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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 인민군의 몇 가지 오산들
이번에는 1950 포스팅, 고로 한국전쟁 이야기 하나입니다. 1943, 1945를 챙겨놓고 1950을 챙기지 않을 수는 없겠지요? ^^;;




한국전쟁 당시, 북한 인민군은 스스로 "남반부 동포들을 미제의 착취로부터 풀어주기 위한 해방군"이라고 믿으면서 남으로 밀고 내려왔습니다. 이런 철저한 정신무장 덕에 적어도 전쟁 초기에는 인민군도 대민피해를 거의 끼치지 않았지요. 인민군과 남한 주민들의 사이가 악화되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공습으로 보급이 두절되어 현지조달로 군량을 충당하기 시작한 8월 이후라고 보셔도 괜찮을 겁니다. 그 전에 인민재판이나 양민학살에 주로 연루된 것은 정규 인민군이 아닌 내무서나 지방 빨치산, 완장 패거리였거든요.

자....하지만 남반부 해방의 이상에 불타던 인민군들이 접한 현실은 예상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가는 동네마다 해방군을 환영하는 환영대열은 커녕 주민들이 싹 다 피난가버리고 없는 빈집만 즐비하기 일쑤였거든요. 서울 이북은 어리둥절하다가 뺏기는 통에 대부분의 주민이 남아 있었지만, 그 아래쪽에서는 많은 수의 주민들이 남으로 남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당시 인민군들이 겪은 황당함을 묘사한 실제 수기의 한 장면을 볼까요.

내가 가까이 가니까 최린 참모장이 약간 노한 빛으로 또 다소 쓰다듬어 주는 듯한 말투로 주름살투성이의 한 노인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당신들 농민을 해방시키려고 왔단말이요."
"예 나리님."
그런데 마을을 버리고 모두다 도망을 치는 것은 웬일이야요."
"예, 예 나리님."
"우리는 인민해방군이야요. 인민을 해방하는 군대란 말이야요."
"예 제가 무엇을 압니까요."
몸집이 자그마한 최린 소장은 작은 눈을 깜박거리면서 아버지뻘의 노인에게 명령이라도 하듯이 말하였다.
"어서 날래가서 온 마을사람들을 대리고 오시라요."
- 주영복, <조선인민군의 남침과 패퇴>에서 -


*1 여기서 "나"는 저자인 주영복 본인이다. 저자의 남침 당시 계급은 공병소좌였다.
*2 "참모장" 최린 소장은 동부전선의 북한군 2군단(군단장 김광협 소장) 참모장이었다.


뭐, 저랬던 겁니다. 군단 참모장이 지나가다 화를 낼 만큼 일반 주민의 호응이 없었다는 것. 전쟁통에 사람들이 피난가는 게 당연한 것 아니냐...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만, 그렇게 생각할 경우 전선이 북진할 때는 북으로 가는 피난행렬이 없었다는 게 설명이 안 되죠. 그저 잠시 전화를 피할 생각이라면 동네 뒷산에 올라가서 굴 파고 숨어있는 쪽이 낫거든요.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괜히 부산까지 피난을 가버리면 자기 농사는 누가 짓겠습니까? 이는 결국 북한과 공산주의가 그만큼 호응을 얻지 못했다는 이야기밖에 되지 않습니다.

다른 자료를 몇 개만 더 보면....

- 인민군 진공 후 청주시에서 재학중인 국민학생의 수가 전쟁 전의 37%로 감소(10.442명→3,860명), 중학생은 22% 감소(청주시 인민위원회 조사)
- 경기도 시흥군 동면 거주중인 병역 적령자 942명중 의용군 지원자 149명으로 지원율 15.8%에 불과. 모집기간은 7월 10일~9월 3일(동면 의용군 조직위원회 조사)
- 군 전체에서 8월 8일까지 3,100명의 의용군을 모집하도록 각 면에 책임량을 할당하였으나 실제 응모자는 338명(11%)(시흥군 내무서 조사)


이런 것 말고도 문제는 많고도 많았습니다. 7월 중순부터 벌써 보급의 곤란으로 탄약부족 현상이 나타났고, 사단장이 예하 병사들에게 "탄약의 공급이 어려우니 절약하고 소중하게 쓰도록" 명령을 내려야 했습니다. 왜냐 하면 벌써 "탄약이 떨어져 육박전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연대가 생겼거든요(12사단 32연대). 새 무기의 부족으로 전사자의 무기와 탄약을 수집하여 보충병에게 주는 것도 이미 이때부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동 12사단 참모부는 이미 7월 18일부터 이런 지령을 내리고 있었지요.

