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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 오류 시리즈 - 4차 십자군이 어디를 점령했다고?
*어떤 형태로든 본 포스팅의 전재를 금지합니다. 펌, 스크랩, C&P 모두 금지입니다.

그리스-로마에서 시대를 좀 많이 뛰어넘어 이번에는 중세로 넘어갑니다. 십자군 전쟁입니다^^



십자군 기사의 대열
(사진출처 : http://www.equalityloudoun.org/images/crusade.jpg)


다들 아시다시피 십자군 전쟁은 성지를 수복한다는 핑계로 약 200여 년에 걸쳐서 이루어진 서구의 군사원정입니다. 대규모 원정만 8차례가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패하여 팔레스타인 일대는 다시 이슬람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한 교과서의 오류는 특이하게도 사진이 아닙니다. 교과서 본문입니다-_-;;


해당 페이지 내용을....적어서 올리는 것보다는 찍는 게 낫겠군요.



앞부분 절반은 교과서 지문 내용이 맞습니다만, 중간 이후에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베네치아 상인은 계약 위반과 빚으로 궁지에 몰린 십자군에게 기발한 제안을 해 왔다. 얼마 전에 헝가리가 점령한 콘스탄티노플을 십자군이 다시 찾아 콘스탄티노플의 상권을 장악할 수 있게 해 주면 계약 위반과 빚 문제를 따지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콘스탄티노플?!?!?!

중세사에 좀 관심이 있으신 분이라면, 저 부분이 얼마나 크게 잘못된 건지 바로 알아채실 겁니다. 콘스탄티노플이라고요? 헝가리가?

로마시대 이후 콘스탄티노플이 적의 공격으로 함락된 것은 단 두 차례 뿐입니다. 그 첫번이 1204년 제4차 십자군의 공격으로 인한 것, 그리고 두 번째가 1453년 오스만 투르크의 공격으로 인한 것이죠. 헝가리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럼 저 부분의 맞는 이야기는? 일단 4차 십자군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있겠네요.

-4차 십자군의 성립
4차 십자군의 결성은 몇몇 유력한 프랑스 귀족들이 연맹함으로서 이루어졌습니다. 샹파뉴 백작 티보(Thibaut)가 1199년 11월 28일에 자기 소유의 성에서 마상시합을 열었는데, 이때 여기 참석했던 귀족과 기사들이 티보의 선창에 따라 "더 이상 시합을 위해 무기를 들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들겠다"고 서약한 데서 시작이 됐지요. 볼로냐 백작 루이,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 등 프랑스 왕에 버금간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부유하고 강력한 귀족들이 합세하자 계획은 점점 구체성을 띠어갔지요.

이들은 이제까지의 십자군이 겪은 전례로 보아 육로로 이동한다는 것은 곤란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3차 십자군에서 잉글랜드 왕 리처드 1세가 했던 것처럼 해로를 택해 성지로 가기로 합니다. 육로를 이용하는 것은 여정이 너무 길어질 뿐 아니라 위험하기도 했거든요. 이에 반해 해로를 이용하면 보다 훨씬 빠르고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이들 귀족들은 리처드왕과 달리 자신들의 배를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누군가의 배를 빌려야 했지요. 그리고 이를 제공할 수 있는 능력은 이탈리아 최대의 해운국인 베네치아밖에 없었습니다. 제노바나 피사도 십자군의 수송을 맡은 적은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였거든요. 하지만 이번 십자군에 참가할 인원은 기사와 병사를 합쳐 33,500명에 달했기 때문에 베네치아 아니면 그 누구도 수송할 수 없었습니다.

이에 십자군의 대표들은 직접 베네치아로 가서 계약을 체결합니다. 33,500명의 사람과 4,500마리의 말을 이집트까지 태워다 줄 배와 1년간 먹을 식량을 베네치아가 마련하는 대신 귀족들은 8만 5천 쾰른 마르크에 달하는 요금을 4회로 분할 납부한다는 것이었죠. 이는 정당한 계약에 합리적인 대가였고(바가지가 아니었습니다), 프랑스 귀족들 쪽에서도 전혀 이의가 없었습니다. 십자군측이 낼 대금의 지불은 다음해인 1202년 4월까지, 베네치아측이 마련하는 배와 식량의 준비는 6월 24일까지 완료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여기에 베네치아 스스로도 국가 원수가 50척의 군함, 6천 명의 병사를 데리고 참가하기로 약속했습니다. 조건은 정복한 땅의 절반을 베네치아가 갖는 것. 십자군으로서야 환영할 일이었으므로 곧바로 받아들였습니다.

