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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독립을 위한 타국의 무력 지원 - 독일과 일본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프랑스가 지원했고 조선의 독립을 중국이 지원했듯이, 인도의 독립을 지원한 것 역시 영국과 전쟁을 하고 있던 독일과 일본이었습니다. 이중에서 인도 국민군과 찬드라 보스의 사례는 유명하지만, 별로 유명하지 않은 다른 사례가 또 있더군요.





처음 이야기할 것은 1차 세계대전 당시 있었던 지원사례입니다.

1차 대전 당시, 해외에 있었던 인도인들의 상당수는 영국이 전쟁을 하는 것은 인도가 혁명을 일으켜 독립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때는 아직 간디가 전국민적인 비폭력 운동을 벌이기 전이었거든요. 그중 독일에 있던 인도인들은 비렌드라나트 챠드바티야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조직을 결성, 무기를 반입하여 인도 내에서 혁명봉기를 기도합니다. 이들은 독일정부로부터 무기, 탄약, 자금 원조를 받아 이것들은 매버릭(SS Maverick, 1,749t)호라는 유조선에 싣고 인도로 반입하려고 시도했습니다.

매버릭호는 1890년에 미국 볼티모어에서 건조되어 뉴욕 스탠다드 오일(Standard Oil of New York)에서 처음 인수해 운영했었고, 1899년에 폭발사고를 한 번 겪은 후 수리되어 운용하다가 매버릭 기선회사(Maverick Steamship Company)에 팔렸습니다. 그리고 1915년 4월, 매버릭 기선회사는 이 배를 독일제국해군(Kaiserliche Marine)의 장교인 F. 젭센(F. Jebsen)에게 임대했는데, 젭센은 또 다른 독일의 비밀보급함인 마자틀란(SS Mazatlan)호의 지휘관이기도 했습니다.

독일측의 계획은 이 배에 무기를 실어 인도로 반입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독일 무기를 싣고 독일에서 인도로 가는 건 아니었어요. 그런 짓을 했다간 바로 영국 해군에게 나포당합니다(웃음). 크루프 사의 미국내 대리인인 한스 타우셰어(Hans Tauscher)가 프란츠 폰 파펜(히틀러와 함께 활동했던 그 파펜 맞습니다. 1차대전 중에는 미국에서 정보업무를 담당했죠^^)의 지시를 받아 미국에서 무기를 확보했고, 이 미제 무기가 인도에 원조될 예정이었던 겁니다. 사실 1915년 당시에는 미국이 중립국이었으므로, 독일인이 미국 배를 용선하거나 미국에서 무기를 구입하는 것 자체는 별 문제가 아니었지요.
매버릭호에는 무기 외에도 인도의 혁명운동가인 하리 싱(Hari Singh)과 4명의 동료들이 "페르시아인 선원"으로 위장하고 본래 승무원 25명과 함께 타고 있었고, 이들은 인도에서의 정치선전을 위하여 자신들이 속한 가다르 당(Ghadar Party)의 선전물도 싣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매버릭호는 직접 무기를 싣지는 않았습니다(유조선이 무기를 싣는다면 누구나 의심하겠지요?). 이들은 바다 중간에서 다른 배와 만나 그쪽이 싣고 온 무기를 인계받을 예정이었지요. 미국에서 직접 무기를 실어내는 이 역할은 애니 라센(Annie Larsen)호라는 스쿠너 선이 맡았습니다. 애니 라센호는 당시 내전중이던 멕시코에 무기를 밀수하러 가는 것으로 위장해서 미국과 영국 정보당국을 속이고 무기를 반출하는 데는 성공했는데, 그만 매버릭호와의 랑데뷰에 실패하고 맙니다. 본래 두 배는 1915년 3월에 멕시코 근해의 소코로 섬(Socorro Island)에서 만나 애니 라센호에 싣고 온 무기를 매버릭호로 옮겨실을 예정이었는데, 매버릭호가 그만 로스앤젤레스에서 드라이독에 들어가 수리를 하는 바람에 약속에 한 달 넘게 늦어버렸거든요. 결국 애니 라센호는 한 달 동안이나 하염없이 상대를 기다리다가 매버릭호를 찾으러 짐을 실은 채 샌디에이고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매버릭호는 하필 그때 약속장소에 도착했죠. 하지만 애니 라센호는 이미 소코로 섬에 없었고, 결국 매버릭호는 홀로 하와이를 향합니다. 기다리다 지친 라센호가 먼저 호놀룰루로 향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중간에 만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는데, 이미 보셨다시피 상대는 정 반대로 가고 있었죠. 애니 라센호는 여기에다 폭풍까지 만났고, 결국 워싱턴주의 호퀴암(Hoquiam)에 입항하는데 여기서 영국 정보기관의 귀띔을 받은 미국 세관으로부터 임검당해 모든 화물을 뺐기고 맙니다.
한편 매버릭호는 별 탈 없이 호놀룰루를 거쳐 자카르타에 도착합니다만, 무기를 가져오지 못했으므로 선전물을 인도에 들여보내는 임무만 수행하다가 1917년에 침몰했다고 합니다. 이때 외에도 작전이 여러 차례 시도되었으므로, 독일이 인도인들에게 제공한 소총은 총계 7만 5천정이 넘는다고 하네요. 그 외에 막대한 양의 탄약과 권총 및 기관총도 상당수가 제공되었다고 합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역시 독일, 이번에는 2차대전 당시의 일입니다.