또한 북한군도 한국군 못지않게 위장부대에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보통 알기로는 한국군과 미군만 피난민으로 위장한 북한군 편의대에게 당했다고 쓰고 있는데, 한국군도 똑같은 수법을 인민군에게 유용하게 써먹었더군요. 사복을 입은 한국군이 인민군 지휘소까지 들어가 거기 비치된 전화로 아군부대 및 아군 항공기와 연락을 하여 인민군에게 엿을 먹인 사례가 있다고 합니다. 이런 사태에 분노한 사단장의 명령문이 남아있습니다 ㅋㅋㅋ

그 외에 인민군 자체 내의 문제도 심각해서, 통신장비를 수리하지 못해 상하급부대 간의 연락이 두절되는가 하면 화력지원이 제때 되지 않아 보병만 돌격했다가 작살이 나고, "모터 첵크(엔진 정비?)"도 하지 않은 사이드카를 장교들이 거칠게 모는 바람에 한 달 만에 고장이 나고, 안그래도 부족한 탄약과 휘발유를 화차에 실은 채 역 구내에 며칠씩(길게는 무려 한 달!!) 방치해 두었다가 폭격으로 날려버리는 등 희극의 연속이었습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최고의 비극은 식량이 없는 것이었죠.

곤란한 문제
가) 식량관계가 제일 곤란합니다. 현재 보유량은 전혀 없고 오늘부터는 하루 한끼밖에 먹일 수 밖에 없습니다.
나) 지방의 인민도 식량이 없고 있다고 한다면 보리만 조금 있으나 이것도 곤란한 것이 정미문제입니다. 현재 부락민을 동원하여 절구로 정미하고 있습니다. 그렇다 하드라도 하루의 정미량은 소비량의 10분의 1도 안되어 매우 염려가 됩니다.
다) 비상용의 식량 확보문제에 대하여 이 지점에서 10리가 넘게 후방에 보관되어 있으나, 아마도 휘발유 사정으로 올 수 없는 상황인 것 같으며 수송마저 어렵습니다.
*식량관계를 상부에서 해결해 주시지 않으며 25일 아침부터 식량이 전무상태입니다.


이상은 모 연대의 정치위원인 "전주연"이라는 정치장교가 8월 24일자로 사단의 정치담당 부사단장에게 보낸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식량 문제가 심각했다는 거죠. 전사자는 계속 나오는데 이렇게 식량까지 부족하니 도망병이 속출했고, 특히 남한 출신의 보충병들이 도망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남한 출신은 더더욱 경계의 대상이었습니다. 5월 25일부터 10월 10일까지 현황을 모아 인민군 검찰국이 만든 "구류자 명부"라는 등사판 문서가 남아 있는데, 여기에 보면 체포되어 영창에 들어간 600명 정도의 병사들 이름이 남아 있습니다. 이중 태반이 탈주자이고, 8월 이후로는 그 수가 급증합니다. 체포된 자의 수가 수백명이라면, 무사히 도망간 숫자는 얼마일까요?

그런데 이런 식량부족은 동부전선이 서부전선보다 심했어요. 왜냐 하면, 서부전선의 인민군은 충청도-전라도라는 곡창지역을 거치며 어느 정도 식량을 충당할 수 있었던 데다가, 미군이라는 보급부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쟁 초기 미군은 참 어이없게도 여러번 패했고, 그때마다 미군이 보유한 막대한 보급품은 인민군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에 대해서 나중에 포로가 된 군관 하나가 이렇게 이야기했다는 기록이 있더군요.