한편 십자군의 목표가 이집트라는 것은 대외적으로는 비밀이었습니다. 지도자인 귀족들은 이슬람 세력의 근거를 약화시키려면 그 본거지인 이집트를 공격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살라딘도 원래 이집트의 술탄이었습니다), 일반 대중의 생각은 달랐기 때문입니다. 십자군이라면 당연히 예루살렘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 당시의 일반적인 인식이었고, 성지가 아닌 이집트로 간다는 것이 알려지면 이탈자가 속출할 것이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었죠. 게다가 도착 장소를 비밀로 함으로써 이집트의 무슬림들을 방심시키려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4차 십자군의 실현

헌데 다음해인 1202년 봄, 십자군이 실제로 출발할 때가 되자 문제가 생겼습니다. 베네치아에 약속대로 모인 십자군의 수가 예정된 규모의 1/3인 1만 명을 좀 넘는 숫자에 불과했던 거죠. 애초에 3만 명이 넘는 군대를 모은다는 계획 자체가 무리였고(십자군에 참가하겠다고 서약한 사람의 수야 20만이 넘었습니다만, 제3차 십자군에 참가한 프랑스 왕 필립 2세가 겨우 2천 명을 동원한 시대였죠), 게다가 어디선지 모르지만 십자군의 행선지가 팔레스타인이 아닌 이집트라는 사실이 누설되면서 실제 출발한 사람들 중에서도 중도에 방향을 틀거나 포기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지도자들이 우려했던대로 이집트로 가는 십자군에는 합류를 거부하고 바로 팔레스타인으로 간 거지요. 그뿐 아니라 십자군의 최초 주창자였던 샹파뉴 백작이 그해 안에 26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해 버린 것도 타격이었습니다. 그가 내기로 한 돈의 상당액이 허공으로 날아갔고, 십자군 참가를 조건으로 그에게 유산을 받은 상당수의 기사들은 먹튀를 했습니다(...)

행선지 누설에 대해서는 베네치아 측의 음모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당시 이집트의 술탄과 우호협정(이집트가 교역상의 특권을 부여하는 대신 베네치아는 서유럽의 이집트 침공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약속. 당연히 십자군의 프랑스 귀족들은 이런 혐정의 존재 자체를 몰랐지요)을 맺고 있던 베네치아로서는 이집트를 공격할 의사가 애초에 없었다는 거죠. 즉 행선지가 누설되면 당연히 이슬람 측의 방어가 강화될 것이고, 십자군으로서는 원정을 취소하지 않는 한 부득불 목적지를 이집트에서 팔레스타인으로 바꿔야 할 것이었습니다. 일이 이렇게 돌아가면 베네치아는 이집트와 십자군 양측과 동맹을 맺고 그 누구도 배신하지 않게 되는 것이니, 비합리적인 선택은 절대 하지 않는 베네치아다운 해결책이 되는 거죠.

하지만 문제는 참가자의 수가 줄면서 조달할 수 있는 자금의 규모도 격감했다는 겁니다. 병사한 샹파뉴 백작을 제외한 애초의 주창자들은 모두 왔지만 그래도 참가자가 너무 적었고, 심지어는 각자 개인 몫의 뱃삯도 지참하지 않은 사람이 있어서 십자군은 배를 탈 수 없었습니다. 베네치아측은 애초의 약속대로 33,500명의 사람과 4,500마리의 말을 나를 수 있는 배를 완벽하게 준비했는데, 십자군은 돈을 치르지 못했기 때문이죠. 베네치아측은 8월까지 기다려 주었습니다만, 결국 독촉을 받게 되자 고심하던 귀족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현금을 몽땅 털고 귀금속으로 된 그릇과 집기까지 모조리 긁어모았으나 그래도 34,000 마르크가 부족했습니다. 정말 주머니의 먼지까지 털었는데도 부족했죠.

