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으로 족한 것을 비난하지 말자. "따뜻한 말은 생명의 나무가 되고 가시 돋친 말은 마음을 상하게 한다."(잠언, 15장 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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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티유 이야기(4) - 바스티유의 최후
7월 14일에 공지 때리고 쓰기 시작한 바스티유 이야기...드디어 마지막 회입니다. 퍽 오래 끌었죠?^^;;


p.s. 지나간 부분을 안 보셨거나 편하게 다시 보실 분들을 위해서....

바스티유 이야기(1) - 바스티유의 탄생
바스티유 이야기(2) - 바스티유의 변화
바스티유 이야기(3) - 바스티유의 석양



4. 바스티유의 최후 - 7월 14일


데모대가 바스티유를 공격하기에 앞서 먼저 털린 앵발리드.
(그림 출처 :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5/5e/The_Dome_Church_at_Les_Invalides_-_July_2006.jpg


<바스티유의 황혼>편에서 이야기했듯이, 7월 13일까지 파리 시내는 일촉즉발의 상태였습니다. 국왕의 군대가 대규모로 진주하고 시위대를 기병대가 짓밟는 등 시의 분위기는 흉흉했고, "언제 국왕의 용병들이 우리를 죽이러 올지 모른다"는 공포에 떨던 파리 시민들은 자위를 위해 무기를 구하러 나섰습니다. 민간의 무기 소유가 완전히 금지되지 않던 시기니만큼 시민들 스스로 보유한 무기도 다소 있었고 시내의 총포상을 털기도 했지만, 그래봐야 국왕의 용병군을 상대하기엔 턱도 없는 물량이었지요.

이때 누군가가 앵발리드(Hôtel des Invalides, 폐병원廢兵院. 루이 14세가 부상병이나 퇴역군인의 수용을 위해 건설한 시설. 나폴레옹 등 유명인사들의 묘가 있고 현재는 군사박물관입니다)에 무기가 있다는 것을 알립니다. 곧바로 앵발리드로 몰려간 군중은 수만 정(위키에 의하면 29,000에서 32,000정. 40,000정이라는 사이트도 있습니다)의 머스켓 소총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앵발리드에는 이 총들을 위한 탄약이 없이 그저 빈 총만 쌓여 있었고, 탄약은 바스티유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위대는 탄약을 확보하기 위하여 바스티유를 다음 목표로 선정합니다.

(*앵발리드의 현재 모습에 대해 궁금하신 분들이 참고하실만한 BigTrain님의 포스팅입니다.)


프랑스 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전쟁 당시 프랑스군의 주력 소총이었던 1777년형 머스킷. 사진의 총은 당시의 진품은 아니고 레플리카로 버전 9(An IX Version)입니다. 이 총은 조병창이 위치한 도시의 이름에 따라 "샤를빌(Charleville)"이라고도 불렸고, 66구경에 총열 길이가 44와 3/4인치, 개머리판을 포함한 전체 길이는 60인치입니다. 미국 독립전쟁 후기에 사용되기도 했으며, 1812년 전쟁에서 상부 캐나다(Upper Canada) 민병대가 쓰기도 했다는군요.
(그림 출처 : http://www.militaryheritage.com/loadin1.jpg)


하지만 이 시점에서 바스티유는 압제를 위한 정치범수용소가 아니라 단지 7명의 죄수를 수용한 감옥일 뿐이었습니다. 지나간 연재물에서도 밝혔듯이 그중에서 4명은 화폐위조범, 2명은 정신이상자, 1명은 부친이 수용을 의뢰한 호색한 귀족 솔라제 백작이었죠. 10일 전까지만 해도 죄수는 8명이었지만 이날까지 갇혀 있던 사드 후작이 그 창문 밖으로 소리를 지른 사건 7월 4일의 때문에 그날 바로 정신병원으로 보내지면서 7명이 됐습니다. 이렇게 한정된 용도를 위해서 이 낡아빠진 중세 요새를 유지하고 수비대를 두는 데 막대한 비용을 들이는 것은 수지가 맞지 않는 일이었으므로, 혁명으로 인한 소동이 벌어지기 직전에 정부에서도 이곳을 폐쇄하기로 결정을 내린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시민들에게 있어서 바스티유는 여전히 왕실의 압제를 나타내는 상징이었지요.

공격에 나선 시위대는 바스티유에 비축된 막대한 양의 무기와 탄약(14일 현재, 3만 파운드(13,600kg) 이상의 화약이 저장되어 있었음)을 획득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요새에 있는 정규 수비대는 82명의 폐병(廢兵, invalides. 부상이나 노쇠, 질병 등으로 더 이상 야전임무를 수행할 수 없는 퇴역한 병사들)으로 구성되어 있을 뿐이었습니다. 7월 7일에야 샹 드 마르스에 주둔하고 있던 스위스 살리-사마드 연대(Swiss Salis-Samade Regiment)로부터 척탄병 32명이 증원되었고, 요새에는 18문의 8파운드 포와 12문의 보다 작은 화포가 설치되었습니다. 사령관인 베르나르 드 로네이 후작은 역시 요새 사령관이었던 부친의 뒤를 이어 그 자리에 취임했을 뿐더러 그 자신도 이 요새 안에서 태어난 사람이었습니다.