"굶주리다가 미군을 습격하면 그날은 포식하는 날이다. 미군은 트럭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불태우고 가지만, 트럭에 실린 깡통 속의 쇠고기, 닭고기 등은 알맞게 익어 먹기 좋았다."

하지만 동부전선의 한국군은 인민군 못지않게 가난했으니, 저런 노획품을 기대할 수 없었거든요. 그래서 동부전선 쪽 인민군의 상황이 보다 더 심각했던 점은 있습니다(12사단은 동부전선임). 그런데 이런 보급문제는 북한 측의 전략구상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죠. 서울만 먹으면 남한이 망하고 전쟁이 끝날 줄 알았거든요. 그래서 한강 이남으로 전선이 내려갈 경우에 대비한 보급대책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겁니다.

그 외에, 패배시의 인민군이 보인 추태도 한국군과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서울이 함락된 직후 거의 건제가 와해되었을 때의 한국군을 보면 장교들이 사복으로 갈아입고 부대를 이탈하는 등의 모습이 많이 보고되는데,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한군도 똑같은 상태가 되지요. 군관들은 적산이라고 하여 몰수한 피복을 병사들에게 골고루 나눠줄 생각은 않고 자기가 먼저 몸에 맞는 걸 골라입은 후 병사들은 입었건 벗었건 팽개쳐 두고, 한국군과 미군이 다가오는데 싸울 생각은 않고 사복으로 갈아입고 빠져나갈 기회만 엿보고 있기도 했습니다. 뭐 병사들도 마찬가지였지만요.


결국, 인민군도 한국군과 마찬가지로 신생국가의 신생군대였고 결국 미숙함과 전력부족에서 비롯되는 갖가지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군내에 전투경험자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고 해도, 군대라는 조직을 제대로 만들어나가는데는 큰 도움이 되지 않거든요. 한국군이나 인민군이나 장군들의 대부분이 30대였고, 사단 이상의 대부대를 지휘해 본 경험이 있는 장성은 남북한 군대를 통틀어서 단 한 사람, 김홍일 장군(국부군 소장, 집단군 참모장) 정도였습니다. 그 외에 일본군 출신은 고작해야 대대장이었고, 팔로군이나 조선의용군 출신은 직함은 높을지언정 실제 지휘해 본 병력은 얼마 안 되었습니다. 게다가 빨치산 지휘경험과 정규군 지휘는 차원이 다르지요.
이런 점들을 생각해보면 결국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은 국군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괴물집단이 아니었고, 두 초보자 중 좀더 좋은 장비를 갖추고 조금 더 대비되어 있었을 뿐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겠지요. 또한, 한국군의 개전 초기 삽질을 옹호하기 위해서 그동안 인민군이 고평가되었다는 점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겁니다. 형편없는 놈한테 졌다면 우리는 더 형편없는 게 되지만, 잘난 놈에게 졌다면 그래도 할만큼 했다는 위안을 가질 수 있으니 말이죠.


참고서적 :
육군종합학교, 박경석, 서문당
조선전쟁 - 김일성과 스타린의 음모, 萩原 遼, 미성

by 슈타인호프 | 2008/09/19 22:48 | 한국현대(~20XX) | 트랙백 | 핑백(1) | 덧글(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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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ked at 슈타인호프의 홀로 꿈꾸는 둥지.. at 2008/11/14 23:52

... 조선전쟁 - 김일성과 스타린의 음모, 하기와라 료(萩原 遼), 미성 여기 포스팅에서 다뤘던 그 책입니다. 일본 쪽 저자의 책이라 그런지, 확실히 우리가 그전에 보던 시각과는 다른 이야기가 많네요. 3000원입니다. ... more