이번 전쟁에서도 영국은 독일의 적이었으므로, 이번에도 독일은 인도에서 혁명을 일으켜 영국을 약화시키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미국이 초기부터 영국 편을 들었으므로 1차대전 때처럼 미국에서 무기를 조달해 인도로 보내는 식의 작전은 펼 수 없었죠. 그래서 이번에는 다른 방법을 사용합니다. 독일 내에 있는 인도인들로 군대를 편성해서 연합군과 싸우게 하려고 했는데, 이것이 바로 자유 인도군단(Legion Freies Indien)이었습니다. 사실 이 부대는 정말 제대로 된 전투부대라기보다는 정치선전을 위한 선전도구로서의 역할이 강했다고 할 수 있지요.

자유인도군단의 마크



하지만 일단 부대로 편성이 되긴 되었는데, 사실 정상적으로 독일에 체류하는 인도인의 수가 그렇게 대규모가 되기는 곤란했습니다. 하지만 독일은 다수의 인도인, 그것도 군사훈련을 받은 다수의 인도인을 확보하고 있었지요. 바로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포로로 잡은 영국군 소속의 인도 병사들이었습니다. 일단 선발된 27명의 장교가 베를린으로 불려갔고, 그 뒤에 포로들 중 자원자들을 중심으로 해서 6천명 규모로 편성이 됩니다. 포로들 외에 독일에 유학하거나 기타 이유로 체류하고 있던 인도인들이 영국을 타도하기 위해 자원해서 입대한 경우도 있다고 하고요.


도열중인 인도군단 병사들



이 독일군 부대에는 영국군 소속 인도인 부대와는 확연히 다른 원칙이 하나 있었습니다. 영국인들이 인도인들의 분열을 조장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종족별/종교별로 단위부대를 편성한 데 비해서 이 부대는 모슬렘, 힌두, 자트, 마라타, 라지푸트 등 제민족을 혼합편성했거든요. 이는 인도 독립운동에서 무투파의 영도자였던 찬드라 보스의 강력한 주장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함으로써만 전 인도인의 단결이 실제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었거든요. 부대원의 2/3는 모슬렘이었고, 나머지가 힌두교도 및 기타 소수민족이었다고 합니다. 시크교도의 비중이 꽤 컸다고 하네요.