바스티유 요새 사령관, 드 로네이 후작
(그림 출처 : http://bpun.unine.ch/icono/JPG02/POET4.289.jpg)


바스티유를 함락시킨 "정복자들(vainqueurs)"의 이름은 현재 600명 내외가 남아있으며 이름이 남지 않은 사람들을 포함해도 전체 인원은 천 명 이하일 것이라고 합니다. 하여튼 이들은 아침무렵에 요새를 포위하고, 오전 10시에 대표를 보내 요새에 거치된 대포들을 제거할 것과 무기와 화약을 모두 자신들에게 인도하고 항복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드 로네이 후작은 이를 거부하지요.

*사실 이 시절에는 화약이 중요하지 탄환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탄환은 납으로 만들었으므로 그냥 납을 녹여서 동그란 틀에 부어 식히기만 하면 되는 거였고, 당시에는 생각보다 많은 일상용구를 납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탄환을 만들 재료는 조달하기 쉬웠습니다. 그래서 화약을 얻으려고 그렇게 조바심을 쳤던 거고요.

그리고 군중들 중 두 사람이 대표로 선발되어 요구조건을 전달하기 위하여 바스티유로 들어갔습니다. 이후 협상이 계속되었지만 결론은 나지 않았고, 결국 군중들의 인내심도 바닥이 납니다. 하지만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죠. 드 로네이 후작은 시위대에게 발포할 의사는 없었지만 국왕의 명령을 받은 군인으로서 요새 사령관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중이었고, 시민들의 요구에 응해 요새를 내주는 것은 단순히 어떤 위치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정도의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국왕의 요새와 무기를 국왕에게 반대해서 일어서는 집단에게 내주는 것은 그것 자체가 반란이나 마찬가지인 반역행위였던 것이죠. 애초부터 협상이 이루어지려야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11시 30분에는 튀리오(Thuriot. 1793.6.27~7.11 국민공회 의장)가 인솔하는 다른 대표단이 요새를 방문하여 대포에 아직 탄약이 장전되지 않은 것을 확인합니다. 하지만 이들이 시청으로 돌아간 사이 점점 더 많은 군중이 요새 주위로 모여들더니 기다리다 지쳐 흥분한 시위대가 주변을 둘러싼 건물들 사이의 마당으로 침입내부로 들어가는 도개교의 쇠사슬을 잘라버립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서 사슬이 끊겨 떨어지는 도개교에 운 없는 시위대 하나가 깔려죽어버렸죠-_-;; 오후 1시 30분, 도개교의 쇠사슬이 끊어지면서 드 로네이 후작은 휘하의 퇴역병들과 스위스 용병들에게 시민들을 향해 발포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도개교 위치를 짐작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림 출처 : www.discoverfrance.net)


참고로 도개교란 기본적으로 이렇게 생긴 물건
(그림 출처 : http://www.castlemagic.com/BW/drawbridge1.jpg)


쇠사슬이 끊기는 순간 사격이 시작된 것은 맞습니다만 어느 쪽이 먼저 쐈는지는 지금도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일단 발포가 시작되자 시위대는 자신들이 속임수에 걸려들었다고 생각해서 더 폭력적으로 변했고, (요새 접수를 위해 조직된)대표들이 발포를 중단하자고 제안하는 것도 무시해버립니다. 결국 사격전은 계속되었는데, 사실 이는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습니다. 든든한 요새에 틀어박혀서 사격을 가하는 수비대와 소총도 제대로 갖지 못한, 도끼/창/칼 따위로 주로 무장한 시위대 간의 싸움이니까요. 성채 주위를 둘러싼 건물들에서 불길이 솟았지만 수비대의 스위스 병사들은 그런 것에는 아랑곳않고 발포를 계속했습니다.

그런데 오후 3시가 되자 시위대에 증원군이 도착하면서 무게추가 뒤집힙니다. 지휘부에 반란을 일으킨 국민군(gardes françaises) 병사들과 여타 정규군 소속의 탈영병들이 이날 아침 앵발리드에서 탈취한 무기에다 대포 두 문을 추가로 가지고 도착했거든요. 수비병들은 이제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두 부사관이 화약고를 폭파시켜 요새를 통채로 날려버리려는(당연히 요새 주위까지 박살납니다) 드 로네이 사령관을 겨우 저지시켰습니다. 결국 드 로네이 사령관은 오후 5시에 요새 수비대의 발포를 중단시키고, 휴전을 청하게 되지만 곧바로 거절당합니다. 하지만 원래부터 시민들과의 전투를 그리 내켜하지 않았던 데다가 자기 휘하의 병사들이 그다지 오래 버틸 수 없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던 드 로네이 사령관은 저항을 포기하고 요새 내부로 통하는 문을 엽니다. 밀려들어온 시위대는 마침내 압제의 상징 바스티유를 "해방"시키게 되지요(오후 5시 30분).