Commented by PolarEast at 2008/09/19 22:59
그럼 서울에서 3일이나 지체한 것은, 전쟁이 끝난줄 알았다가 황급히 밑으로 진격한 셈이 되는군요...
Commented by PolarEast at 2008/09/19 23:00
그나저나 관련있는글 자동검색과 시각이 완전 대조적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Commented by 흑곰 at 2008/09/19 23:05
흐음 = ㅅ= 결국... 슬프군요 ㅠㅠ
Commented by 행인1 at 2008/09/19 23:08
현대전에서 탄약을 절약하라는 지시가 하달될 정도면 정말 암담하군요.
Commented by organizer at 2008/09/22 13:35
월남전에서 월맹들도 그러하였습니다. 승기를 잡기 전까지는 보급에 있어서, 철저히 밀렸으니...
Commented by 을파소 at 2008/09/19 23:10
보급부대 미국이 슬프게 하는군요.(...)
Commented by 에르네스트 at 2008/09/20 10:45
뭐 2차세계대전때도 비슷한사례가 많으니 말입니다~ (필리핀전때 노획된 미제 레이션중에 콘비프통조림은 일본군 소고기 통조림보다 인기있었다고 하고 (별칭 맥아더 공여) 싱가폴에서 노획된 위스키는 나중에 야마토 최후의 특공당시에 마실정도였으니 말입니다)
(독일군쪽도... 마켓가든이라던지(그 전투에 참전한 독일군병사 말하기를... 미제 담배를 피면서 미제 레이션먹으면서 미제 소총으로 적을 쐈다~ 할판이었던)바르샤바 봉기당시라던지(독일군 보급부대원 일기쓰기를... 오 예의바르셔라~ 우리가 서부에 버려두고온 보급품들을 비행기로 바르샤바에 있는 우리에게 배달해주다니!)(봉기군이 구하기쉬운 독일제병기에 맞는 독일제 탄약을 비행기로 보급했는데 20%정도를 제외하고는 독일군측이 습득해서 잘써먹은...)
Commented by oldman at 2008/09/19 23:16
인민군들이 미군을 습격했을때 '미제(美帝)는 미워하되 미제(美製)는 미워하지 말라.' 라는 구절을 외쳤을 것이라 상상해봅니다.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8/09/19 23:18
PolarEast//
1. 대략 그런 셈입니다.
2. 그거야 제가 정치면은 완전히 무시하고 군사적인 면에만 주목해서 글을 썼기 때문이죠 :)

흑곰//신생국가 신생군대들끼리의 싸움이니 별 수 있겠습니까.

행인1//비참한 거죠.

을파소//미국은 이상하게 꼭 전쟁 초기에 삽질을 하는 관습이 있는 것 같더군요(먼산)

oldman//그러게 말입니다^^
Commented by 뚱띠이 at 2008/09/19 23:20
미군은 2차 대전에서도 산타클로스더니 한국전에서도.....
Commented by 윙후사르 at 2008/09/19 23:36
나름 철저하게 전쟁준비했다는 애들 사정이 영 아니네요... 결국 고놈이 고거였던건가요...

그리고 공산주의는 해방 직후만 해도 한국인 상당수가 지지한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런데 언제 그렇게 지지열기가 식어버린겁니까?
Commented by 초록불 at 2008/09/19 23:42
남한 인민의 열렬한 지지가 없었다는 것이 후일 박헌영 숙청에 정당성을 부여하죠...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8/09/19 23:47
뚱띠이//그것도 미군을 털 능력이 있어야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지요 ㅎㅎ

윙후사르//그것도 자세히 쓰면 논문급인데....
일단 윙후사르님 가르치시는 근현대사 선생님이 뭐라고 가르쳤는지 모르겠지만, 한국인 상당수가 공산주의를 지지했다는 것도 일종의 프로파간다입니다. 절대다수는 공산주의가 뭔지도 제대로 몰랐어요. 인구의 80%가 농민인 상황에서 이들은 공산주의라고 하면 "지주들 땅 뺐어서 소작농들에게 나눠주는" 체제로만 알았습니다. 때문에 북한이 남한보다 상대적으로 빨리, 그것도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을 실시하자 북한에 대한 선망의 기운이 솟았던 겁니다.