그런데 이들 인도 출신 독일병사들은 실제 전투임무에는 거의 투입되지 않았습니다. 일부 분견대(보병 2대대 소속의 제9중대)가 이탈리아에서 파르티잔 소탕에 투입되어 종전시까지 버티다가 항복한 것 외에 주력은 노르망디 상륙 이전에는 국방군 소속으로 대서양방벽의 요새선 구축작업에 주로 동원되었고, 미영 연합군이 상륙한 후에는 친위대로 전속(44년 8월)된 후 약간의 전투를 겪으면서 내륙으로 후퇴하여 1944년 겨울에는 독일 본토로 들어갑니다. 사실 본래 예정되어 있던 이들의 임무 중에는 동부 이란에 낙하산으로 강하하여 지금의 파키스탄인 발루치스탄에 잠입, 선동과 테러, 사보타주를 벌이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만 이것 역시 제대로 되진 않았지요.

하지만 다음해 5월, 독일이 항복하면서 이들은 갈 곳이 없어집니다. 자유 인도 군단의 장병들은 논의 끝에 2.6km의 알프스 산길을 돌파하여 중립국인 스위스로 탈출하려고 했지만, 미군과 프랑스군에게 잡혀 영국군에게 넘겨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군 소속 모로코 병사들이 포로가 된 상당수의 자유 인도 군단 병사들을 학살했는데 그 숫자는 확실하지 않다고 하네요. 자기들도 식민지 출신이면서 왜 그랬을까...프랑스인 장교들이 사주했을까나요. 이후 영국군에 인수된 장병들은 인도로 송환, 반역죄로서 재판에 회부됩니다.


세 번째 사례는 2차대전에서 일본군 편에 선 인도 국민군(Indian National Army)입니다.

기념사진 한방



이쪽도 뭐 독일군 쪽과 비슷합니다. 이 부대 역시 말레이 전선에서 일본군의 포로가 된 영국군 소속 인도 병사들을 대상으로 자원자를 모집해서 편성했거든요. 이쪽은 독일군 쪽보다 규모가 커서 총 43,000명 규모의 부대가 편성되었고, 임팔 전투에도 투입됩니다.

임팔 작전 당시의 포스터



자, 그럼 이들 일본군과 인도국민군이 인도 국경에 근접했을 때 인도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먼저, 네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파시스트의 침략에는 저항한다! 일본군이 쳐들어오면 모든 것을 초토화하고 게릴라전을 수행하라!"
그 외에도 네루는 일본과 싸우는 중국 공산군을 위해 모금을 하거나 의료반을 조직하는 등 전쟁에 상당히 적극적으로 협조를 했습니다.

다음, 간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퇴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에는, 적에게 사용되지 않도록 곡물이나 가옥을 파괴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것들을 남겨놓도록 하시오. 그래서 만일 우리들이 공포에서 그러는 것이 아니고, 누구도 적으로 간주하지 않는, 말하자면 인도적인 동기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라면, 우리들이 가옥이나 곡물을 남겨놓는 것은 이성 있는 행위요, 희생이요, 또 용기이기도 한 것이다."

여기에 직접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온 챤드라 보스까지 합하면 세 가지 스타일의 독립 지도자의 모습이 나온다고 할 수 있겠지요 :)

하지만 결국 일본은 인도에까지 들어오지 못하고 패했고, 인도국민군도 잔존인원 약 16,000명이 다시 연합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이중에서 꽤 많은 숫자를 차지했던 버마인이나 말레이인 지원병들은 바로 석방되어 민간인으로 돌아갔지만 12,000명의 인도인 장병은 전원 인도로 실려가서 수감됩니다. 영국군은 이들 반역자를 피부색깔별로 분리해서 수감했는데, 이중 약 2400명의 "백인(white)"(?!?!)은 석방하고 나머지만 재판에 회부했다고 하는군요. 독일에서 끌려온 자유인도군단 장병들도 인도국민군과 함께 수감, 재판을 받았습니다.