베네치아로서도 할인해 준다든가 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애초에 가격 자체가 바가지가 아닌 합리적인 수준에서 결정된 데다가, 십자군과의 계약을 완수하기 위해서 지중해 전역의 상선 운항을 중단하고 배를 긁어모았으며 아예 새로 건조한 배도 수백 척이나 되었거든요. 게다가 베네치아의 성인 남자 절반 이상이 승무원이나 병사로 이 십자군에 참가...이걸 할인해주었다가는 그 엄청난 손해를 모조리 베네치아가 뒤집어쓰게 됩니다. 애초에 계약을 어긴 잘못은 십자군에게 있었지 베네치아에 있는 게 아니었고, 이를 잘 알고 있던 기사들도 돈을 마련하느라 고심할지언정 베네치아에 할인을 요청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무리 십자군을 쥐어짜려고 해 봐야 동전 한 닢도 더 나올 게 없다는 사실이 명확해지자 베네치아측이 대안을 제시합니다. 십자군이 도시 하나만 정복해 주면 갚을 수 있는 능력이 생길 때까지 남은 빚의 상환기일을 연기해 주겠다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이 도시는 위의 모 출판사 교과서에서 언급한 "콘스탄티노플"이 아닙니다-_-;;


-4차 십자군의 탈선


노란 네모꼴이 베네치아, 빨간 네모꼴이 자라(현재의 명칭은 차다르(Zadar)임)의 위치.
(사진출처 : http://www.freewebs.com/villa-mirella/kozino%20on%20map%20quest.bmp)


자라(Zara)는 오늘날에는 크로아티아 공화국에 속하는 달마티아 지방의 수도로, 본래는 비잔티움의 영토였으나 전략적으로 너무 중요한 위치에 자리잡은 탓에 10세기 이후 베네치아는 계속 이를 탐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민들은 베네치아에 종속되기를 거부하여 계속 헝가리 왕실과 협력하며 맞서고 있었고, 이때는 1183년에 반란을 일으켜 다시 독립한 상태였죠. 4차 십자군 이후에도 반란과 재정복의 양상은 계속되어, 베네치아가 자라를 완전히 획득하는 것은 한참 후인 1409년의 일이 됩니다. 헝가리 왕에게 돈을 주고 아예 사 버리지만, 그 이야기는 주제가 아니므로.

하여간 이 도시는 바다 쪽으로도 든든한 성벽을 두르고 있었기 때문에 베네치아로서는 쉽게 되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1만에 달하는 십자군의 무력이라면 간단하게 도시를 점령할 수 있을 것이므로 '이 도시를 되찾도록 도와주면 나머지 빚의 상환을 연기하주겠다'는 베네치아측의 제안은 달콤한 유혹이었지요.

하지만 십자군으로서는 넙죽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자라를 확보하고 있는 헝가리 왕 에메릭(Emeric, 재위 1196~1204)은 가톨릭이었고 십자군에 참가하겠다는 서약까지 한 사람이었거든요. 물론 자라 시민들도 전부 가톨릭, 게다가 종교를 명분으로 내세우고 결집한 십자군이 같은 그리스도 교도의 영토를 다른 이유로 아닌 돈 때문에 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빚 갚아!"


라는 말은 무섭고도 무섭지요(...) 유태인에게 빌린 돈이라면 쇠사슬이나 칼로 갚아도 되겠지만 베네치아 상대로 그런 수단이 통할 수는 없는 법이므로, 십자군 지휘부는 결국 자라 공략 참가에 동의했습니다. 그러고 나서야 무려 10월 8일까지 반 년 가까운 시간을 리도 섬에 발이 묶여 있던 십자군은 배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치안 및 방역 문제 때문에 병사들은 베네치아 시내에 출입하는 것 조차 금지되어 있었거든요.