하지만 남한에서도 1950년부터 유상매입 유상분배의 형태로 토지개혁을 실시하면서 지주제의 해체 및 상당수 농민이 자기 토지를 갖게 되었고, 이로 인해 북한 체제에 대한 호감도는 급격히 하락했습니다. 5년 동안 토지대금을 납부해야 하기는 해도 일단 내땅이 생겼으니까, 현 체제에 대해서 큰 불만을 갖지 않게 된 거죠. 토지개혁이 갖는 의미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초록불//네, 박헌영이 철석같이 약속한 "50만 남로당원의 일제봉기"가 없었던 것이 타격이 컸으니까요. 김일성이 한강 이남으로의 진군계획을 세워두지 않은 근본적인 이유 하나가 남로당의 봉기였는데 말입니다.
Commented by Ya펭귄 at 2008/09/20 11:30
한 가지 더 써먹었던 이야기는 북한의 토지분배는 그래봤자 집단농장으로 다시 빼앗아 갈 것이라는 선전이었고, 이는 결국 사실이 되지요...

얼핏 생각하면 무상몰수/무상분배가 농민들이 선호할 만한 방식일 듯 하지만 그 이야기는 당이 마음을 바꾸는 순간 언제든지 다시 무상으로 땅을 가져갈 수 있다는 의미하고도 상통했던 것이고... 때문에 유상으로 분배하는 남한의 방식이 땅의 소유권에 대한 시비에서는 오히려 자유로왔다는...(자기 힘으로 땅을 산 것과, 당의 시혜에 의해 땅을 받은 것과는 심리적인 측면에서 의외로 차이가 나더라는...)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8/09/20 12:08
네, 대부분의 공산국가에서 농민들은 지주의 땅을 분배받을 때는 공산주의에 환호하다가 농업집단화가 이루어지는 순간 반정부성향을 갖더군요.
Commented at 2008/09/19 23:57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_tmp at 2008/09/20 00:02
미군 경험자로서 '보급부대 미군'에 대폭소하고 지나갑니다.

당대 '남한 인민'의 '상당수'가 공산주의를 지지한 건 사실일 거라고 생각합니다.마는, 그래도 전쟁 두려워 내려간 사람이 더 많은 거죠. 게다가 아무래도 한번 갈라 놓으면 조금은 적대하게 되는 게 정상 아니겠습니까.
Commented by Ya펭귄 at 2008/09/20 14:57
전쟁 자체가 두려워서 내려간 사람이 많았다면, 전쟁이 두려워 올라간 사람들도 그에 못지않게 많았어야 하지요...

그리고 남한내의 지지기반은 여순반란과 그 이후의 숙청과정에서 사실상 거덜난 상황이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고...

Commented by ESTRA at 2008/09/20 00:14
ㅇㅅㅇ...전쟁은 길어질수록 물량전이 되어가니 =ㅅ=
Commented by 한뫼 at 2008/09/20 00:21
50만 남로당원의 일제봉기"라... 50년 판 키보드 워리어로군요.
Commented by 함부르거 at 2008/09/20 00:22
라주바예프 보고서 같은 곳에서도 보면 북한군 고위 간부들의 자질 부족을 지적하는 게 여러 번 나오죠.
현대전에 대한 이해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라고 소련군 고문관이 말할 정도였으니까요.
한국전쟁이 그렇게 비참한 전쟁이 된 것은 이런 남북한 군 지도층의 무능도 한 몫 한 게 아닌가 합니다.
복싱에서도 훈련 안된 아마추어들끼리 붙었을 때 더 부상이 많아지는 것 처럼 말이죠.
Commented by 파도지기 at 2008/09/20 00:58
그래서 50년 초에 있었던 남한의 토지개력이 한국전때 민심동향의 중요한 결정을 했다고,
근현대사에서 가르치는 모양이더군요.

북한군이 남침준비는 열심히 했는데,
그게 서울 함락과 한강에서의 국군 주력의 포위섬멸에"만" 준비했던거 같더군요.
(마치 임진왜란때의 일본군의 계획처럼 그러면 나머진 다 자동으로 될줄..)
한강, 금강, 낙동강에다 작은 하천도 많은 한반도지형에서
도하용 공병세트는 1세트만 준비했었다고 들었습니다.
Commented by 파란장미 at 2008/09/20 01:21
독립운동하던 사람들이 서로 싸워댄거 생각하면... 어휴... 피를 토할 한국의 현대사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8/09/20 02:47
비공개//
1. 그러고 보니 확실히 그렇군요 ㅎㅎ
2. 말 그대로 새옹지마네요.
3.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남베트남군이 아닐까 싶어요.