*디킨즈의 <두 도시 이야기>에서 드파르쥬가 마네트 의사를 석방시키는 것도 바로 이 순간입니다. 하지만 바스티유에는 그 시각에 마네트 의사 "비슷한" 사람도 하나 없었다는게 오류라면 오류겠죠. 허나 그렇다고 해서 명작이 명작이 아니게 되는 건 아닙니다~

사격전에서 사망한 사람은 공격자인 시위대 98명(시위대측의 부상자는 70명 이상), 그리고 수비병 단 1명이었습니다. 드 로네이 사령관은 군중들에게 둘러싸여 욕설로 가득한 시청으로 끌려갔는데, 이곳에서 그를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습니다. 군중에게 실컷 구타당한 드 로네이는 "고마 마이 무따 아이가! 차라리 날 쥑이라!"(.....죄송)고 소리를 지르고는 데스노(Desnot, 데스노트? 튄다)라는 패스트리 제조인의 사타구니를 걷어찼습니다. 다음 순간 드 로네이는 수 차례 칼에 찔린 다음 거리로 굴러떨어졌고, 그의 머리는 참수되어 창 끝에 꽂힌 채 거리를 돌아다니게 됩니다. 위 그림 아랫부분에서 보시는 것 처럼요.

이때 드 로네이 사령관만 시위대에게 살해당하지는 않았습니다. 바스티유 수비대의 장교 세 사람 역시 사령관과 함께 죽음을 당했고, 이들이 입은 상처와 의복의 상태에 대한 경찰의 기록이 아직도 남아있다고 합니다. 수비대 소속의 폐병 두 명도 린치를 당했지만 스위스 살리-사마드 연대(Swiss Salis-Samade Regiment) 소속의 스위스 병사들은 놀랍게도 두 명만 제외하고 국민군(French Guards) 병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무사히 자신들의 연대로 돌려보내졌습니다.

*여기서 또 잘못된 기존지식 하나 발견하게 되는군요. 요새 함락과 동시에 "생명을 보장한다는 약속을 받고 투항한" 드 로네이 사령관 이하 수비병 전원이 학살당했다고 알고 있던 난 뭘까(...) 먼나라 이웃나라를 원망해야 하나?...OTL

이 스위스 병사들을 지휘한 장교인 부중대장 루이 드 플루(Louis de Flue, Lieutenant)는 본대에 복귀한 후 바스티유 요새 방어에 대한 상세한 보고서를 제출했는데, 이 보고서도 위 경찰기록과 마찬가지로 살리-사마드 연대의 기록철에 보관되어 현존합니다. 루이 드 플루는 이 보고서에서 드 로네이 사령관의 우유부단한 리더십에 대해서 혹독한 비판을 가하고 있습니다만 이는 사실 매우 불공정한 태도라고 볼 수 있는 것이, 바스티유 함락의 책임을 드 로네이 후작 한 사람에게 떠넘겨버리려는 의도가 강했다는 의혹을 없앨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스티유에서 절대 먼 거리라고 할 수 없는 샹 드 마르스에 수천 명은 족히 넘는 국왕군의 대부대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하루 온종일 바스티유가 공격당하는 동안 샹 드 마르스에 주둔중인 부대들은 전혀 바스티유를 구원하러 나서지 않았습니다. 하루 종일 울려대는 포성이 안 들릴 리 없고, 바스티유를 공격하는 시위대의 수도 겨우 천여명에 불과했는데 말이죠......심지어 이들은 샹 드 마르스 바로 옆에 있는 앵발리드가 털리고 있을 때도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소극적인 행위를 변명하기 위해서, 이들은 이미 죽어 입이 없는 드 로네이 후작에게 바스티유 함락의 전 책임을 뒤집어씌웠을 공산이 매우 높습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까요.



1789년의 것은 아닌 현재의 파리 지도지만, 주요 위치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왼쪽부터 1번이 샹 드 마르스, 2번이 앵발리드, 3번이 바스티유입니다.

(그림 출처 : http://www.devinci.fr/ri/incoming/Liens/paris.gif)


만약 군대가 제때 출동을 했다면 어땠을까요? 폭도들이 앵발리드를 습격할 때 샹 드 마르스의 군대가 즉각 출동해서 방어에 나섰했다면 시위대는 무기를 손에 넣을 수 없었을 겁니다. 바스티유 역시 마찬가지로, 뒤늦게라도 출동해서 폭도들을 뒤에서 공격했다면 요새는 무사히 구출되었겠죠. 하지만 이들 병력은 움직이지 않았고 그 결과 앵발리드와 바스티유는 단 하루만에 모조리 함락당하고 맙니다. 루이16세가 강철같은 의지(...)를 가지고 병력을 투입했다면 분명 1789년의 혁명은 진압할 수 있었을 겁니다. 단 피는 좀 많이 흐르긴 했겠지만, 혁명과 그 뒤를 이은 전쟁으로 죽은 사람보다는 덜 죽었을 거라고 봅니다. 뭐 그래봐야 근본적으로 체제개혁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또 일어났을 거라는 게 안습이지만요.