대규모 십자군이 자라 성벽 밖에 포진하자 시민들은 처음에는 곧바로 항복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십자군 내부에 분열이 있었지요. 십자군 중 일부는 베네치아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것에 심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고, 이들의 대표격인 시몽 드 몽포르(Simon de Montfort)라는 프랑스 귀족이 항복 조건을 교섭하러 온 시민 대표들에게 '십자군은 베네치아의 공격을 돕지 않을 것'이라고 귀띔을 해 주었습니다. 그럼 베네치아군만 막으면 된다고 생각한 시민들은 곧바로 항복 의사를 뒤집었죠. 자라 시민들의 항복 조건을 그대로 받아들일 생각이던 베네치아측은 격노했고 십자군 수뇌부 역시 당황했습니다. 그들은 가톨릭 도시를 공격하는 것이 죄악이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베네치아와의 약속도 지켜야 했거든요.
하지만 이들을 더 화나게 한 것은 수뇌부의 의견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행동한 시몽의 행동이었습니다. 시몽의 독단적인 행동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고, 그의 행동을 교정하기로 마음먹은 귀족들은 약속대로 베네치아군의 자라 공격에 동참했습니다. 전투가 시작된 지 1주일도 안 지나서 자라는 함락되었고, 화가 난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4차 십자군 전체를 파문(가톨릭 교도로서의 자격을 박탈하는 것)했습니다. 당황한 기사들은 교황에게 사자를 보내 부득이한 행동이었음을 알리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고, 교황도 이들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처지를 받아들여 파문을 해제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베네치아인들은 "베네치아의 국가안보를 위하여 당연한 일을 했으므로" 사죄 따위는 하지 않았고 파문 따위는 귓등으로 흘려 넘기고 말았지요.

이제 1202년 겨울을 자라에서 보내고 다음해 봄에 출발하려는 십자군에게 사자 한 사람이 찾아옵니다. 1203년 1월 1일에 자라를 찾아온 이 손님은 형의 반란으로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자리에서 폐위당하고 실명된 이사키오스 2세 앙겔로스(Isaac II Angelos)의 아들, 알렉시오스였습니다. 알렉시오스는 십자군이 자신의 큰아버지 알렉시오스 3세로부터 비잔티움의 옥좌만 찾아준다면 20만 마르크의 돈을 군자금으로 제공하고 500명의 기사, 1만 명의 보병을 성지에 상주시키겠다고 약속했지요.

십자군 수뇌부는 이 조건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당한 계승자를 옥좌에 앉히는 "좋은 일" 하나만 하면 자금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뿐 아니라 십자군의 병력도 강화할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상당수의 병사들은 여전히 엉뚱한 길로 가는 데 반대했습니다. 자라를 공격했다 파문당한 기억이 아직 새로운데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다가는 어떤 일을 당할지 몰랐고, 십자군 원정도 이미 너무 늦어져서 기다리는데 지쳐 있었거든요. 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지휘관들이 알렉시우스와 조약을 맺자 이들 병사들은 반발, 수백 명의 병사들이 진영을 이탈하여 독자적으로 성지로 향합니다. 아예 다 때려치우고 집으로 가버린 사람도 수백 명이 넘었고요.

십자군 원정이 우선이니 비잔티움 황실의 문제에 간섭하지 말라는 교황의 교서에도 불구하고 십자군은 알렉시우스와 함께 비잔티움을 향했고 원래 예정된 출발일보다 딱 1년이 지난 1203년 6월 24일에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합니다. 십자군은 알렉시오스 3세를 내쫓고 폐위되었던 이사키오스 2세와 탈출했던 알렉시오스를 황제자리에 올리는 데는 성공했으나, 문제는 이들이 애초의 약속을 실행할 능력이 없었다는 거죠. 새 황제는 십자군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백부를 편든 자들의 재산을 몰수하고도 모자라서 전임 황제들의 묘를 열어 보석을 꺼내고 교회의 성구를 몰수해야 했습니다. 얼른 빚을 받아내지 못하자 십자군의 원정은 또 늦어지게 되었죠.