_tmp//미군이 전쟁 초기에는 종종 적군의 보급부대 역할을 하니 말입니다^^

ESTRA//장기전에 장사 없습니다, 정말.

한뫼//그걸 조기에 차단한 요인 중 하나가 보도연맹 학살이죠.

함부르거//네, 양군 대 제대로 양성된 간부가 부족했으니까요. 일본군이나 소련군 경험자라고 그렇게 나은 것도 아니고...

파도지기//정말 토지개혁이 이승만 정권이 국민들에게 지지받게 만든 결정적 조치였습니다. 몇 달만 늦었어도 그만큼의 지지를 못 받았을 거에요. 도하세트는, 4세트를 청구하기는 했는데 소련이 하나만 줬다고 하더군요. 그거면 충분하다면서.

파란장미//분파투쟁은 나쁜 겁니다(...)
Commented by 마키아벨리 at 2008/09/20 03:43
제가 아는 할머니는 국군, 인민군, 북한군, 미군 모두 한번씩 마을을 들락거리며 처녀들을 능욕하고 재물을 앗아갔는데
그중 인민군만은 군율이 바로세워져서 마을 주민 물건 손하나 안데고, 처녀를 건드리기는 커녕 치안을 강화시켜주었다고 합니다.

열악한 상황에서 중국 민심을 휘어잡고 일어선 중공군 다운 군율이라 생각했는데 이 글에선 다른 의견이 보이네요...ㅎㅎ
부대마다 군율이 좀 달랐던 걸까요?^^
Commented by 김희대 at 2008/09/20 07:23
마키아벨리/ 북조선 인민군하고 중공의 인민해방군을 착각하신 것 같네요?
Commented by 레인 at 2008/09/20 09:08
의외로 시궁창싸움이었군요. 한국전은;;
Commented by 캐안습 at 2008/09/20 09:14
중공군이야 국공내전에서 민심 얻는 법을 어느 정도 아는 군대였으니까요. 하지만 그것도 일부지요.
김일성의 이야기에서도 나오지만 남한의 동조분자들이 악랄하게 나온 것도 민심 얻지 못한 이유중 하나겠지요.
제 할머님께서 인민재판한다고 강제출석하라고 해서 며칠동안 눈 앞에서 수백명이 죽는 광경을 보셨답니다. 그 이후론 공산주의는 ....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8/09/20 10:54
마키아벨리//"인민군"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정부의 정규군이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정규군은 "인민해방군"입니다. 용어에서 약간 혼동을 하신 듯 합니다^^;

김희대//그러신 듯.

레인//남한이나 북한이나 체계가 덜 잡혀 있었으니 말이죠.

캐안습//일부 의견으로는, 전쟁 초기 북한군의 대민군기가 엄정했던 이유 중 하나로 중공군 출신 장사병이 많았기 때문이라는 점을 드는 의견도 본 적이 있습니다. 다만 전쟁 초반에 이들 경험 있는 장병들이 모조리 소모되면서 그런 군기가 계속 유지되지 못했다는 거지요.
Commented by 마키아벨리 at 2008/09/20 12:32
...그렇군요! 새벽이라 정신이 혼미하여;;;중공군으로 정정합니다^^;;
Commented by 티이거 at 2008/09/20 13:29
채명신 장군 수기에서도 그런 장면이 나오죠... 중공군은 민간인들에게 예의 바르게 굴고 나무도 해다주고 하며 인심을 얻고 있었다고.... 나중에 후방의 빨치산 토벌이나 베트남에서도 자신이 그런 전법을 유효하게 사용했다고 말하죠....
Commented by 어릿광대 at 2008/09/20 13:40
이런 비밀이 있는줄은 몰랐네요 헐..
Commented by 길 잃은 어린양 at 2008/09/20 14:51
미8군이 대전전투 이후에 작성한 북한군 전술 분석을 읽어 보면 꽤 재미있습니다. 보전협동이 제대로 안되는 것은 그렇다 치고 땅크가 지나가고 한참 있다가 보병들이 졸졸 따라왔다더군요.
Commented by 주코프 at 2008/09/20 15:36
결국 박헌영은 20만 남로 촛불시위대에게도 배반당했다는..(개안습)
Commented by 瑞菜 at 2008/09/20 16:21
북한의 인민군, 소련의 붉은 군대, 중국의 인민 해방군. 이 용어가 참 미묘하더군요.
다 한끝 차이들이라.