이들 장병들은 물론 영국 당국의 입장에서 보면 반역자입니다. 하지만 인도 민중의 의견은 전혀 달랐죠. 이들은 방향은 좀 잘못되었을지언정 자유와 독립을 위해 몸바쳐 싸운 영웅들이었거든요. 이들 장병들이 유죄판결을 받는데 항의하는 시위가 주요 도시를 휩쓸었고, 결국 흥분은 군대 내에까지 파급되어 1946년 2월 18일에는 봄베이(오늘날의 뭄바이)에 주둔하던 함대에서 인도인 수병들이 차별대우 반대를 외치며 스트라이크를 시작했습니다. 이들이 영국인 장병을 하선시키고 농성을 벌이자 군 당국은 해산을 시도했지만 진압명령을 받은 인도인 병사들은 발포를 거부했고, 끝내 21일에 영국인 헌병대가 출동하여 7시간에 걸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결국 봄베이 시 전체가 혼돈 속에 떨어졌고, 카라치, 캘커타, 마드라스 등 다른 해군기지로까지 반란이 파급되었지요. 결국 지나친 희생이 나는 것에 공포를 느낀 회의파가 중재에 나서서 3일만에 반란을 일으킨 수병들을 투항시켰습니다(3일간의 전투로 인한 공식적인 사망자 숫자는 187명). 반란을 일으킬 수병들도 더 이상 싸울 능력이 없었으므로 "우리는 영국이 아니라 인도에 항복하는 것이다"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무기를 내렸지요. 결국 인도의 독립 의지를 확인한 영국은 1947년 8월 15일자로 인도를 독립시키게 됩니다.



덧 : 참, 위에서 이야기한다는게 까먹었던 거.

인도국민군 병사들의 재판 있잖습니까? 그때 그 병사들 변호한 변호사가 말입니다.

자와할랄 네루 바로 그 사람이었습니다. 변호사 업무 그만둔지 근 30년 만에 다시 법정에 선 거였다고 하더군요^^;

일본군의 침입에 그토록 강경하게 거부반응을 보였던 네루가 인도국민군 병사들의 변호에 나섰던 것만 보아도 인도국민군에 대한 인도인 일반의 감정이 어땠는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

그럼 이걸로 이번 포스팅은 마치겠다는~~^^/


자료 출처 :
위키피디아(영) -
Christmas Day Plot
Franz von Papen
Indian National Army
Indische Legion

단행본 -
인도의 독립운동(제3세계 문화총서 vol.4), 네루 외, 태창문화사, 1979

by 슈타인호프 | 2008/12/01 01:27 | 세계현대(~20XX) | 트랙백(1) | 덧글(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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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길 잃은 어린양의 놀이터 at 2008/12/10 16:15

제목 : 자유인도군단(Freie Indische Legion)
원래 슈타인호프님이 올려주신 글에 호응해서 올리려 했는데 좀 늦어졌습니다. 이준님도 관련 글을 한 편 써 주셨군요....more

Commented by 로리 at 2008/12/01 01:32
인도 관련으로 알면 알 수록... 간디는 어디까지나 얼굴마담이었고.. 네루는 절대 비폭력 주의자가 아닌 것 같더군요
Commented by 번동아제 at 2008/12/01 01:45
세계대전은 진정 세계대전이었던듯...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8/12/01 01:45
로리//네루는 절대 비폭력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언제든 기꺼이 무력을 사용했죠.

번동아제//예, 확실히 그런 듯 합니다.
Commented by 【天指花郞】 at 2008/12/01 02:34
네루가 간디를 모시긴 했어도 비폭력은 아니었단 이야기야 많이 나오죠. -ㅁ-;;