하지만 이는 당연히 비잔티움인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죠. 자신들의 부를 약탈해가는 데다가 감히 황제에게 예를 차릴 줄도 모르는 무엄한 자들에 대한 비잔티움인들의 적개심은 커져만 갔습니다. 십자군 입장에서도 주기로 한 돈을 주지 않는 비잔티움이 고와보일 리 없었습니다. 게다가 십자군 역시 그 돈으로 빚을 갚아야 했으니까요. 여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나마 십자군을 배려하려고 노력하던 알렉시오스 4세가 쿠데타로 암살당하면서 십자군은 한층 더 궁지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십자군은 결정적으로 유혹에 빠집니다. 눈앞에 세계 최대, 최고로 크고 부유한 도시가 있었고 그 도시는 자신들에게 줄 돈을 주지 않았거든요. 여기에 자신들의 상업적 이익을 위해 교두보를 확보하고자 한 베네치아와 로마 교회의 영향력 확대를 꿈꾼 성직자들의 부추김("자신의 황제를 살해한 자들을 토벌하는 것은 정당하다")이 더해지자, 십자군은 결국 유럽 역사상 최대의 범죄적 행위 중 하나를 저지르게 됩니다. 이들의 콘스탄티노플 파괴와 약탈로 인해, 수많은 고대 유산이 파괴되어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는데, 그에 대한 이야기는 워낙 유명하니 여기서는 생략하겠습니다.

하아...짧게 하자면 딱 한 줄로 끝낼 수도 있는 소재인데, 너무 어이없어서 죽 쓰다 보니 좀 많이 길어졌군요. 쓸데없이 길어진 듯 해서 죄송^^;;

덤 : 그 페이지 밑에는 이런 내용도 있습니다.

헌데 프랑스의 소년 십자군은 파리까지만 갔고, 거기서 왕에게 편지를 전달한 후 해산했습니다. 마르세이유에서 노예로 팔린 것은 독일의 소년 십자군입니다. 제노바에서 해안을 따라 가다가 마르세이유까지 갔던 거죠. 프랑스인이라 마르세이유로 간 게 아닙니다.



참고자료 :

라이프 인간 세계사 vol.15 - 비잔티움, 필립 셰러드, 한국일보 타임라이프, 1985
비잔티움 연대기 vol.3 - 쇠퇴와 멸망, 존 줄리어스 노리치, 바다출판사, 2008
십자군 - 기사와 영웅들의 장대한 로망스, 토머스 F 매튼, 루비박스, 2005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 아민 말루프, 아침이슬, 2002

위키피디아(영) - Zadar

by 슈타인호프 | 2009/01/16 18:14 | 세계중세(~1453) | 트랙백 | 덧글(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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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어부 at 2009/01/16 18:23
십자군 단행본을 저하고 같은 넘을 보셨군요. 저 얘기는 '바다의 도시 이야기'에도 상당히 잘 나와 있습니다(시오노 할마시 책 치고는 세부 문제가 거의 없습니다).
Commented by AprilChild at 2009/01/16 18:35
아... 참 재미있군요. 이시기 유럽은... 뭔가 좋은 책 없을까나요? 저 나열하신 책들부터 읽어야하나(...)
Commented by 피그말리온 at 2009/01/16 18:36
헝가리가 점령한 (자라를 다시 뺏어달라고 요구를 했고 십자군은 이를 들어주었지만 교황의 파문으로 유야무야 되어버렸고 하는 수 없이 황제자리를 놓고 다투던 알렉시오스를 도와) 콘스탄티노플을 다시 찾아 블라블라~

엄청나게 생략이 되었군요....ㅋㅋㅋㅋ

Commented by 곤충 at 2009/01/16 18:50
역시 빚은 무서워요.
Commented by azurebird at 2009/01/16 18:52
'베네치아인이 먼저 기독교인은 그 다음' 이라고 했던가요?
Commented by 뚱띠이 at 2009/01/16 19:40
역시나 빚은 무서운 것!!!!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9/01/16 19:50
어부//옙 거의 같습니다^^
그래도 시오노 할마시는 역시 베네치아에 안 좋은 이야기는 상당히 많이 뺐더군요.