바스티유를 함락하고 시청으로 돌아온 후, 폭도들은 왕궁과 시위대의 사이를 조율해보려고 노력하는 파리 시장prévôt es marchands( = Provost of the merchants) 자크 드 플레셀(Jacques de Flesselles. 전 리옹 시장, 현 파리 시장)의 노력을 배반행위라고 맹비난한 후 그를 사살해버립니다. 플레셀은 시청 계단에서 총에 맞아 죽었는데 누가 쏘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고, 이로써 또 한 사람의 구체제 지지자가 이날 살해되었습니다.


자크 드 플레셀의 피격 장면을 그린 피에르 가브리엘 베르토(Pierre Gabriel Berthault, 1748–1819)의 그림.
(그림 출처 : http://www.kolekcjonerzy.mnw.art.pl/fotki/grobc82388.jpg)



함락 이후
바스티유를 함락시킨 파리 시민들은 당연히 국왕 측의 반격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거리에 참호를 파고 포석으로 바리케이드를 만드는가 하면 급조한 파이크(부엌칼을 장대 끝에 단 경우도 있다고 하죠) 등으로 가능한 한 무장을 갖췄습니다. 한편 베르사이유에서는 파리 시내에서 벌어진 대부분의 사건을 무시한 채 국민의회를 당장 해산해야 하느니 마느니 등으로 다투기만 하고 있었는데, 노아유 자작(Viscount de Noailles)이 파리에서 벌어진 긴급사태에 대한 뉴스를 처음 베르사유로 가져오자 그의 보고를 확인하기 위해 급히 파리 시청으로 사람이 보내집니다.

7월 15일 아침, 외부의 상황이 국왕에게 명확하게 알려지자 왕과 군사령관들은 사태의 주도권을 쥐는 것을 단념하게 되고, 파리 주변에 집결하고 있던 국왕의 군대도 국경지대에 있는 본래 주둔지로 돌아갑니다. 국왕과 시민들 사이에 다소간의 타협이 이루어져 미국 독립혁명에 지원군을 이끌고 갔다온 바 있는 라파예트 후작이 파리의 국민군 사령관이 되고, 제3계급의 지도자이자 천문학자이면서 웅변가로서 테니스 코트의 선언을 주도한 쟝 실뱅 바이이(Jean Sylvain Bailly. 프랑스 혁명 초기 지도자들 중 하나였으나 공포정치 기간에 기요틴에서 처형됩니다)가 코뮌(commune)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새 체제 아래의 파리 시장이 되지요. 이들 두 사람은 군주제 자체는 옹호하고 있었으므로 루이16세의 입장에서도 자신을 지지하는 이들이 국민군과 파리의 통제권을 갖는 것이 바람직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왕은 해임한 네케르를 다시 기용할 것이라고 선언하고 베르사유에서 파리로 돌아옵니다. 바스티유 함락 2주 뒤인 7월 27일, 루이 16세는 파리의 새 시장인 바이이로부터 혁명을 상징하는 세 가지 색깔의 모장(帽章)을 받아 장식하고 시청에 입장했는데 국왕이 시청에 들어갈 때 군중은 "국가여 영원하라(Long live the Nation)" 대신 "왕이여 만수무강하소서(Long live the King)"라고 외쳤다는군요.


모자에 다는 삼색의 표장.
이 사진에 등장하는 인물은 TV영화 "프랑스 대혁명"에서 라파예트 역으로 등장하는 샘 닐입니다.

(그림 출처 : 샘 닐의 前 공식 홈페이지, http://www.ibiblio.org/samneill/pictures/fr/115cockade1.jpg)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왕과 시민들 사이의 일시적인 협조관계를 별로 믿지 않았던 귀족들은 폭력사태 이후 프랑스를 탈출하기 시작하는데, 이런 귀족들을 망명귀족(émigrés, 프랑스어로 이주자를 뜻함)이라고 불렀습니다. 초기 망명귀족들은 아르투아 백작(comte d'Artois, 훗날의 샤를 10세)과 그의 두 아들, 콩데 공(prince de Condé), 콩티 공(prince de Conti), 폴리냑 가문(Polignac family) 등이었습니다. 그리고 좀 늦게 전 재무대신인 샤를 알렉상드르 드 칼론 자작(Charles Alexandre, vicomte de Calonne)이 이 대열에 합류하지요. 이들은 토리노(이탈리아)에 일단 자리를 잡았는데, 칼론은 이곳에서 프랑스 내부에서는 내전을 선동하고 전 유럽에서는 프랑스에 대항하는 대동맹을 구축하려고 획책하는 아르투아 백작과 콩데 공 측의 공작원으로 활동합니다.