그나저나 저 백인의 정체는;;;;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8/12/01 03:54
혼혈인일까요--;;
Commented by 일곱 혼돈 at 2008/12/01 05:20
이란계일수도 있지요. 사산조 페르시아가 몰락하고 이슬람교의 박해를 피해 조로아스터교도들이 인도로 도망가서 파르시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그네들은 혈통 관리를 철저하게들 한다고 들었습니다. 프레디 머큐리 대인도 이란계 인도인 집안 출신이시라고 하고.
Commented by 곤충 at 2008/12/01 09:04
유대인부터 무슬림까지 백인계열로 의혹될 사람들은 차고차고 넘치니.....
그래도 생김새로 인종차별을 했다는 건 골치아픈 일이기는 합니다만;;;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8/12/01 09:54
일곱 혼돈//아, 그러고 보니 80일간의 세계일주에 나오는 파르시 교도 출신의 아우다 부인도 "백인처럼" 피부가 희었었지요.

곤충//어허, 그것도 "중요한" 겁니다^^
Commented by maat at 2008/12/01 09:39
뭐 간디야 알면 알수록 쓰레기에 가까운 인물로 변하는 사람이니.......
인도에 달리트를 지금까지 유지하게 만든 자중 하나가 간디죠. 달리트계급을 없애면
안된다고 단식투쟁한(뭐 이사람 주특기가 단식이죠ㅡㅡ:) 사람이니 뭐..
덕택에 카스트느 지금도 훌륭히 유지되고 아직도 인도에선 평균 하루에 2명정도의 달리트가
살해당하고 3명정도가 강간 당한다는 통계가 나오고 정부는 달리트니 당연하다는 입장입니다.
경찰은 우습게도 달리트 살해에 상당수가 직접 참여하고 있는 형편이고...
그많은 수행자는 도대체 무엇을 수행하는지도 모르겠고 간디가 원한 독립은 수드라까지만의 독립을 원한거죠.
재판에서 백인만 석방된 이유는 간단합니다.
카스트는 신부제도자체가 아주 악질스럽게 인종으로 나뉘어집니다.
4개중 상위 3개족인 브라만,크샤트리아,수드라가 아리아인종입니다.
막말로 아리아인은 뭘해도 귀하신 존재들입니다.
인도애덜이 날씨와 모래탓에 좀 꺼머죽죽해졌어도 영국,독일과 같은 원류의
아리아인 계통이고 이들이 지배계급이고 원주민은 카스트최하층인 수드라와
카스트에도 못들고 가축보다 아랫급인 달리트로 분류됩니다.
반역이건 뭐건간에 아리아계통은 닥치고 존중이고 원주민 계통은 뭘해도
닥치고 꿇어입니다요.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8/12/01 09:56
음, 그렇긴 한데 영국군 당국이 주관한 재판에서도 카스트에 따른 석방이 이루어졌을까는 약간 아리송하네요;;
Commented by 【天指花郞】 at 2008/12/02 00:16
세포이항쟁 이후로 부인을 남편 따라 화장하는 습관 정도를 제외하면 인도의 전통관습은 대부분 인정해 줬다고 들었습니다만.... -ㅁ-;;

영국이 인도 통치에 카스트제도를 이용했다면 뭐 저런것도 충분히 가능하겠죠.
Commented by 계원필경 at 2008/12/01 09:56
약간 빗나갔지만 제 1차 세계 대전 당시 아일랜드에도 독일이 지원할려고 했었죠(다만 발각되어 모두 사살...)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8/12/01 09:57
독일의 해외혁명 지원이 성공한 사례는 하나뿐입니다. 러시아죠^^
Commented by 계원필경 at 2008/12/01 09:58
아... 그거야 무려 '레닌(과 나중에 독일을 물먹일 인간 백정)'을 파견했으니(...)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8/12/01 10:05
음, 스탈린은 레닌과 함께 가지 않았습니다. 혁명 시점에서 스탈린은 시베리아에서 유형을 받고 있었고, 레닌보다 먼저 모스크바로 돌아가 프라우다의 논설위원으로서 임시정부에 협조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죠. 레닌이 귀국하자마자 반임시정부로 돌아섭니다만^^
Commented by 계원필경 at 2008/12/01 10:06
아... 그러면 트로츠키랑 같이 갔나요??? (페트로그라드의 핀란드역에 도착한 사람 명단이...)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8/12/01 10:13
트로츠키는 2월 혁명 당시 미국에서 러시아 이민을 상대로 하는 신문 편집을 하고 있었습니다. 레닌이 4월 3일(구 러시아력, 그레고리오력으로 4월 16일)에 핀란드역에 도착했고 트로츠키는 5월 4일(그레고리오력 5월 17일)에 페트로그라드에 왔으니 레닌보다 한 달 늦게 왔군요.