AprilChild//음, 저건 4차 십자군에 대해 다룬 책만 몰아놔서 그래요. 어느 장르를 원하시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피그말리온//그쵸 ㅋㅋ

곤충//무서운 겁니다 ㄷㄷㄷ;;

azurebird//그랬다고 하죠

뚱띠이//무섭습니다!!!
Commented by 미스트 at 2009/01/16 20:20
푸하하하하하핳하하핳하하하핳하하하
가운데 토막을 잘라내버리고 압축하다보니
콘스탄티노플이 공격당한 것이 베네치아의 죄로 넘어가버리는군요.
Commented by 花郞 at 2009/01/16 20:24
무리한 욕심이 불러온 비극의 연속이군요
Commented by 나아가는자 at 2009/01/16 20:25
비잔틴제국은 잦은 내부의 음모때문에 많이 어긋났죠. 결국 십자군을 불러들인 것도 자신들 내부의 정치다툼이니...
+ 제가 십자군이었다면, 20만마르크가 안되도 적당히 몇만 마르크만 먼저줬다면, 그거 먹고 일단 고 했을거 같은데..
+ 그런데 20만 '마르크'였나요? 플로린이나 다른 화폐였던거 같은데 언뜻 기억이 안나서...
Commented by 초록불 at 2009/01/16 20:28
소년 십자군이야 그렇다쳐도... 십자군 문제가 워낙 복잡하니 차라리 그냥 넘기든지 할 것이지, 아주 제대로 삽질을 했군요.
Commented by 프리앙 at 2009/01/16 20:44
그런데 만명 남짓한 인원으로 콘스탄티노플이 털린건가요?;;; 얼마나 비잔틴이 막장이였길래...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9/01/16 21:15
미스트//웃기게 넘어가는거죠 ㅋㅋㅋㅋ

花郞//그렇게 된 셈입니다.

나아가는자//마르크 화폐 기준으로 그만한 액수가 되기만 하면 다른 화폐로 지불해도 상관없었습니다. 그리고 몇만 마르크 먼저 받은 걸로는 빚을 갚기에도 모자랄 뿐더러 콘스탄티노플에서 다시 팔레스타인까지 갈 뱃삭이 없었지요.

초록불//정말 제대로 삽질입니다. 어이가 없죠.

프리앙//수비하는 비잔티움군은 3만명 정도였습니다만, 정말 막장이긴 했습니다.
Commented by 우마왕 at 2009/01/16 21:18
하지만 십자군으로서는 넓죽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 넓죽 아니고 넙죽
Commented by 을파소 at 2009/01/16 21:27
대출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며 불가피하게 받아야한다면 철저히 계획을 세워야한다는 교훈을 주는군요.(응?)
Commented by 스톡홀름 at 2009/01/16 21:47
당시 마르크는 화폐 이름이 아니라 은 2/3파운드에 해당하는 명목가치였죠. 중세 당시엔 1마르크면 일가족이 1년먹고 살 엄청난 돈이었습니다.
Commented by 스톡홀름 at 2009/01/16 21:57
십자군이 지불하기로 한 액수는 1190년경 잉글랜드왕 평상시 세수 3만마르크의 2배가 넘습니다.

그런데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에서 약탈한 40만마르크는 잉글랜드왕의 연간 수입의 13배였습니다. 빚을 갚고도 남아서 모두 부자로 만들어줬죠.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9/01/16 22:20
우마왕//아아, 감사.

을파소//그렇지요, 자신없는 돈을 빌리면 안 되는 겁니다 ㅎㅎ

스톡홀름//네, 그래서 굳이 마르크화가 아니라 어느 나라 화폐로 지불해도 상관없었다더군요. 현물 지불도 꽤 있었고.
약탈한 40만 마르크에서 신임 황제의 몫 1/4을 빼고 반분해서 15만, 거기서 미상환 3만 4천 마르크에 연체이자 1만 4천 지불하고도 10만 마르크가 남았다니 엄청난 것 아니겠습니까.
Commented by 히나사키미쿠 at 2009/01/16 22:24
근데 약탈하는 동안 교황은 가만히 있었나요?
Commented by 천지화랑 at 2009/01/16 22:49
'비잔티움'은 콘스탄티노플의 옛 이름이고 제국 이름은 '비잔틴'이라고 쓰지 않나요? -ㅁ-;;

