것도 무기의 정도껏이죠. K2로 무장한 300명이라면, 동학군 3만 정도는 발라버릴 겁니다-_-;;

rumic71//러일전쟁때 양군은 비슷한 세대의 무기체계였죠.

Allenait//장비, 병력 다 열세 아니었나요?

rumic71//그래도 있는 동안은 좀 나았죠.

델카이저//단발 라이플 정도로는 아무리 무장이 허접해도 17배나 많은 적군의 공격을 저지하는 게 좀 난감합니다. 비슷한 규모의 적이라면 몰라도 이쯤 되면 연발소총에 기관총이 필요했죠. 우금치에서는 관군도 2700(일본군 200 포함)에 개틀링도 4정이나 있었습니다.

瑞菜//이학승을 보낸 게 홍계훈이었습니다(공을 세우려고 자원했다고도 합니다만). 뭐, 살아남았으면 결국 의병 토벌이나 이런 쪽으로 나가게 되었겠죠.

rumic71//베트콩은 저렇게 대규모가 아니긴 했죠.

이준님//
1. 저도 대학교 갈 때까지 그 "동학군"이 "사칭한 도적떼"인줄 알았습니다.
2. 음, 생존자의 증언이라고 다 믿을 수는 없는 게 사실이죠. 확실히 저 스스로의 공부가 더 필요할 듯.
3. 꼭 읽어봐야겠습니다.

ZECK-LE//러일전쟁 때 서울에 입성하는 일본군을 상대할 때가 최고 히트지요.

我行行//죽창부대는 아니었습니다. 동학군 일선병력은 화승총을 들었죠.
개틀링은 총알이 떨어지기보다는 동학군이 원체 개돌을 하니 1정만으로는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았던 듯 합니다.

rumic71//동학군을 무지렁이 농투성이로 본 게 최고 패인이었지요.

천지화랑//1회 전투에 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겠죠.

네비아찌//대포에 맞아 바로 옆에서 수십 명이 한 방에 쓰러지는 걸 보고도 "천둥치는 소리에 놀라 기절한 거여! 금방 다시 일어날 거여!"하고 달려갔다는 계속 이야기도 있으니까요.
뭐, 총 맞고도 계속 달렸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알렉세이//의화단은 의화권을 수련하면 총알을 "튕겨낸다"고 믿었으니 그보다는 합리적일지도 모릅니다(...)

獨步//러시에 대책 없....

瑞菜//그쪽은 모르는 분야군요.

B군//그럴 수 있는 가능성은, 경군 장수가 탈영해서 동학군에 투항하는 수밖에 없을 겁니다-_;;; 그리고 가족은 "삼족을 멸해라!" 크리로(먼산)

asianote//가능은 합니다. 제가 적은대로라면.

다시 B군//음, 확실히 네비아찌님 말씀대로 정치적 이념과 종교적 이념에는 차이가 있으니까요. 그래도 관군에게 "우리끼리 싸울 수 있는가"하고 설득하는 글을 보낸 걸 보면 관군이 투항했을 경우 받아들였을 것 같습니다.

다시 네비아찌//옙, 맞는 말씀이십니다.

천지화랑//서울 올라가려고.....-_-;;;
사실 조선판 의화단 사건이라고 불러도 무리는 아닐 거예요.
Commented by 한뫼 at 2009/05/26 23:34
이것이야 말로 인해전술!!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9/05/27 00:01
인해전술이죠, 분명히(...)
Commented by 위장효과 at 2009/05/27 12:44
닥돌해오는 거 보고 개틀링 손잡이-방아쇠죠 이게-를 열라 돌리다가 과열에 송탄불량으로 개틀링건이 퍼졌을 수도 있겠군요.

NGC의 다큐들이 이래저래 욕도 먹지만 기관총의 역사를 다른 다큐를 보니까 개틀링이 무턱대고 빨리 돌리는게 장땡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뭐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던 개틀링에 모터 달아서 돌려보니 분당 천 8백발이라는 엄청난 발사속도가 나온데 감명(??)받은 미군이 전투기용 M61 벌칸에 미니건에 GAU-8등등을 만들기는 했지만요^^;;;.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9/05/27 17:12
그랬을 수도 있고, 탄창교환에 시간이 걸렸을 수도 있지요. 어쨌거나 기관총이라도 한 자루로는 역시 벅찬 모양입니다^^;;
Commented by 하회탈 무사 at 2010/01/26 22:57
이들이 무지한 광신도였다는건 전봉준 공초록에서도 나오지 않습니다 전봉준은 전투당시 동학인은 적었고
전국각지에서 모여든 의병들이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들이 정말 주문의 힘이나 부적을 믿었을까요 ?
2대 교주 최시형은 부적 태워서 물에 타먹이는 이런 미신적이나 주술적인걸 다 동학에서 다 없애버렸다고 합니다(도올 김욕옥 선생님한말)
이들이 미신을 믿고 싸웠다면 닭장태는 만들지도 않았겠죠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10/01/27 00:04
동학도들이 일본군의 총탄을 막으려고 주술에 의존했다는 이야기는 당시 봉기 현장에 있었던 미국인 선교사의 기록에도 나옵니다. 하회탈 무사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교주 최시형이 주술적 요소를 제거했다는 도올 김용옥의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해도 동학교단 전체에서 시행된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현재까지 제가 읽은 책들을 근거로 판단할 때, 말씀하신 김용옥 씨의 이야기는 별로 믿음이 가지 않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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