레닌과 같이 귀국한 사람이 30명인데(사실, 독일은 레닌을 특별히 중시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저 "30명의 러시아 불평자들 중 하나"로 취급), 그 세부 명단에 대해서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
Commented by 어릿광대 at 2008/12/01 10:25
의외의 사실들도 알게되었지만 반전에 또 반전이라는 생각드는건 저뿐일까요 ㄷㄷ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8/12/01 10:46
글쎄요~^^
Commented by maat at 2008/12/01 11:13
영구지배시도 인도의 카스트를 무시할 순 없었을 겁니다.
일단 그걸 무시하고 섞어놓는것(평등이라는것이 기준을 잡기가 아예 무효입지요)
자체만으로 세포이 반란 정도는 닥치고 저리가서 끝에 스셈 하는일이 벌어질테니까요.
우선 달리트는 지금도 오지통을 달고 다니는 경우까지 존재하고 익사나 타살 심지어
길가에 묶어놓고 굶겨 죽이는 일이 있을정도로 엉망이고 관습이 무섭습니다.
독립전이라면 달리트는 고귀한 카스트가 다니는 낮에는 돌아다니는것도 허용되지 않던 시절입니다.
(낮에 달리트를 보았다면 그것자체로 눈을 더럽혔기때문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리고 영국이 아랫글의 경우처럼 세포이자체가 카스트의 계급들만으로 이루어진 점 (카스트부착물이나
터번자체가 달리트는 허용이 안됩니다.)등이 드러나죠.
현재에도 달리트청년과 카스트 처녀가 눈이 맞아 야밤도주하자 처녀의 부모가 달리트 청년의 일가족을
죽지 않을만큼 고문하고 산채로 일가족 전체를 태워죽인 일이 있고 사람들은 당연하다는듯이 구경했습니다.
지금도 그런데 영국이 당시에 손을 델수 있을리 없을테고 있었다면 아마 식민지 인도는 하루도 끊임없이
폭동과 반란으로 얼룩진 역사여야하는데 오히려 식민지시절 너무도 조용했죠.
아마도 영국이 식민지가 박살이 나던말던 평등주의를 고집하고 통치했다면 그 기간이면
지금쯤 카스트가 무력화 되었을 겁니다.
영국으로서는 어차피 지들끼리 개돼지만도 못한 사람을 만들어 뭘하건 말건 전체적으로 자신들이
바라는 물자와 금전을 챙길수 있다면 내버려 두었을거라는데 500원정도를 걸 수 있습니다.
힌두교의 종교적 기반자체가 인간은 평등하지 않게 신에게 선택 받은자와 그들을 먹여살려야 하는자
그리고 신이 버린 자들로 구성되었다입니다.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8/12/01 12:02
음, 확실히 그런 점이 있겠군요. 영국군 내에서도 인도 병사들을 분열시키기 위해서라지만 아예 종족별로 부대를 따로 편성했다고 하니 말입니다.
Commented by 【天指花郞】 at 2008/12/02 00:18
흠, 100년 조금 못 되는 시간동안 가능할까요.[먼바다]
Commented by 이준님 at 2008/12/01 20:21
1. 나중에 인도국민군에게 들어간 혐의는 1) 반역죄 2) 포로들에게 가입을 강요하면서 벌인 잔학행위가 있습니다. 후자는 거의 조작이라고 하지만 실제 몇몇건은 심각한 적도 있습니다

2. 대부분의 경우 인도군을 사용한건 비용절감의 효과때문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미얀마에서는 미얀마 본토인들에 의한 부대는 거의 없었지요.-물론 소수민족인 카렌이나 카친족은 다르지만요 -_-;;;; 이것도 여러 이유가 있지만 대부분은 역시 "비용" 문제였습니다.