한편, 해임당한 후 바젤로 돌아가 있던 네케르는 승리감 속에서 파리로 들어옵니다만 그의 그런 기분도 오래가진 않았습니다. 파리에 도착한 네케르가 자기와 마찬가지로 재무 업무를 맡았던 푸용(Joseph Foullon de Doué)과 푸용의 조카(양자?) 베르티에는 살해당하고 브장발 남작(3편 참조)은 투옥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 푸용은 바스티유가 함락되자 파리를 떠나 친구인 앙트완 드 사르틴(Antoine de Sartine)의 집에 숨었습니다. 사르틴의 집이 있는 비리-샤티용(Viry-Châtillon)은 파리 중심가에서 남쪽으로 13마일 정도 떨어진 마을인데, 이곳에서 푸용은 자신이 이미 죽었다는 소문을 퍼뜨리지만 사르틴의 소작인들이 얼마 안 가서 그를 발견하고는 체포해서 파리로 압송하죠. 이 농민들은 푸용의 신발을 벗겨 맨발로 파리까지 걷게 하고, 등에다가는 건초다발을 묶었으며, 목이 마르다고 하면 식초를 주고 땀이 흐르면 쐐기풀(...)로 닦아주었습니다.


참고로 쐐기풀은 이렇게 생겼습니다.
(그림 출처 : http://canalphotos.org/3-24_canal_nettle_3_PSrz.jpg)


왜 이렇게 푸용이 가혹한 처우를 받았는가 하면, 그가 혁명 이전부터 증오를 받아온 때문이었습니다. 농민들은 푸용이 가혹하게 세금을 걷는 것을, 파리 시민들은 그가 빈민을 착취해서 쌓은(것이라고 여겨졌습니다) 부를 증오했습니다. 게다가 혁명 이전, 기근이 닥쳐 농민들이 굶주리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푸용이 이런 발언을 한 적이 있어요.

"각하, 기근이 닥쳐서 농민들이 굶주리고 있는데 세금을 좀 면제해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농민들이 굶주리고 있다면 그놈들에게 풀을 먹이면 된다. 내 말도 풀을 먹는데 안 될 것 있나?"

세상이 뒤집히는 판국에 프랑스 사람들이 이런 놈을 그냥 둘 리가 있겠습니까(...).

파리 시청으로 끌려온 푸용은 새 시장인 바이이와 국민군 사령관 라파예트의 변호에도 불구하고 조카 베르티에 드 소비니(Louis Bénigne François Berthier de Sauvigny)와 함께 잔뜩 열받은 군중에게 시청앞 광장으로 끌려나갔습니다. 그리고 가로등에 목이 매달렸는데...글쎄 푸용의 목을 매단 줄이 세 번이나 끊어져 그때마다 땅바닥을 굴렀습니다. 보통의 사형 집행이라면 이럴 경우 형을 연기하는 경우가 많지만, 자비로운 파리 시민들은 풀롱의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서 대신 목을 자르기로(...) 합니다. 푸용의 잘려진 목은 드 로네이의 그것처럼 창 끝에 꽂혀서 거리를 순회했고 그 입에는 풀이 하나 가득 물려 있었으며, 창을 받쳐든 시민들은 다 같이 입을 모아 "풀이나 먹어라!" 를 합창하면서 행진을 했다고 하네요.



네케르는 또다른 유혈사태를 피하고자 다소 무리한 요구를 한 끝에 파리 시의회로부터 대대적인 사면령을 얻어냈습니다. 그러나 이는 그동안 축적된 시민들의 분노를 헤아리지 못한 행동이었습니다. 정말 유혈사태를 방지하고자 했다면 이렇게 무리해서 사면을 요구하는 것보다는 인민재판과 학살극을 대신할 정당한 재판을 시행함으로써 민중의 불만을 해소하는 편이 나았지만, 네케르는 정치적 힘이 어느 쪽에 쏠려 있는지를 잘못 파악했지요. 그는 의회의 힘을 과대평가했고, 의회는 자신들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곧바로 사면령을 철회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 샤틀레(Châtelet)에 재판소를 설치하지요. 이 순간이 바로 네케르가 혁명의 물결을 따라가지 못하고 뒤처지는 시점이 됩니다.

파리에서 일어난 봉기의 성공에 대한 소식은 이제 프랑스 전역으로 퍼져나가게 되었습니다. 시민들은 국민 주권의 원리에 따라 스스로를 통치하기 위한 자치정부를 결성하고 자위를 위해 국민군에 입대하며, 국왕의 권위에 따른 요구를 무시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농촌 지역에서는 변화가 진행되는 와중에 적잖은 수의 토지 증서와 귀족의 성(châteaux)들이 불타오르게 되지요. 워낙 그동안 농민들이 맺힌 게 많았으니까요.....이제까지 나온 많은 장면들이 그랬듯 이 장면 역시 디킨즈의 <두 도시 이야기>에서 실감나게 묘사됩니다.


5. 에필로그 - 현재의 바스티유

1789년 11월에 요새가 철거된 후, 바스티유가 있던 장소는 바스티유 광장이라고 불리게 되고 바스티유 오페라 극장이 자리잡습니다. 요새 배후에 있던 거대한 해자(맨 위에 있는 요새 주변 지도에서 해자를 보실 수 있습니다)는 보트놀이를 위한 정박지가 되고, 남쪽으로 가는 바생 드 라르스날(Bassin de l'Arsenal) 운하와 북쪽에서 요새가 있던 자리를 빙 둘러서 선착장까지 연장된 뚜껑 덮인 수로인 성 마르틴 운하가 여기에 연결되었습니다.