쨌거나 이건 뭐 헝가리판 환단고기도 아니고....[먼바다]
Commented by 끝소리 at 2009/01/17 00:20
통상적으로 '비잔틴 제국'이라고 쓰지만 '비잔틴'은 '비잔티움'의 영어식 형용사형에서 나온 것이므로 '비잔티움 제국'이라고 부르자는 움직임이 있고 얼마 전에 '비잔티움 제국사'라는 번역서가 나오면서 더 탄력을 받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계속 지켜봐야 할듯.
Commented by 천지화랑 at 2009/01/17 00:53
말하자면 '비잔티움의 제국'이랄까 하는 형식인건가요?
Commented by 끝소리 at 2009/01/17 01:13
그렇죠. 영어 같은 언어에서는 이런 이름에 형용사형을 써서 Roman Empire, Russian Empire 등으로 부릅니다. 하지만 한국어에서는 '로만 제국', '러시안 제국'이라고 하지 않고 명사형을 그대로 써서 '로마 제국', '러시아 제국'이라 하니 같은 이유로 '비잔티움 제국'이라 하자는 것이죠.
Commented by 행인1 at 2009/01/16 23:11
십자군이라기 보단 어디 순회 공연 다니면서 사고치고 잔금 못치러서 싸우는 3류 공연단 보는듯 하는군요.
Commented by 윙후사르 at 2009/01/16 23:45
심하게 중간 생략이 많이 된 듯...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9/01/17 01:26
히나사키미쿠//교황은 분명히 콘스탄티노플에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뭐 이미 저질러진 일을 어떻게 할 수는 없지요.

천지화랑//끝소리님이 잘 설명해 주셨네요.

끝소리//상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행인1//4차가 좀 저런 면에서 처량했어요. 역시 왕이 참가하지 않으니 비용이....

윙후사르//뭐 그런 거죠.
Commented by 위장효과 at 2009/01/17 10:29
시오노 할매야 뭐 자기가 좋아하는 진영이 잘하면-역시 최고삼!, 반대로 악행은-피치못한 결정이었삼! 하는 빠순이 할매니까요 뭐.

(그 논리로 덴노헤이카반자이! 대동아공영권재건! 을 은근슬쩍 들먹거리니까 싫은 거지요.)
Commented by StarSeeker at 2009/01/17 11:36
점점 막장으로 몰리는 제국이지만, 그래도 돈은 제법 있었던 모양 입니다.
무려 40만 마르크나 약탈했다고 하니...
그나마 200년후에는 돈도 없는, 허울뿐인 제국과 황제...-_ㅠ
Commented by 친한척 at 2009/01/17 13:20
교황도 솔직히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면 정교통합을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르니 적극적으로 반대하진 않았죠.....
Commented by 계원필경 at 2009/01/17 20:01
제 4차 십자군은 철저한 빚더미 집단...(경제가 종교보다 중요하다는...)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9/01/18 02:52
위장효과//아무래도 집필자의 성향이란 것이....ㅋ

Starseeker//지금은 수입이 줄었다고 해도 과거 천년간 비축한 부라는 것이 있었으니까요^^

친한척//어디까지나 사후의 이야기입니다.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교황도 그렇게까지 과격한 수단은 생각하지 않고 있었지요.

계원필경//역시 돈도 없이 너무 크게 사업을 벌이면 안 되는 겁니다 ㅎㅎ
Commented by 들쮜 at 2009/01/31 13:21
이제서야 읽게 되었네요. 좋은 글 잘보고 갑니다.
단, 마 라트리에가 1860년에 제기한 베네치아와 이집트 술탄과의 밀약... 의 '음모론' 은 19세기 말엽, 아노토에 의해 부정되지 않았나요?
출처: A. A Vasiliev, History Of The Byzantine Empire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9/01/31 13:34
아, 제가 확인한 책들이 국내에서 출간된 대중서적 중심이라 그런 연구들이 반영이 안 된 것 같습니다. 지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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