뭐 한국군이나 인민군이나 어리버리 한 것은 매한가지이니.

말도 있지요. 전쟁 기간 중 중견 장군으로 성장한 백선엽 장군도 6.25 전쟁 발발 시
고급 지휘관 교육 중이라 육군본부에 "교육 띵기고 부대로 가야 되나요?" 라고 물었다고 하고,
결국 패주하고 후퇴할 때도
"병사들은 다 나만 보고 따라왔다. 마치 내가 어디로 가야되는지 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정작 나도 어디로 가야할 지 몰랐다. 우리는 마치 전국시대의 유랑병들 같았다"
라고 회고했다지요.
초전의 춘천 전투, 백마고지의 명장 김종오 장군도 일제시대 간부후보생 소위로
고베 공습 때 거리 청소했다가 해방되어서 귀국한 사람이었는데,
나중에 백마고지 전투 때 상대방 중국군 군단장도 만주군 군관학교 출신이었다지요.
김종오 장군인가 백선엽 장군인가 아는 사람이었답니다. 백선엽 장군 같은데.

결국 한국군도, 북한군도, 더 나아가서는 중국군도(중국군은 그나마 좀 낫지만)
어리버리 아마추어들의 좆밥싸움이었으니.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8/09/20 16:32
마키아벨리//옙 알겠습니다^^

티이거//20년동안 그걸로 버텨서 승리한 군대가 중공군 아닙니까.

어릿광대//역사에는 재밌는 게 많지요.

길 잃은 어린양//서울에서도 그러고 오산에서도 그러고 대전에서도 그랬지요. 보전협동에 관한 개념 자체가 제대로 없었던 것 같더라고요. 개전할 때까지 고문관들 다 붙어있었다더니 직무유기로 굴락으로 보내야 할 듯.

주코프//남로당하고 촛불시위 한패로 간주하시면 수꼴됩니다 ㅋㅋ

瑞菜//소련군은 "적군"이고 중공군은 "홍군"이라는 데서 헷갈리는 분도 많더군요. 둘 다 "붉은 군대"이니...^^
Commented by 홍월영 at 2008/09/20 17:37
저희 외할아버님도 당시 토지개혁 덕분에 쥐똥만한 밭뙈기로 자녀들 교육시킨 분이죠.
Commented by 썰렁이 at 2008/09/20 17:51
적군 지휘소 전화기로 아군부대 전화라니... 당시 통신수단이나 통신망 상태가 어땠을지 이해는 합니다만 보안대책없이 상용망에 전화기 연결한 통신병이나 그걸 쓴 인간이나 대인배군요. 전화 안되면 어떻게 하려고 지휘소에 들어갔는지... 아니 그보다 어떻게 사복차림으로 지휘소에 들어갔답니까? --;;;

불과 몇년전 저 군대있을때도 뻑하면 유선통신망죽어서 고생했던 기억에 비추어보면(특히나 부대가 지휘소간 통신망 연결이 주임무였죠. 비록 전 운전병이었습니다만...) 저들은 정말 대인배.
Commented by 눈팅 at 2008/09/20 19:20
남한 토지 개혁 주도한 조봉암은 후에 진보당 사건으로 숙청되지요
빨갱이라고 찍혀서..
이승만 각하게서도 조봉암이 정부 이전과 같이 대전인가 부산가지 다라 온거 보시고는 북으로 갔을 줄 알았는데 라고하셨죠..