1899년에는 지하철 공사 중에 파괴되지 않은 탑 하나의 잔해가 일부 발견되었는데, 이 석재들은 몇백 미터 떨어진 공원으로 옮겨져서 현재까지 전시되고 있다고 합니다. 아래 사진에 나온 돌덩어리들이 오늘날 남아있는 바스티유 요새의 전부라는군요. 이 탑은 혁명 당시 자유의 탑(Tour de la liberté)이라고 불렸었다고 하는데, 이 잔해가 현재 전시되고 있는 공원은 바스티유가 원래 있던 곳에서 남서쪽으로 500미터쯤 떨어진 곳이라고 합니다. 그 외에 석재 중 일부가 센 강을 건너는 다리를 건설하는데 쓰였다고도 하고요.


오늘날 공원에서 전시되고 있는 바스티유 요새의 잔해.
(그림 출처 : http://www.atkielski.com/inlink.php?/PhotoGallery/Paris/General/BastilleRemainsSmall.html)


그리고 요새의 원래 외곽선은 포장도로와 보도로 구분되고 있으며, 그 선 안쪽은 특별한 돌(?)로 포장되어 있다고 합니다. 게다가 "특별한 장소라서인지 카페 하나와 다른 사업들이 요새의 많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고 했는데, 위키에서 사용한 "some other businesses"라는 표현이 뭘 지칭하는지 모르겠군요. 직접 가보신 분께서 거기 있는 "some other businesses"가 어떤 것들인지 설명해주시면 매우 고맙겠습니다^^; 카페 말고 뭐가 더 있는 건가?


현재의 바스티유 광장.
(그림 출처 :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en/b/be/PlaceBastille20040914B_CopyrightKaihsuTai.JPG)


광장 한가운데 서 있는 저 탑은 "7월 기둥(Colonne de Juillet)"이라고 해서, 절대왕권을 회복하려고 의도하던 샤를 10세를 몰아내고 시민왕 루이 필립을 집권하게 한 1830년의 7월 혁명을 기념하는 구조물입니다. 저 탑에는 1830년 혁명 중 사망한 파리 시민들의 이름이 금으로 새겨져 있으며, 꼭대기에 있는 금도금된 조상은 "자유의 혼(Génie de la Liberté )"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제 사라진(화폐가 프랑화에서 유로화로 바뀌었으므로) 10프랑짜리 주화에도 저 조상이 새겨져 있었다고 하네요. 이 탑에 대한 설명으로 바스티유에 관한 연작 포스팅을 모두 마칩니다. 그동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무리로 탑과 꼭대기 조각을 확대해서 촬영한 사진 하나씩.^^
(그림 출처 :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c/c5/July_Column_at_Place_de_la_Bastille_-_July_2006.jpg)
(그림 출처 :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c/c2/Genie_de_la_bastille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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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생각하고 시작했다가 근 두 달을 끌었군요. 뭐, 그냥 간단하게 국내 소스 베껴다 붙였으면 한 시간이면 뚝딱 끝냈겠는데^^;;

그래도 그러기는 싫어서 이것저것 참고하고(주로 영문판 위키) 자료 찾고 하다 보니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걸렸습니다. 포스팅 하나로 간단하게 끝내려던 첫 계획이 무색할만큼. 다음에 무슨 "기념포스팅"을 하려고 마음을 먹으면 최소한 해당 날짜 한 달 전부터 작성에 들어가야 할 것 같아요. 이번처럼 내킨다고 당일 저녁에 시작할 게 아니라 말이죠...ㅋㅋ

다음 연작포스팅(...)은 아직 주제 미정입니다. 사실 한국호랑이 이야기에 덧걸어서 사파리 특집(;/;;;)을 써 볼 생각이었는데, 이것도 못 마친 상태에서 그걸 한다는게 영 내키지 않아서 간단하게 끝내고 말았거든요. 뭐, 조만간 하나 시작하긴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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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티유 이야기> 참고자료

라이프 인간세계사, 종교개혁
리더스 다이제스트 세계상식백과
조르주 뒤뷔의 지도로 보는 세계사
케임브리지 프랑스사
플래툰 119호(2005.5)

members.klosterneuburg.net/handerle/BASTILLE.HTM
http://mtcha.com.ne.kr/world-man/france/man1-geclang.htm
http://www.answers.com/topic/alessandro-cagliostro
http://www.allthatworld.com/nation/nation_info.php?nat_num=36&menu_num=91&b_no=1928
http://www.periclespress.com/France.html
http://mahan.wonkwang.ac.kr/nonmun/99/9637.htm
http://www.atkielski.com/inlink.php?/PhotoGallery/Paris/General/BastilleRemainsSmall.html
http://monthly.chosun.com/reporter/writerboardread.asp?idx=493&cPage=3&wid=ironheel
http://www.fullbooks.com/History-of-the-French-Revolution-from-17891.html
http://www.geocities.com/Heartland/Pointe/6765/mylineage.html
http://www.militaryheritage.com/loading1777frenchmusket.htm