3. 전후 말레이 게릴라전에도 초기에는 인도군이 참가했습니다. 그러나 네루의 항의와 "영연방의 용병이 되지 말자"라는 운동덕분에 후반부에는 동아프리카 사단이 말레이 게릴라전에 참가합니다. 이들 역시 차별과 여러 문제로 상당히 골치를 썩히지요

4. 인도국민군 초반에는 일본과의 대립으로 고위 간부가 일본군에게 살해되는 일도 벌어집니다. -_-;;;; 그 후임으로 보스가 온거지요. 여기에 후지와라 기관이 깊이 개입했다고 합니다.

5. 인도국민군은 정식으로 전투여군이 편제되었다고 합니다. -_-;;
Commented by 정호찬 at 2008/12/01 20:22
나치 독일이 자유인도군단을 실전에 투입 안한 건 정치적인 이유로 참전시키긴 했어도 별 관계도 없는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없다는 양심에서 비롯된 걸 겁니다(믿으면 MB).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8/12/02 01:58
이준님//역시 근대사 상식에 있어서는 이준님을 따라갈 존재가....^^

정호찬//이런 MB스러운!!
Commented by maat at 2008/12/02 05:41
댓글에 리프달기를 어찌 하는지 몰르겠네요 ' '
100년이면 충분합니다.
100년만에 공통어를 영어로 만들었고 인식이나 스타일을 바꾸는덴 충분한 이유가
1세대자체가 보통 반세기를 못채우기 때문에 100년이면 3세대가 넘어가고
이정도면 완전히 뿌리부터 바뀔수 있습니다.
실제로 일본이 명치유신부터 50년만에 모든 생활 습관이나 규범이 일절 서양식으로 바뀌었고
(실제적으로 일본인과 부딪혀보면 인식등이 서양의 개인주의가 오히려 동양적 습관보다 깊습니다.
사회적 규범등에 동야티가 묻어나서 섞여서 혼동될 뿐이지요)
우리나라가 단지 40년이 못되는 시간에 인시등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죠.
식민지 100년이면 확 바뀌어 버립니다.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8/12/02 11:54
댓글에 리플 달기는 시간 옆에 있는 연필 모양을 클릭하시면 됩니다^^
Commented by maat at 2008/12/02 05:43
단지 제도적으로 얼마나 바꾸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두둘겨데느냐가 문제지요.

Commented by maat at 2008/12/02 13:16
옷! 요렇게 하는것이었군요 ' '
실제로 일본은 명치유신 당시, 일본어를 버리고 자신들의 언어를 영어로 바꿀까도
생각했었습니다. ' 'ㅋ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8/12/02 14:56
음, 확실히 그런 시도도 있었지요^^
Commented by santalinus at 2014/08/27 23:29
영국인들이 인도인들의 분열을 조장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종족별/종교별로 단위부대를 편성한 데 비해서 이 부대는 모슬렘, 힌두, 자트, 마라타, 라지푸트 등 제민족을 혼합편성했거든요. ---> 이 부분, 아직까지도 인도내에서도 결론이 안 난 상태입니다. 정말로 분열을 조장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분리 편성했다고 보는 입장은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학파에서 주장하는 내용입니다. 실제로는 초창기에 카스트별로 부대를 편성하지 않고 혼합된 부대를 편성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군인들의 반발에 못이겨 분리시킨 것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보스가 이끌던 AZAD HIND는 인적 구성면에서 무슬림이 다수였기 때문에 가능했었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원래 시크는 무슬림과 사이가 나쁜 편이 아니었고요. 만약 힌두가 다수였다면.....글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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