Commented by 프랑켄 at 2008/09/20 19:30
한국 전쟁 초반부를 보면 조금만 잘만 했어도 전쟁을 조기에 마칠 수 있었던 기회가 많았는데, 그것을 다 날려먹었죠, 특히 한강교 폭발은 정말 최악의 수였습니다. 그 덕분에 안 그래도 빈약한 장비를 다 버려두고 도하해야 해서 이후 작전에 심대한 지장을 주었죠.
Commented by FELIX at 2008/09/20 20:21
세상 어느나라 전쟁을 봐도 일사분란하게 지휘에 따라 움직이는 전쟁은 없더군요. 편제를 유지하고 제대로 된 기동을 하는 것만해도 정예군인 법이죠.
Commented by 朴下史湯 at 2008/09/20 20:45
뭐역시 쟤들도 배달민족 아니랄까봐 멋진 모습 보여주는군요
Commented by 아텐보로 at 2008/09/20 21:03
댓글 올렸다가 서울이나 춘천-수원이나 북쪽에서 보급해줄때는 거기서 거기 같아서 지웠습니다--;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8/09/20 21:57
홍월영//그때 처음 땅 생긴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죠.

썰렁이//그만큼 경계태세가 개판이었다는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눈팅//좌도 한 덩어리가 아니고 우도 한 덩어리가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게 하는 일화로 볼 수 있겠네요.

프랑켄//조금만 더 제대로 준비한 후에 다리를 폭파했어도 그만한 충격은 없었겠죠.

FELIX//그게 잘 될 수록 확실히 잘 훈련된 군대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朴下史湯//그래도 초기엔 한국군보단 나았지만...^^

아텐보로//뭐어...ㅋ
Commented by 구데리안 at 2008/09/22 13:00
결국 북한군이 서울서 뭉개고 있었던 이유는 '앗싸 전쟁 끝났다 항가항가~~~' 거리고 있었던 것이었군요...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8/09/22 13:07
그게 컸어요. 서울 함락하고 3일 동안, 일부 북한군 장병들은 서울 시내 관광하고 쇼핑하고 그랬다고 합니다. 파리 함락한 독일군들처럼(...)
Commented by 심재호 at 2008/09/22 20:57
우리-국군-에게 김홍일 장군의 존재는 매우 컸군요...
[디시 밀갤에서 625 전에 김홍일 장군과 김영옥 대령이 한국군의 주력전력을 이끌 위치였다면 이라는 글이 떠올르네요^^]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8/09/22 21:44
남북을 통틀어 최대 규모의 병력을 직접 지휘해 본 사람이었으니까요. 국부군이긴 해도 집단군 참모장이었으니...
Commented by umberto at 2008/10/19 05:30
질문이 있습니다. 본문에 김홍일 장군이 남북을 합쳐 가장 많은 병력을 지휘해 본 경험자라고 하셨는데요. 북쪽의 무정이나 방호산, 김창덕도 제법 대병력을 지휘해 본 경험자 아닌가요? 무정은 그래도 팔로군 총사령부작전과장에 포병단 단장까지 지낸 인물이고 김창덕도 중국에서 부사단장까지 했던 인물로 알고 있습니다만.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8/10/19 11:20
김홍일 장군은 중국 국부군에서 102사단 참모장, 19집단군 참모장(예하부대는 4개 군단, 12개 사단), 19집단군 예하 20군단 19사단장(임시보직) 등의 보직을 맡아 실병력을 지휘하여 일본군과 대전한 바 있습니다. 분산된 비정규군 체계하의 팔로군에서 복무했던 무정이나 방호산의 경우에는 일선 전투경험은 김홍일보다 많을지 모르지만, 한번에 지휘해본 병력의 수가 김홍일보다 많기는 힘들다고 봅니다.
Commented by 애프터스쿨 at 2009/05/08 22:23
10년 전 즈음에 역사스페셜에서 '인민군, 왜 서울에서 3일간 머물렀나' 하는 내용을 다룬것 같은데요... 한 번 찾아봐야겠습니다..ㅎㅎ 이 글을 보니 갑자기 그게 보고싶어지네요 ㅎㅎ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9/05/09 02:14
거기에도 몇 가지 주장이 있습니다.

1. 공격하려고 했는데 도하장비가 없어서.
2. 서울 먹으면 한국이 붕괴할 줄 알고 남로당의 봉기를 기다리느라.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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