두산 엔사이버 -
뒤무리에
사드
삼부회
스위스
에티엔 마르셀의 난
자크리의 난

위키피디아(영) -
10th of August (French Revolution)
Affair of the diamond necklace
Alessandro Cagliostro
Bastille
Bernard-René de Launay
Bertel Thorvaldsen
Bertrand du Guesclin
Charles François Dumouriez
Charenton (asylum)
Château de Vincennes
Comtesse de la Motte
Duchy of Montpensier
Grand Squire of France
Hôtel de Ville, Paris
Jacques de Flesselles
Jean Sylvain Bailly
Joseph Foullon de Doué
July Column
Louis René Édouard, cardinal de Rohan
Marquis de Sade
Marshal of France
Pierre Victor Besenval de Bronstatt
Prince Josias of Coburg
Rue de la Chaussée-d'Antin
September Massacres
St. Bartholomew's Day massacre
Storming of the Bastille
Switzerland
Viry-Châtillon

위키피디아(불) -
Charles-Eugène de Lorraine

by 슈타인호프 | 2007/09/09 04:27 | 세계근세(~1789) | 트랙백 | 핑백(1) | 덧글(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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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많을 듯^^; 바스티유 이야기(1) - 바스티유의 탄생 바스티유 이야기(2) - 바스티유의 변화 바스티유 이야기(3) - 바스티유의 석양 바스티유 이야기(4) - 바스티유의 최후 다음에는 연도에 맞춘 포스팅을 하도록 노력해 보지요^^; ... more

Commented by ghistory at 2007/09/09 05:04
샬레빌->샤를빌.
Commented by ghistory at 2007/09/09 05:05
상부 캐나다->어퍼 캐나다(Upper Canada)?
Commented by ghistory at 2007/09/09 05:08
로베스피에르의 뒤를 이어 통령이 됨->뭔가 좀 이상한 대목이군요. 국민공회정부->총재정부->통령정부인데?
Commented by ghistory at 2007/09/09 05:09
대의원들이 발포를 중단하자고 제안하는 것도->무슨 의회의 의원들인지요?
Commented by ghistory at 2007/09/09 05:15
중위->프랑스혁명 이전까지는 부중대장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프랑스혁명 이후에야 계급제도가 현재의 원형을 갖추었고, 그 이전에는 '대령' 에 해당하는 어휘는 '연대장' 이고 '중령' 에 해당하는 어휘가 '부연대장' 이며 '대위' 에 해당하는 단어는 '중대장' 이고 '중위' 에 해당하는 단어는 '부중대장' 입니다. 이건 직책을 가리키는 용어이지 계급을 지칭하진 않았죠. 자세한 건 프랑스사학회 2007년 학술대회 발표문을 참조하세요.
Commented by ghistory at 2007/09/09 05:16
샹 드 마르스 광장->지금은 광장일 지 모르지만 당시는 병영 내지 연병장이었습니다.
Commented by ghistory at 2007/09/09 05:16
샹 드 마르스 자체가 군신의 공간 뭐 그런 뜻이죠.
Commented by ghistory at 2007/09/09 05:18
피에르 가브리엘 베르트홀->피에르 가브리엘 베르토.
Commented by ghistory at 2007/09/09 05:20
쟝 실베인 바일리->쟝 실뱅 바이이.
Commented by ghistory at 2007/09/09 05:21
코뮨(commune)->코뮌.
Commented by ghistory at 2007/09/09 05:21
길로틴->기요틴.
Commented by ghistory at 2007/09/09 05:21
테니스 코트의 선언->죠 드 폼 구장의 선언?
Commented by ghistory at 2007/09/09 05:22
콘티 공->콩티 공.
Commented by ghistory at 2007/09/09 05:23
풀롱->푸용?
Commented by ghistory at 2007/09/09 05:24
바이리-샤틸롱->비리-샤티용.
Commented by ghistory at 2007/09/09 05:24
쇼비니->소비니.
Commented by ghistory at 2007/09/09 05:25
샤텔레->샤틀레.
Commented by ghistory at 2007/09/09 05:26
바신 디 아스날->바생 드 라르스날.
Commented by sonnet at 2007/09/09 06:31
ghistory/ 가능하면 한 두개 정도의 덧글에 몰아 써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20개 가까운 덧글을 쓰니까 당장 보는 사람도 정신이 없고, 우측 메뉴의 "최근 등록된 덧글" 전체를 한 사람이 점령하는 셈이 되어서 모양새가 좋지 않습니다.
Commented by 파파울프 at 2007/09/09 08:59
수고 하셨어요 잘 읽었습니다 ^^
Commented by 초록불 at 2007/09/09 09:28
불어 표기 부분은 의외로 슈타인호프님처럼 하고 있는 곳이 많지요. 어차피 정확한 발음은 표기할 수 없기 때문에 표준을 따르는 것이 옳겠습니다만 불어의 경우는 정확한 규정이나 있는지 모르겠어요. 코뮨만 해도, 꼬뮨, 꼬뮌으로 쓰는 분들도 있죠. 원문을 병기하는 게 제일 좋겠지만...

아무튼 글 잘 보았습니다.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7/09/09 11:29
ghistory//

1. 수정하겠습니다.

2. 원문은 어퍼 캐나다 맞습니다.

3. 해당 부분의 원문은 “At 11.30 another delegation led by Thuriot, five years later to be the president of the National Convention and to overthrow Robespierre...”입니다. president는 통령이 아니라 국민공회 의장직에 있었다는 것이 정확하겠네요.
그런데 위키에서 다시 확인해 보니 투리오가 의장직에 있던 시기는 1794년이 아니라 1793년(6.27~7.11)이더군요. 본문이 오류라고 보고 수정했습니다.

4. 해당 부분의 원문은 “The crowd seemed to have felt it had been drawn into a trap and the fighting became more violent and intense, while attempts by deputies to organize a cease-fire were ignored by the attackers.”입니다. 여기서 deputies를 별 생각 없이 대의원으로 직역했는데, 대표단(요새 접수를 위해 구성되었던)으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겠군요.

5. 감사합니다. 그 시대는 직책 우선이었다는 걸 깜빡했네요.

6. 샹 드 마르스가 당시에는 루이 15세 시대에 건립된 사관학교의 연병장이었다는 이야기는 시리즈 3번에서도 언급한 바 있습니다만, 광장이나 연병장이나 확 트인 빈터라는 점에서 동일하니 별 차이 없지 않을까요? 국내서적 상당수도 혁명 당시의 샹 드 마르스에 대해서 광장이라고 쓰거나 아예 고유명사화시켜 부연설명을 달지 않고 사용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연병장이라고 표기한 사례는 거의 보지 못한 것 같네요. 여기서도 그냥 광장 표기 제거하고 샹 드 마르스라고만 쓰겠습니다.

7. 시리즈 3번에서 언급했습니다^^

8,9,10,11. 감사합니다. 수정하겠습니다.

12. 시리즈 3번에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만...

“테니스 코트의 선언 장면. 사실 원래 프랑스어로 하면 테니스 코트가 아니라 '주 드 폼의 선언(Serment du jeu de paume)'입니다. 테니스 비슷한 공 치는 스포츠를 당시 프랑스어로는 그렇게 불렀거든요.”

원어로는 말씀대로가 맞지만, 국내에서는 영어식인 테니스 코트의 선언이 많이 사용되고 있으므로 국내 관례에 따랐습니다.

13,14,15,16,17,18. 감사합니다. 수정하겠습니다.

늘 꼼꼼하게 덧글 달아주시고 프랑스어 표기도 고쳐주셔서 감사합니다만...밑에 sonnet님 말씀하신 것 좀 생각해주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사실 sonnet님이 말씀해주신 문제들 말고 저도 약간 좀 그런 것이, 덧글이 수십 개씩 붙었기에 와 이번 포스팅 반응 무지 좋은가 보다...하고 클릭했다가 약간(...) 실망하는 문제가 있어서요^^;; ghistory님이 덧글 다시는 게 싫다는 이야기가 절대 아니고 숫자를 좀 조절해 주실 수 없을까 하는 이야기일 뿐이니 오해는 없으셨으면 합니다.

sonnet//읽어주시고 의견주셔서 감사합니다.

파파울프//잘 읽으셨다니 다행이네요^^;

초록불//사실 제가 프랑스어를 할 수 있으면 간단하게 해결할 문젠데 그게 안 되니 고생이네요. 웹에서 쓸 수 있는 사전을 다행히 찾아서 단어 해석은 그럭저럭 합니다만, 발음 쪽은 아무래도 골치가 좀 아픕니다. 프랑스어도 표준 표기법은 있을걸요, 아마....그리고 실제 발음과 다소 거리가 있는 다양한 표기가 나오는 원천은 아무래도 기존의 영어/일본어 중역본들의 영향이 크지 않을까 싶습니다. 잘 보셨다니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산왕 at 2007/09/09 12:08
잘 읽었습니다. 이름이나 지명표기는 그냥 적당히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데 역시 '분노의 포도'는 떨어지는군요.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7/09/09 12:45
산왕//뭐 기왕이면 정확한 게 좋기는 좋지요^^;
Commented by 초록불 at 2007/09/09 13:19
잡담이 되겠지만 쥬드폼의 선언 경우는, 제가 제일 처음 읽었던 책에는 정구장의 선언이라고 되어 있었다는...

정구장이 뭔지 몰라서 공을 정리하는 곳일 줄 알았다는 그런 먼 먼 옛날의 이야기...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7/09/09 13:37
초록불//요즘 학생들이야...배구, 탁구, 농구, 축구, 피구, 야구, 수구는 알아도 정구, 격구, 송구는 모르겠죠. 배드민턴이랑 소프트볼도 한자어 명칭이 있었던 것 같은데 찾지를 못하겠네요.
Commented by ghistory at 2007/09/10 19:08
투리오->튀리오.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7/09/11 12:03
ghistory//넵,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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